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6화 (6/110)

06화<쭈니>

가말이 소리 높여 물었다.

“됐어?”

도영은 눈을 굴렸다.

“기다려.”

그리고 절뚝거리며 수풀 밖으로 나갔다. 가말이 도영을 묶은 끈의 끝을 붙잡고 서 있었다. 도영은 말했다.

“누구랑 약속 있어? 뭐가 그렇게 급해?”

“오래 걸려.”

“똥 쌌다는 이야기를 꼭 내 입으로 해야겠냐?”

예의와 매너를 아는 남자로서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부러 더 적나라하게 말했다. 그런데 가말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똥? 똥이 뭐야?”

원래 언어를 배울 땐 욕과 더러운 단어부터 배우게 되는 법인데 누구한테 프랑스어를 배웠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 같은 거다.”

도영이 말하자 가말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이 상황이 왜?”

도영은 머리가 아파오려고 했다. 약간 이해력이 떨어지는지, 가말은 갓 세상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어린아이보다 질문이 많았다.

“그럼 이 상황이 머리에 꽃 꽂고 탭댄스 출 상황이겠어?”

가말은 도영의 말을 이해해보려는 기색이더니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소령 말 어려워.”

도영은 됐다는 듯 손을 젓고 목발 대신 쓰는 나뭇가지를 짚어 가말을 지나갔다. 가말은 얼른 따라왔다. 그리고 해변으로 나오자 바로 통나무집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도영이 끈을 당기며 말했다.

“잠깐. 손은 씻어야 할 거 아냐.”

그러고 도영은 오히려 그가 끈을 붙잡고 있는 사람인 양 자연스럽게 해변으로 다가갔다. 가말은 통나무집을 돌아보며 주저하다가 끈이 당겨져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도영은 손을 씻는 척하면서 하늘을 보고 별을 읽었다. 아까 볼일을 보면서 봤을 때도 알았지만 이곳은 정말 태평양 한가운데였다.

‘레기온은 날 어디로 이송시키려고 했던 거지?’

방향을 보면 미국 쪽으로 가던 길이었다.

‘대표라는 녀석이 북미 대륙에 있는 건가.’

생각하는데 줄이 당겨졌다. 가말이 엉거주춤하게 서서 말했다.

“언제까지 씻어?”

도영은 해변을 올라가는 척하다가, 배 째라는 식으로 해변에 주저앉아버렸다.

“좀 앉았다 가자. 답답해.”

“하지만….”

가말은 그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웅얼거렸다. 도영은 손을 내저었다.

“누차 말하지만 이 다리로는 못 뛰어. 내 두 다리가 멀쩡해도 네가 더 빠르겠지만.”

“소령 빨랐어. 처음에.”

“그건 허점을 노린 거지.”

뭐라고 해도 도영이 일어날 기색이 아니자 가말은 별수 없어 옆에 앉았다. 사실 일반적으로 감금을 하는 사람이라면 윽박질러서라도 제 뜻대로 할 텐데 가말은 그런 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어 보였다.

솨아아….

파도 소리가 밀려왔다.

도영은 가만히 앉아있는 가말을 보았다. 많은 뱀파이어들을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전성기 때의 올리비아 핫세나 이자벨 아자니가 떠오르는 얼굴인데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명색이 이쪽은 인간이 아니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면서도 끝부분에 영양분이 닿지 않아 거친 느낌이 없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굴곡이 부드러운 몸을 타고 내렸다. 인간처럼 생긴 꽃이 있다면 이런 모양일 것이다.

도영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고 있는 꼴은 참으로 난해했지만.

가말이 입고 있는 아이 러브 뉴욕 티셔츠는 오래돼서 구멍이 나다 못해 거의 입은 그대로 소멸이 될 지경이었다.

하의는 어디서 죽 찢어낸 천을 휘휘 둘러 끈으로 고정했는데 치마라기보다는 그냥 넝마를 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조개껍질을 엮어 만든 목걸이에, 동물의 뼛조각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목걸이를 곧 신내림이라도 받을 스타일로 주렁주렁 걸고 있었다.

그 심란한 패션의 화룡정점은, 역시 천을 찢어 두꺼운 바늘로 얼키설키 바느질해서 대충 모양만 잡히도록 만든 크로스백이었다.

“그 티셔츠는 어디서 났어?”

도영이 묻자 가말은 제 옷을 한 번 보고 대답했다.

“떠내려 왔어.”

“입는 방법은 어떻게 알고?”

가말은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나 바보 아니야.”

하긴, 서양인과 동양인 사이 어딘가 같은 외모를 보면 이 섬에서 태어났을 리는 없었다. 무인도이긴 하지만 이 섬에 부족이 있다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원주민에 더 가까운 얼굴일 것이다.

도영은 저 멀리 오른쪽으로 섬이 굴곡져 사라지는 곳을 보았다.

“넌 여기서 뭘 먹고 사는 거야?”

일단 사람이 없으니 뱀파이어가 먹고 살 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동물의 피는 역하기 때문에 먹을 만한 게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가말은 메고 있는 크로스백을 주섬주섬 열더니 안을 보여주었다.

“꽃을 먹어.”

가방 안을 들여다본 도영은 말문이 막혔다.

“이건….”

