05화<쭈니>
“가말? 희한한 이름이네.”
도영은 말했다.
이름으로도 국적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눈이 붉은 걸로 보아 꽤 오래 살았을 테니 이미 사라진 나라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었다.
“희한?”
모르는 단어에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천진해 보여서 도영은 좀 놀랐다. 그와 싸울 때는 누구보다 섬뜩했는데 말이다.
도영은 쉬운 말로 다시 말했다.
“이상하다고.”
“안 이상해.”
가말은 바로 울컥한 표정을 내보였다. 생각보다 성격이 있어 보였다.
“그래. 미안하다.”
도영은 별로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순순히 사과했다. 그러자 가말은 넌지시 물었다.
“넌?”
도영은 가말을 보았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신원을 밝힐 순 없었다. 오히려 이 모든 건 세트고,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려고 보낸 정보원일 수도 있었다.
“이스마엘.”
그래서 일부러 가명을 썼다.
“이름 이상해.”
그런데 가말이 바로 이러는 것이다. 도영은 관자놀이에 힘이 들어갔다.
“이 자식이 진짜.”
“네 이름 아니잖아.”
가말은 태연히 말했다. 도영은 놀랐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자 가말은 크로스백을 열어 손을 넣더니 뒤적거리다가 익숙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도영의 손목밴드였다. 싸우다가 파손됐는지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것이었다.
“네 진짜 이름은….”
가말이 천천히 말해 도영은 긴장했다. 가말은 밴드를 인식표가 보이도록 뒤집었다.
“소령이야.”
손목밴드가 잘려서 이름도 거기서 잘려있었다. 그걸 가리키면서 가말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일 생각하지 마. 다 알아. 소령.”
“아, 그래.”
생각보다 약간 바보 같았다.
소령이란 단어 자체를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만 어쨌든 도영에겐 다행이었다.
“이 섬에서 살아?”
도영은 화제를 돌렸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혼자?”
“응.”
도영이 얼추 둘러봤을 때도 무인도 같았다.
“왜? 조난당한 건 아닐 테고.”
이 섬이 다소 육지와 멀어도 뱀파이어라면 헤엄을 치든 거대한 뗏목을 만들든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영이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자 다른 소리를 했다.
“여기서 살아.”
도영은 가말이 조난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조난이라는 건….”
“밥 먹어.”
갑자기 가말은 대나무를 엮은 바구니에 담아 온 음식을 도영 앞으로 밀었다. 도영은 다시 말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왜 여기 혼자….”
“밥 먹어야 돼. 겅강? 해지려면.”
발음이 헷갈리는지 가말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대답할 생각이 없군.’
도영은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한 걸음 물러나기로 하고 대신 단어를 제대로 말해주었다.
“건강.”
“건강.”
가말은 활짝 웃으면서 말을 따라 했다. 무표정할 때는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냉기가 흐르는 느낌이었는데 웃으니까 바로 순한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도영은 기가 막혔다.
‘뭔데 귀여워?’
그리고 반사적으로 생각한 자신을 걷어찰 뻔했다.
눈앞에 있는 건 흡혈귀였다. 요즘 뱀파이어는 흡혈하지 않으니까 흡혈귀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었지만, 이쪽은 뭘 먹고 사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쨌든 안 그래도 가말이 늦게 와서 배가 고팠다. 뭘 하려고 해도 일단 밥은 먹어야 하니 도영은 끈에 묶여있는 제 팔을 내밀었다.
“이거 좀 풀어봐.”
가말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가 이 다리로 도망을 가겠어?”
도망갈 데나 있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가말은 단호했다.
“움직여. 아파. 가만히 있어야 해.”
움직이면 아프니까 가만히 있으란 말 같았는데 미안하지만, 그가 움직이고말고 여부를 결정하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도영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풀어라.”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도영은 다시 말했다.
“풀어.”
가말은 움츠러든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러고 밥을 먹으리?”
그러자 가말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얼굴이 되었다.
“내가 먹여줄까?”
도영은 제 손에 이마를 묻었다.
자신은 어쩌다가 무인도에서 정체 모를, 그것도 ‘I ♡ NY’ 티셔츠 따위를 입은 뱀파이어한테 붙잡혀서 이러고 있게 됐을까?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대략 30시간 전 자신에게 네가 이런 상황에 처할 거라고 말해줬다면 도영은 웃어버렸을 것이다.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라고.
임무지에서 폭탄이 터진 순간부터 제 운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나 실험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영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가말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 잘 봐.”
도영이 운을 떼자 가말은 선생님에게 ‘주목’ 소리를 들은 아이처럼 집중했다.
“넌 뱀파이어야. 난 인간이고. 그렇지?”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은 계속 말했다.
“여기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여기 지형을 잘 알아. 난 알 리가 없고. 여기까지 이해했어?”
가말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은 부목으로 고정해놓은 제 다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네가 걷어찬 덕분에 내 다리는 이 모양 이 꼴이야.”
“미안.”
가말은 정말 미안해하며 말했다. 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사과 듣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데 뭐가 무서워서 날 묶어두겠다는 거야?”
“어….”
가말은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싶어졌는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릇을 들고, 인도의 난처럼 효모 없이 구워낸 납작한 빵 한 조각을 쑥 내밀면서 고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안 돼.”
