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7화 (7/110)

07화<쭈니>

도영은 눈을 떴다. 낯익은 통나무집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 아니었군.’

한숨을 삼키는데 왠지 등 뒤에 따듯한 게 느껴졌다.

도영은 의아해 돌아보았다가 흠칫했다. 가말이 그의 등에 딱 달라붙어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가말은 그 소리에 깨서 부스스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도 잠깐 상황을 모르는 얼굴이더니 곧 깨달았는지 퍼뜩 일어나 얼른 몇 걸음 물러났다.

“미안.”

도영은 수상한 걸 본 것처럼 인상을 쓰고 물었다.

“왜 내 등에 붙어있어?”

가말은 큰 잘못을 한 아이처럼 어물거렸다.

“그게… 소령 숨 쉬는 소리가 졸렸어. 소리 듣다가….”

그러니까 숨 쉬는 소리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와 붙었다는 말 같았다.

사실 도영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생전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미녀가 제 등에 붙어있어서 놀란 거였지만 가말은 뱀파이어인 자신이 가까이 있어서 놀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오해를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지가지 한다.”

그래서 도영은 괜히 더 타박하고 손을 저었다.

“더워. 물 좀 줘봐.”

가말은 얼른 일어나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물 그릇 정도는 손이 묶인 상태로도 들 수 있었기 때문에 직접 물을 마시고 있는데 가말이 빤히 도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멍이라도 뚫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눈으로. 그래서 도영은 물을 마시다 말고 눈을 치켜떴다.

“뭐야?”

“신기해. 물 마시는 거.”

그렇게 말하는 가말은 정말 태어나 처음 보는 현상을 마주한 아이 같았다. 하지만 도영은 더 시니컬하게 말했다.

“내가 코로 물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뭐가?”

가말은 놀랐다.

“코로 마실 수 있어?”

“마실 수 있겠냐?”

그제야 비꼬는 걸 알았는지 가말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물었다.

“소령 나 안 무서워?”

도영은 가말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체 이 얼간이 천치 어딜 보고 무서워해야 하는 건지 나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나 얼간이 천치 아냐.”

부어터진 볼이 콱 꼬집어주고 싶게 통통했다. 도영은 대답하기 귀찮아 손을 내저었다.

“매일 보고 사는 게 뱀파이어인데 무서울 리가.”

뱀파이어와 같이 일하고 농담 따먹기하고 팔씨름하고 카드게임을 하는데 말이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무서워하는 이유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지, 맹수를 말로 설득해 옆에 얌전히 앉혀놓을 수 있다면 굳이 무서워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가말은 신기해하며 물었다.

“매일 보고 살아? 어떻게?”

인간과 뱀파이어가 같이 일하는 군부대 소속이어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도영은 도리어 물었다.

“너 혹시 바깥에서는 뱀파이어와 인간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것도 모르는 건 아니지?”

“그건 알지만….”

‘그건 안다. 그럼 바깥과 어떻게든 연락이 된다는 의미.’

도영은 생각했다. 그때 가말이 말했다.

“그래도 사람들 뱀파이어 무서워해.”

“왜? 마을에서 돌이라도 맞고 쫓겨나 봤어?”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뱀파이어들이 많다 보니 도영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서 실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인간들이 마녀사냥한 사람들 중에 진짜 뱀파이어는 많지 않았지만-아무래도 파워의 차이가 있으니까- 수상한 게 들켜서 마을에서 쫓겨난 일은 많았다고 들었다.

도영은 팔을 앞으로 가져와 허벅지에 걸치고 물었다.

“혹시 그런 거야? 인간들한테 너무 상처를 입어서 점차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 보니 이 무인도에까지 오게 된 거?”

그런 거라면 이런 곳에서 혼자 사는 이유가 좀 이해됐다.

“그렇기도 하고….”

그런데 가말이 어물거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가말은 고개를 휙 옆으로 돌렸다.

“몰라.”

‘어디서 앙탈이야?’

도영은 기가 찼다.

그런데 가말이 무릎을 꿇고 있어서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도영은 정말 제 안에 있는 남자를 때려주고 싶었다. 아무리 ‘저건 뱀파이어다.’ 되뇌어도 저 살결이 눈부신 허벅지를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생을 덜 한 거야.’

비록 테러리스트들에게 붙잡혀서 얻어맞다가 겨우 탈출해서 죽어라 헤엄쳐 무인도에 왔는데 뱀파이어가 살고 있어서 싸우다가 다리가 금이 간 상태지만 말이다.

도영은 한숨을 쉬고 가말을 보았다.

“아침 안 줘? 굶길 거야? 제네바 제3협약(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도 몰라?”

***

“소령!”

멀리서 가말이 고대 화석에서나 봤음 직한 거대한 생선을 들고 뛰어왔다.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어 잡아 왔는지 푹 젖은 꼴로 신나서 뛰어오는 모습이 개 같은 것이 좀 귀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니, 많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연하를 좀 닮은 것 같았다.

연하는 도영의 옛 팀원이자 친구로, 그가 MCTC 서울 지부에 있을 때 이끌었던 ERU(Emergency Response Unit) 3팀의 부사관이었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도영은 2년 전 중앙근위사단의 TF(Task Force)-퍼시픽 1팀으로 새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 지부에서의 실적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상설 지부에서 TF팀으로 들어간다는 건 상당한 승진이었고, 도영의 적성도 S.W.A.T.(미국 경찰 내 대테러부대, Special Weapons and Tactics)에 가까운 상설 지부보다 TF 쪽이 더 맞았다.

