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8화 (8/110)

08화<쭈니>

도영은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이 섬에는 언제 왔어?”

그런데 이번에 가말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바다를 돌아보았다. 꼭 예전에 자신이 왔던 방향을 보듯.

“오래전.”

수평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 말간 빛이 지나갔다.

“아주 오래전.”

우련한 눈빛이 갑자기 다른 여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인지, 도영은 그 얼굴이 낯익었다.

하지만 뭔가 깨닫기 전에 가말이 돌아보고는 그에게 다 구워진 생선을 내밀었다.

“먹어.”

방싯 웃으면서.

어찌 이리 개 같은지 알 수 없었다. 욕 말고 강아지의 성체 말이다.

도영은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을 받아서 한 입 먹었다.

“소금도 네가 만들었어?”

아까 구멍을 뚫어놓은 나무통으로 생선에 하얀 가루를 뿌리는 모습을 봤던 터라 물었다.

“바닷물 끓였어.”

가말은 입안에서 가시를 발라내느라 입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소금을 정제하는 법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도영은 중얼거렸다.

“로빈슨 크루소가 따로 없네.”

뱀파이어는 혀도 강한지 가말은 김이 펄펄 나는 걸 별로 뜨거워하지 않고 합합 먹어대더니 벌써 생선의 반은 먹어치운 상태였다. 누가 식사 매너는 가르쳐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먹는 모습이 칠칠맞았다.

다소 과장했다고 해도 삼천 년이나 살았다고 할 정도라면 장수한 뱀파이어 특유의 귀족적인 오만함이나 나이가 들다 못해 썩어가는 자들이 으레 내뿜는 관조, 나태, 무기력함이 있어야 할 텐데 이건 쪼그려 앉아 군고구마를 먹는 언년이가 따로 없었다.

이 정도면 인간이었을 때도 그리 높은 신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기원전 14세기에 태어났다고?’

도영은 회의감에 차서 생각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오래 잤다고 하더라도 삼천삼백 년을 살았다는 뱀파이어의 뇌가 이렇게 청순할 수 있냐 말이다. 인간이었을 때도 외모를 보면 적어도 스물다섯은 먹었던 모양인데.

프랑스어가 완벽하지 않아서 다소 핸디캡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도 기본적으로 가진 성격이 네 자릿수 나이를 먹은 뱀파이어에겐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둘리처럼 얼음에 갇혀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때 가말이 넝마 같은 크로스백을 열어서 꽃을 꺼내더니 통째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잎담배를 씹는 것처럼.

도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맛있어?”

호기심 삼아서 도영도 루아스 동료들이 먹고 있는 플로스를 얻어먹어 본 적 있었다.

얼마 전에-그사이에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한 백 년 전쯤 일로 느껴지지만- 한 중사는 ‘반쯤 남은 상태로 얼음이 다 녹아서 식은 모히토에다가 사카린을 섞은 거 같은 맛’이라고 혹평했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맹물 같았다.

굳이 말하자면 혀끝에 맴도는 쌉쌀한 풀 맛은 있는데 오히려 그래서 비렸다. 그걸 한 중사는 식은 모히토에 설탕도 아닌 화학물질인 사카린을 섞은 것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루아스 동료들은 달다고 했다. 설탕을 먹을 때 단맛 같진 않지만 달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맛이라고.

“아니.”

그런데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써.”

“맛없어?”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뱀파이어에게도 플로스는 맛있지만 원료가 되는 꽃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많은 음식 재료들이 자연 상태에서는 별맛을 내지 못하니까.”

도영은 중얼거렸다.

결국 꽃 자체는 주식으로 먹을 만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꽃이 피의 대체품이 되지 못했겠지만.

현대 과학을 만나고서야 꽃은 뱀파이어들의 주식이 될 수 있었다.

도영은 꽃을 가리키고 말했다.

“플로스라는 게 있어. 그 꽃을 정제해서 만든 거야.”