도영은 입안으로 욕을 삼켰다. 다 넘어왔었는데.
“먹어.”
가말은 입가로 빵 조각을 재차 들이밀었다. 도영은 빵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먹었다. 일단은 배가 고팠고, 다리가 나아야 했다.
그런데 빵을 먹고 나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괜찮은데?”
프랑스인인 도영에게 맛있는 빵의 기준이란 어마무시하게 높았다. 그런 그가 ‘괜찮다’라고 할 정도라면 어디 가서 팔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가말은 뿌듯한 얼굴을 하더니 양손으로 불이 타오르는 손짓을 했다.
“빵 구워. 불… 어, 훅훅 있어.”
“화덕 말이야?”
“화덕?”
“빵 굽는 거.”
“응. 있어. 내가 만들었어.”
화덕을 만들 정도라면 어쨌든 이 섬에 꽤 오래 살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어디서 급한 대로 당장 갖다 심은 정보원 같진 않았다.
가말은 빵을 더 찢어서 내밀었다. 도영은 받아먹었다. 몇 차례 그러는데, 그 모습을 왠지 신기해하는 눈으로 보던 가말이 갑자기 이러는 것이다.
“개 같아.”
도영은 멈칫했다.
“이 자식이 진짜…!”
도영은 그대로 로켓을 쏘듯이 머리로 가말의 턱을 들이받았다. 아무리 뱀파이어여도 급소인 턱을 맞은 데다가 전혀 방비하고 있지 않았던 탓에 가말은 뒤로 벌렁 넘어가고 말았다.
팅, 따라랑!
날아간 그릇과 음식물들이 바닥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굴렀다. 도영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꼴로 있는데? 그런데 개?”
가말은 놀란 얼굴이었다. 엎어진 자세 그대로 제 턱을 짚고 중얼거렸다.
“머리로 때렸어.”
그러는 사이에 끈이 모자라서 더 갈 수 없는 도영은 다리를 휘저으면서 소리쳤다.
“이거 풀어! 풀어보라고! 진짜 미친개가 뭔지 보여줄 테니까!”
가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영을 보고 있더니만 일어나 뛰어나갔다. 도영은 그 뒤에 대고 소리쳤다.
“어디 가, 이 자식아!”
***
도영은 드러누운 채로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해보았다.
‘이름, 가말. 종족, 뱀파이어. 국적, 불명. 나이, 불명. 외모로는 스물넷이나 다섯쯤. 눈이 붉은 걸 보니 적어도 사백 살 이상. 특이사항, 무인도에 혼자 살고 있음. 진짜 혼자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끌어모아도 지금으로서는 그게 전부였다. 이놈의 오라를 풀질 않으니 뭘 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까도 좀 더 살살 꼬셨어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화가 확 솟구쳤다.
여자를 때린 데 대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게 어디 ‘노약자’의 범주에 들어가야 말이지. 저 뱀파이어에 비하면 오히려 자신이 노약자 대접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가말을 들이받은 머리가 한동안 쑤셔서 죽는 줄 알았다.
사실 도영으로서도 정체 모를 뱀파이어를 믿을 수는 없었다.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내에 뭘 감추고 있을지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보다, 지금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젠장, 화장실은 어떡하라고?”
도영은 투덜거렸다.
정체 모를 뱀파이어에게 붙잡혀 묶여있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간의 생리현상은 참으로 정직했다. 게다가 그는 잘 먹을 때는 하루에 만 칼로리도 소화할 수 있는 장 능력의 소유자이니 말이다.
그때 문이 홱 열리더니 가말이 나타났다.
“화장실 가고 싶어?”
도영은 기가 막혔다. 가말이 다른 데 갔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야, 너? 앞에 있었어?”
“응. 있었어.”
그러니까 부부싸움을 하고 뛰쳐나갔지만 결국 갈 데가 없어서 집 앞에 앉아 담배 한 대 태우는 남편처럼 밖에서 청승을 떨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워낙 청력이 좋아서 도영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도영은 복부 힘으로 벌떡 일어났다.
***
빌어먹게도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알퐁스 도데는 과연 이런 밤하늘을 보고 ‘별’을 썼으리라.
그러고 보니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밤하늘을 느긋하게 올려다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육사의 기숙사에서 피 터지게 공부하던 중에 찬 공기가 필요해 잠깐 밖으로 나왔다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나, 임무를 나갔을 때 돌격 사인을 기다리는 동안 순간적으로 밤하늘에 시선이 멈췄을 때였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열심히 살았다. 장교가 되기 위해 사시생인 양 공부했고 특수부대 군인이라는 특성상 공부에 들였던 시간과 노력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몸을 단련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는 지금 무인도의 풀밭에서 이러고 있었다.
“내 살다 살다 진짜.”
도영은 바지를 추스르고 버클을 잠그면서 시선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어둠에 잠긴 숲속에서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뭐 하나라도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때 도영의 손목을 묶고 있는 줄이 당겨졌다. 그리고 덤불 너머에서 가말이 소리 높여 물었다.
“됐어?”
도영은 눈을 굴렸다.
“기다려.”
그리고 절뚝거리며 수풀 밖으로 나갔다. 가말이 도영을 묶은 끈의 끝을 붙잡고 서 있었다. 도영은 말했다.
“누구랑 약속 있어? 뭐가 그렇게 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