TF의 임무로 적진에 잘못 침투했다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어쨌든 연하는 가말처럼 여자 뱀파이어라 외모가 열아홉에 멈춰있어서 정신연령도 덜 자란 탓에 영 맹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이야 결혼해서 좀 어른이 됐지만 아무튼 둘의 느낌이 비슷해서 그런지 어제 그도 모르게 연하를 대하듯이 윽박질러버렸던 것 같았다.

“봐! 커!”

나무 그늘아래 앉아있는 도영에게 달려온 가말은 생선을 내밀면서 활짝 웃었다.

연하와 다른 점이라면 이쪽은 더 성숙한 몸에 더 백치미를 강하게 뿜는다는 점이었다. 말이 완벽하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도영이 대답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자 가말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소령, 아파?”

도영은 한숨을 내쉬고 굽히고 있는 무릎에 대고 있는 팔을 폈다. 손목이 묶여있는 팔을.

“너 같으면 이 상황에 기운이 나겠어?”

“줄 싫어?”

“좋아한다고 하면 꼭 의심해봐라. 다음엔 널 묶고 싶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소령 말 너무 어려워.”

말해 뭐할까 싶어서 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말은 생각에 빠졌다. 도영이 뭔가를 하려고 했다면 어젯밤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린 없었을 것이다. 바로 옆에서 자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녀도 깊이 잠들어버렸으니까.

가말이 뜬금없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도영은 그녀를 보았다. 가말은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약속. 달리지 마.”

가말 뒤로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빛을 반사하는 눈부신 백사장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늘 아래, 고작 구두로 하는 약속일뿐인데도 그 약속이 중요하다는 듯이 채도가 낮아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진지했다.

“달리고 싶어도 못 달린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영은 손가락을 걸었다.

가말은 왠지 모르게 벅차올라 그대로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그러자 도영이 그가 잘하는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눈을 치켜들면서 노려보는, 좀… 등줄기가 짜릿해지는 표정이었다.

“뭐야?”

“아냐.”

가말은 손을 거두고 밧줄을 풀어주었다. 마침내 손이 자유로워진 도영은 살짝 저린 손을 털었다.

일단 팔을 푸는 데는 성공했다. 실제로 다리가 이 모양이어서 당장 달려나갈 수는 없지만 첫 번째 단계는 넘은 셈이었다.

“소령 이거 먹어? 이거 구워줄게.”

가말은 꽤 능숙하게 생선을 구울 준비를 했다. 꼭 표류된 제인을 돌봐주는 타잔처럼.

도영은 저도 모르게 하고만 제 생각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 내가 제인이냐? 응? 내가 제인인 거냐고?’

저쪽은 타잔이라기보다 온갖 걸 다 걸치고 있는 꼴이 인간의 물건을 모으는 인어공주 같기도 하고 말이다.

도영은 생선을 굽는 가말을 지켜보다 물었다.

“언제 태어났어?”

역시 가말이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토스 전 14세기.”

그런데 이번에 가말은 대답했다. 대체 대답하고 안 하고의 기준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일단 그렇다 치고, 도영은 눈을 찌푸렸다.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말이야?”

어디 나라 말인지는 몰라도 대충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나중에야 고대 그리스어라는 걸 알았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박혀 죽은 남자 말하는 거면 맞아.”

도영은 가말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원전 14세기라고? 그럼 네가 삼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거지?”

“응.”

도영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가말은 어리둥절해 했다.

“왜?”

도영은 다치지 않은 다리의 굽힌 무릎에 팔꿈치를 괸 손으로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삼천 년을 살았다는 게 말이 돼? 너 같은 바보가.”

원칙적으로는 루아스가 영원히 산다고 하지만 천 년을 사는 녀석도 흔치 않은 세상이었다. 우스갯소리라고 해도 루아스가 열한 번째 환갑을 맞으려면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그런데 가말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바보 아냐.”

“반만 깎았어도 미친 척하고 믿었을걸.”

“아냐. 삼천삼백오십 년이야. 근데 오래 잤어. 저기서.”

가말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듯이 섬 가운데 있는 산을 가리켰다.

“어느 날 비바람이 불었어. 큰 비바람. 아주 큰.”

그러고는 구연동화를 하는 것처럼 두 손을 펼쳐서 큰 비바람, 아마 태풍을 표현했다.

“나 자는 데를 열었어. 몸이….”

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더니 자기 몸이 앞으로 튕겨져나가는 몸짓을 취했다. 그리고 양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밖으로 데굴데굴 했어. 흙더미에서 깼어. 그래서 일어났어.”

도영은 미간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또 마냥 거짓말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가 실존하는 세상이었다. 뭔들 불가능할까 싶지만 삼천이란 숫자를 믿고 싶지 않다는 편이 맞았다. 지금 제 눈앞에 어벙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존재가 어지간한 미라만큼 오래 됐다고?

도영은 가말을 위아래로 훑었다. 대놓고 그랬지만 가말은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냥 도영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라하는 쪽이 맞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도저히….

“깨어난 게 언젠데?”

도영이 여전히 의심을 놓지 않고 묻자 가말은 속으로 숫자를 세듯이 고개를 이쪽으로 한 번 갸웃, 저쪽으로 한 번 갸웃했다.

“한 사백 년?”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지면 뱀파이어도 일부러 긴 수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었다.

이래저래 먹이가 넘치는 현대에는 굳이 동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동면에 들어가는 뱀파이어는 거의 없었다.

사실 옛날에는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크게 달라지는 점이 없었다. 농부는 늘 땅을 갈고, 왕들은 싸우고.

하지만 요즘은 뭐든지 빨리 변하다 보니 잠드는 순간 깨어났을 때 마주할 세상이 어떤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동면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도영은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이 섬에는 언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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