“정제?”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야. 유기 합성이라고 그것보단 좀 더 복잡한 공정이 들어가지만 어쨌든 요즘 뱀파이어들은 피를 마시지 않고 그것만 마시고도 살 수 있어. 너도 밖에 나가면 플로스를 구할 수 있어.”

하지만 가말은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그저 강냉이를 씹듯이 계속해서 꽃을 우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도영은 덧붙였다.

“그렇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꽃을 씹어대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까 섬 밖으로….”

막 본론을 꺼내려는 참인데 가말이 꽃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꽃 충분해.”

더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는 단호한 투였다. 지금까지 가말의 캐릭터에 맞지 않을 정도로.

도영은 더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말이 먼저 물었다.

“소령 물고기 더 먹어?”

그러면서 생선으로 손을 뻗는 게 그가 안 먹겠다면 바로 제 입에 털어 넣을 기세였다. 뱀파이어의 먹성이야 잘 알고 있지만….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작 그만. 인간적으로 제 몫은 지키자.”

“나 인간 아닌데.”

썰렁한 말대답에 도영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가말은 잽싸게 손을 거두었다.

“응. 하지만 지켜야지.”

도영은 묻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딜 봐서 삼천삼백 년을 산 뱀파이어냐고?

***

간만에 포식한 느낌이었다.

평소 도영은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느낌이 싫어서 과식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당장 해야 할 일도 없고, 많이 먹으면 회복에 더 좋겠지 싶어서 양껏 먹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한없이 느긋하게 쉬고 있는 중이었다.

도영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덥다.”

“더워.”

아랫배가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먹은 가말도 옆에서 말했다.

“평화롭네.”

“평화로워.”

그러고 한참 앉아 있다 보니 가말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종을 불문하고 식곤증은 불치병이니까.

하늘에 조각구름이 유유히 흘러갔다. 도영은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싶었었지만 지상천국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별로 위기감이 생기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가말이 도와주지 않는 한 다리가 낫기 전까진 뭘 해보려고 해도 힘들었고.

그늘 아래는 시원했지만 공기 자체가 후끈해서 티셔츠 아래로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르 흘렀다.

안 그래도 깨어난 후로 씻질 못해서 찝찝했다. 도영은 가말을 돌아보고 말했다.

“좀 씻어야겠어. 여기 씻을 데 없어?”

가말은 부스스 눈을 뜨고 도영에게 손을 뻗었다.

“데려다줄게.”

그리고 도영이 손을 잡자 일으켜 부축해주었다. 몇 번 해봤다고 벌써 몸이 불편한 가족을 오래 간병해 온 사람인 양 능숙했다.

가말은 덤불 사이로 난 작은 길을 지나 숲 안쪽으로 도영을 데리고 갔다. 사방이 전부 비슷해 보여서 다음에 길을 찾으라고 하면 찾지 못할 것 같은 길이었지만 도영은 머릿속에 잘 새겼다.

사실 목욕하러 가겠다고 한 이유는 찝찝해서도 있지만, 이 주변에 대한 머릿속의 지도를 확장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가말은 도영을 호숫가로 데려갔다. 호수는 처음에 가말과 마주쳤던 곳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만 좀 더 작고 사적인 느낌이었다.

도영은 풍경을 둘러보았다. 꼭 선녀라도 내려와 씻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인도에 표류당한 상황이지만 즐길 만한 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풍경은 계속 생각이 날 것이다.

“여기서 씻어.”

가말은 말했다. 그러고는 가지 않고 그대로 있기에 도영은 돌아보고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안 가?”

가말은 수풀 너머를 가리켰다.

“근처에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여기서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는데?”

잠깐 둘러봤을 때 위험한 맹수가 있는 섬 같진 않았다.

“빠져죽어.”

