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쭈니>
“뭐야, 너?”
도영은 날카롭게 물었다. 가말은 한숨 돌린, 그러나 너무 놀랐기에 아직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난 여기가 좋아.”
“거짓말하지 마. 단순히 네가 여기 산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거라면 비행기를 보고 그렇게 기함할 이유가 없잖아?”
지적에 가말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차피 말할 생각 따위 없겠지.”
도영은 이제 좀 지겨워지려고 해서 말하고 일어났다. 나무를 붙잡고 일어나서 제법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소….”
뒤에서 따라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가말이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도영은 가다가 멈춰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되돌아가 물었다.
“왜 그래?”
“아냐.”
애써 고개를 들고 웃지만 얼굴이 시린 빛이 돌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냐.’가 아니잖아.”
그러자 가말은 주저하더니 털어놓았다.
“빙글빙글해서….”
“어지러워?”
가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앉아.”
도영은 가말이 나무 그늘 아래 앉게 도와주었다. 그러자 가말은 머리를 젖혀 나무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안 그래도 흰 피부에 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한 기운이 흘렀다. 단순히 놀라서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영은 가말이 이러는 원인을 알 것 같았다.
“꽃 때문이지?”
가말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다. 꽃을 생으로 먹는 건 별로 효과가 없었다. 어느 정도 갈증을 다스리는 효과는 있어도. 꽃을 플로스로 만들었을 때만 피를 대체할 수 있는 식품이 되는 것이다.
“계속 꽃을 먹었어, 많이. 그래도 가끔 어지러워.”
가말은 천천히 눈을 떴다. 유난히 주름이 선명하게 보이는 홍채 속에 선득거리는 윤기가 지나갔다. 도영은 또 그 느낌이 올라왔다.
뱀의 눈을 본 것처럼 오싹해지면서 몸이 굳는 느낌.
“피는 맛있어.”
가말은 나직이 말했다. 도영을 응시하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하지만 먹으면 여기가 막 뛰어.”
그러면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피….”
그 단어가 잊고 있던 걸 상기시킨 투로 중얼거리며 도영의 목덜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피가 힘차게 지나가고 있는 목의 혈관을.
도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공격당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손끝까지 긴장감이 흘렀다.
갑자기 가말이 겨우 충동을 떨치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뭘 했는지 깨달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어….”
도영은 목발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좀 쉬고 있어.”
그리고 주춤거리며 따라 일어서려는 가말을 내버려 두고 돌아서 갔다. 그러다가 흘긋 돌아보자 가말은 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그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애처로워 보였다.
***
“소령, 이거 먹어.”
가말이 구운 토란 하나를 내밀었다. 한참 식사하고 있던 도영은 눈을 들었다.
“됐어.”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소령 먹어. 나 배불러.”
“가만 내버려 두면 소 한 마리를 앉은 자리에서 다 먹는 식성을 아는데 무슨 소리야? 그냥 먹어.”
도영은 가부장적인 남편처럼 잘라 말하고 계속 식사했다. 가말은 쭈뼛거리다가 그냥 토란을 제 입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는 찰나 도영이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줘.”
가말은 그릇에 냉큼 구운 토란을 내려놓았다. 도영은 토란을 물끄러미 보고 중얼거렸다.
“토란 따위가 맛있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리고 호방하게 토란 하나를 그냥 입에 넣고 씹었다.
식사를 끝낸 후에 자리를 정리하고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응. 도와줄까?”
가말이 냉큼 물었다. 도영은 가말을 한 번 보고 대답했다.
“그래.”
가말은 도영을 부축해주었다. 도영은 이제는 익숙하게 가말의 어깨에 팔을 감고 일어났다.
그러자 가말은 고작 부축해주는 일을 하면서도 핵 원심분리기를 다루는 사람처럼 온 열과 성을 다했다.
아무래도 낮에 있었던 일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그런 걸 보면 착하다고 할지, 뱀파이어 주제에 나이브하다고 할지, 도영은 가말을 물끄러미 보다가 툭 중얼거렸다.
“이상한 녀석.”
“응?”
가말은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냐.”
통나무집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자자.”
“소령.”
가말이 작게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가말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더니 삼키고는 그냥 인사했다.
“잘 자.”
“너도.”
도영은 말하고 돌아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도 신경 안 쓰니까.”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가말은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쪽 등을 쳐다보는 기색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도영은 잠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얼핏 깼는데 등 뒤에 이젠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온기가 있었다. 가말이 또 등에 붙어 자고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외로움을 타는 녀석이 무슨 혼자 산다고.’
도영은 잠결에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손이 슬그머니 옆구리를 넘어왔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이 엉큼한 녀석이?’
도영은 기가 막혔다. 얼마나 친해졌다고 자는 사람을 더듬다니.
스으으….