가방 안에 붉은 꽃들이 들어있었다. 요즘 뱀파이어들이 혈액 대신 섭취하는, 꽃의 유기 합성물 ‘플로스’의 원료가 되는 꽃이었다.

도영은 믿기지 않아 말했다.

“꽃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 상태로는 충분한 영양분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 그런데 이걸로 된다고?”

“많이 먹어.”

“아, 그래.”

도영은 말하기도 피곤해졌다. 많이 먹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플로스가 개발되기 전까지 그 난리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말을 상대로 따져봤자 의미가 없어 보여서 토 달지 않았다.

“이건 어디서 나서?”

대신 묻자 가말은 뒤쪽에 있는 산을 가리켰다.

“저기 많이 있어.”

꽃은 원래 추운 곳에서 자라는 품종이라 평소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섬은 아열대 기후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봤자 알 수가 없으니 도영은 생각을 그만두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의 문제에부터 집중하는 점이 그도 꼭 군인다웠던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쪽도 꽃을 먹는 뱀파이어라는 의미였다. 도영은 안도했다. 이렇게 깜찍하게 생겼어도 실은 그를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럴 가능성은 줄었기 때문이다.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았다.

침묵이 감돌았다. 오늘은 밖에 더 죽치고 있어봤자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가자.”

도영은 통나무집에 들어가기 위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았다. 완전히 주저앉아 있다가 아무 지지대 없이 일어나는 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 숨을 내쉬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가말이 넌지시 물었다.

“안아서 옮겨줄까?”

“건들면 죽인다.”

도영은 아무 표정도 없이 말하고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저쪽이 힘이 세다고 해도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가말이 손을 내밀었다.

“도와줄게.”

오히려 그쪽이 부탁하는 것처럼 간절한 눈이었다.

도영은 마뜩잖았지만 손을 잡았다. 그러자 가말이 그를 손쉽게 일으켜 세웠다. 도영은 키 184cm에 근육 때문에 보기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건장한 남자였기 때문에 쑥 끌려 올라가는 느낌이 낯설었다.

가말은 도영을 부축해주었다. 아이를 다루듯 힘들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키는 그가 더 커서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가슴골이 보였다.

도영은 하늘을 보고 거칠게 뇌까렸다.

“하여간 사내새끼들이란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거죽이 좀 예쁘다고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뱀파이어를 상대로 불끈하는 꼴이라니. 이쪽도 꽃을 먹는 뱀파이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해도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었다.

“응?”

가말은 영문을 몰라하며 물었다.

“아냐.”

도영이 말하자 가말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더 묻진 않았다. 그리고 통나무집에 들어가 도영이 자리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도영은 이렇게 몸이 불편했던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라 더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럼 자.”

그러고는 가말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도영은 의아해져 물었다.

“어디 가?”

“밖에.”

“넌 어디서 자는데?”

다른 곳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떠보기 위해 물었는데 가말은 통나무집 바닥을 가리키고 말했다.

“여기. 근데 소령 있어.”

“그래서?”

가말은 자신을 가리켰다가 바깥을 가리켰다.

“밖에서 자.”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이 녀석이 ‘노약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럼 내가 널 내쫓는 거 같잖아?”

가말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도영은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가긴 어딜 가. 그냥 자.”

가말은 오히려 더 깜짝 놀랐다.

“나 뱀파이어야.”

“그래서 뭐? 내 피라도 빨게?”

가말은 그런 생각은 할 수도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꽃 있어. 피 안 마셔.”

“그럼 뭐가 문제야?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당연히 다리는 이 꼴이고 팔도 묶여있는 자신이 참 잘도 그러겠다는 의미에서 비꼰 말이었다. 그리고 가말을 쫓아내고 혼자 잔다고 해도 그녀가 그를 해칠 마음만 먹는다면 방공호 안에 있어도 결국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날 덮어? 왜 덮어?”

도영은 머리가 아팠다. 단순히 언어 능력이 달리는 건지 정말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간이 뱀파이어와의 대화는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잔다.”

도영은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가말은 잠깐 주저하더니 기둥 너머 쪽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기둥을 가운데 두고 대칭으로 등을 보이고 누웠다.

가말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도영은 정말 이대로 잘 셈인 것 같았다. 가말은 작게 말했다.

“잘 자, 소령.”

“자.”

도영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잠을 청했다.

***

가말은 뜬눈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잠이 올 리가 없어서 멀건 상태로 마냥 누워있는데 갑자기 깊이 잠든 사람들에게서 나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말은 황당해서 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정말 자?”

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이 규칙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정말 자고 있는 거였다. 인간이 뱀파이어 옆에 누워서.

가말도 요즘 바깥세상에서는 인간과 뱀파이어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뱀파이어는 ‘루아스’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피 대신 꽃의 추출물을 마시고 산다는 것도. 하지만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이상한 인간.」

가말은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천장을 보고 돌아누웠다. 가만히 있으려니 도영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가말은 마침내 눈을 감았다. 이렇게 누군가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

도영은 눈을 떴다. 낯익은 통나무집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 아니었군.’

한숨을 삼키는데 왠지 등 뒤에 따듯한 게 느껴졌다.

도영은 의아해 돌아보았다가 흠칫했다. 가말이 그의 등에 딱 달라붙어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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