도영은 기가 막혔다. 가말은 프랑스어의 시제를 잘 모르는지 거의 현재진행형으로만 말했는데 그래서 꼭 빠져죽으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래놓고, 물론 몰라서 그렇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도영은 아직 이 독특한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알았어. 훔쳐보지 마라.”

“안 훔쳐봐. 왜 훔쳐봐?”

가말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도영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도영은 기가 차 고개를 내젓고 티셔츠를 벗어 올렸다.

그 모습을, 가말은 나무 뒤에 숨어 음침한 의도를 가진 사람처럼 지켜보았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다리가 불편한 도영이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그런데 바지를 벗으려던 도영이 갑자기 돌아보고 말했다.

“야, 시선 느껴진다.”

가말은 얼른 뒤돌아섰다.

“무슨 소리야. 안 봤어.”

진짜 인간이 맞는지 눈치는 엄청 빨랐다.

나뭇잎을 쳐다보고 있는데 물이 찰랑거리고 도영이 호수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말은 한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무릎을 모으고 있는 아래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떻게 이상한지 확실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 앞에서 이렇게까지 겁먹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사실 너무 겁을 먹지 않아서 진짜 인간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도영은 인간이었다, 너무나.

지금까진 주로 찡그리거나 화내거나 눈썹을 추켜드는 못마땅해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표정이 풍부했고, 처음 들었을 때부터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쳤다.

결국 뱀파이어들은 한 번 죽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아주 아름다웠지만 어둡고 습한 밤, 푸르스름한 냉기가 흐르는 얼음 조각, 스산한 달빛 같은 단어들이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도영이 내뿜는 빛의 기운은 내지 못했다.

심지어 화를 낼 때에도 힘이 넘쳐서, 도영을 처음 만났을 때 폭포 아래서 그가 자신을 밀어붙이고 위협하는 상황인데도 넋을 놓고 쳐다보고 말았었다.

“끝났어.”

그때 도영이 말했다. 가말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도영은 다 씻고 다시 아까 자리에 나와 있었다.

가말은 부목으로 쓰는 나무가 젖어있는 걸 보고 물었다.

“나무 바꿔줄까?”

“그래.”

“잠깐만.”

그러고 가말은 부목으로 쓸 만한 나무를 찾아와 도영 앞에 앉아 부목을 바꿔주기 시작했다.

가말이 허리를 숙이자 헤진 티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났다. 도영은 그런 곳 따위 전혀 보지 않았다는 듯 시선을 올려 가말의 이마를 보았다.

하여간 약간 백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백지 같은 성격에 비해 몸이 성숙해 간극이 있었다.

게다가 이럴 때면 가말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집중했다.

물 냄새를 머금은 청량한 바람이 지나갔다.

젖어 흐트러진 도영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때 가말이 눈을 들어 도영을 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붉은 눈을 똑바로 비추었다. 붉은 꽃잎을 수없이 겹쳐놓은 것 같은 홍채 속에 묘한 일렁임이 있었다.

도영에겐 많은 뱀파이어 동료가 있었지만 동료 사이에 눈을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뱀파이어는 포식자고 인간은 피식자였다.

그것도 뱀파이어는 다른 동물이 아닌 인간만을 먹는 전문 포식자로, 둘은 천적일 수밖에 없었다. 피식자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 반응하듯, 뱀의 눈을 똑바로 볼 때처럼 소름 같은 공포감이 흐르면서도 몸이 굳어 시선을 돌릴 수 없는 느낌이 올라왔다.

너무 아름다운 맹수를 본 먹이는 저항할 생각마저 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가말도 기분이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매끄러운 턱이나 울대가 두드러진 목, 바위를 짚고 있는 손 같은 게 이상하게 의식되었다. 긴장이, 된다고 할까.

게다가 여태 만났던 인간들은 그녀를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보더라도 두려워하고 꺼림칙해 했다.

인간에게 그녀는 둘 중 하나였다.

신 혹은 괴물.

하지만 이 남자에게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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