가슴부터 복부까지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도영은 움찔했다. 꽤나 대담한 손길이었다.
도영은 인정할 수 없었다. 가말 따위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소령.”
도영이 깬 걸 눈치챘는지 가말이 작게 불렀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소령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
등골이 오싹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말에게서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꼭 호랑이가 그를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떨치고 일어나고 싶어도 팔로 단단하게 휘감고 있어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기 가말이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도영도 그제야 겨우 돌아보자 가말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창백했다.
“미, 미안.”
그러더니 가말은 잡을 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가말!”
도영이 불렀지만 활짝 열린 문 너머로 가말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
가말은 간밤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영은 목발을 짚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햇볕이 내리쬐는 공터는 조용했고 가말은 보이지 않았다. 가말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다리로 멀리 나가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통나무집에 놓여있는 책 중 하나를 보면서 해변에 앉아있는데 정오가 다 되도록 가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도영은 보던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 완벽한 휴가를 약속하는 여행사 광고에 나올 것 같은 해변에 녹주석 색의 물이 잔잔히 밀려들었다.
“가말.”
도영은 갑자기 말했다.
“배고파.”
순간 수풀이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고 가말이 나타났다. 누가 보면 대역죄를 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루아스 같은 타고난 예민한 감각은 없어도 음침한 의도를 가진 사람처럼 수풀 너머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시선은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도영은 고갯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가말은 우물쭈물하며 옆에 와 앉았다. 도영은 별 기색 없이 말했다.
“그런 표정할 거 없어. 그건 네 본성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말이 자신을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말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소령이 처음이야.”
“난 뱀파이어가 익숙하니까.”
뱀파이어라고 색안경 끼고 볼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미 도영으로서도 개는 개의 음식을 먹고 고양이는 고양이의 음식을 먹는 것처럼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쯤은 받아들였다.
어쨌든 법적으로는 흡혈이 금지되어있지만 뱀파이어에게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는 의미였다.
가말은 눈 밑이 거뭇했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겠지만 뱀파이어가 하룻밤 잠을 설쳤다고 저럴 것 같진 않고, 역시 꽃은 충분한 영양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조금만 더 마르면 보기 싫을 정도로 말라서, 뭔가 식습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도영은 물었다.
“꽃만으로는 안 되는 거지?”
“아냐, 난….”
“그냥 사실을 묻는 거야.”
도영의 투가 워낙 담담했던 탓에 가말은 결국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너무 힘들면 동물들의 피를 마셔. 근데 냄새가 나서….”
그러니까 바깥에 나가서 플로스를 마시면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가말은 이 섬에 있고 싶어 하고 플로스를 마시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역한 동물의 피로 연명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 의미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가말을 한동안 보다가 물었다.
“피를 마시고 싶어?”
가말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난 고기가 먹고 싶어.”
도영은 갑자기 말했다. 그러자 가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도영이 대답하지 않자 가말은 제 뒤쪽을 가리키고 어물거렸다.
“어… 잡아줘?”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잡아줄까 묻는 여자가 꽤 매력적이긴 해서, 도영은 피식 웃고 말했다.
“고기가 먹어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내 몸이 원하는 거니까.”
그제야 가말은 도영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소령을 마시고 싶지 않아. 소령은 내 친구니까.”
붉은 눈에 물기가 반짝였다. 가말은 눈물을 참듯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마시고 싶어져. 그게 싫어.”
“필요하니까.”
도영은 조용히 말했다.
가말은 입을 다물고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냐, 난….”
도영은 손을 들었다.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딱 죽지 않을 만큼의 영양분만 채우라는 이야기지. 다리도 이 모양인데 네가 죽으면 나도 곤란하니까.”
“하지만… 무섭지 않아? 내가 못 그만하면….”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버하면 돌로 확 머리를 쳐버릴 테니까.”
그게 감사 인사를 들을 말은 아니었지만 가말은 인간이 나서서 제 피를 나눠주려고 하는 상황이 믿기지 않아 중얼거렸다.
“고마워.”
“친구라며.”
어쨌든 말투는 퉁명했지만 가말은 도영도 자신을 친구라고 여겨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이 이상해.’
심장 안에서 작은 사람이 날뛰는 느낌이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구 난리를 치며.
“다만 약속해. 절대 내 허락 없이는 피를 마시거나 하지 않겠다고.”
가말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그래.”
그러자 도영은 가말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거 가져와.”
“저거?”
가말은 돌아보았다. 도영이 가리킨 건 모래에 누워있는 주먹만 한 돌이었다.
“돌?”
“정신 못 차리는 거 같으면 친다고 했잖아.”
“아, 응.”
가말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도영이 가리킨 돌을 가져왔다. 그리고 멀뚱히 앞에 앉아있다가 도영도 아무 말이 없기에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럼…?”
“그래.”
도영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말은 무릎걸음으로 도영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