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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2화 (12/110)

12화<쭈니>

도영은 흰 자와 경계가 뚜렷한 눈동자가 똑바로 가말을 보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래서 조용하고 강한 눈이었다.

가말은 도영의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도영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숨이 달았다.

피부를 강아지풀처럼 간질이는 것 같았다. 언제나 감각이 과도하게 발달해있어서 곤란했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감각이 민감해져서, 가말은 허리 뒤쪽이 저려 왔다.

도영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그의 피부는 열이 높아 뜨겁고 부드러웠다. 약간 시큼한 땀 냄새와 나무 향기 같은 체취가 났다.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한 번 핥자 도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핥지는 마.”

“미안….”

가말은 전혀 집중하지 않은 채 웅얼거리고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려다가 다시 목덜미를 핥았다.

하지만 이번에 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손을 뒤에 가로로 놓아둔 나무 기둥에 올려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말은 점차 몸을 밀어 넣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도영의 다리 사이 공간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도영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가말은 아나콘다가 먹이를 몸으로 휘감아 붙잡듯이 본능적으로 도영의 몸에 팔을 감으며 붙잡았다. 손바닥에 단단한 견갑골이 느껴졌다.

귓가에서 도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깊이 빨아들이자 손끝, 발끝까지 온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수분이 바싹 건조된 몸에 물이 떨어지듯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목구멍 너머로 피가 넘어간다기보다 입안에 닿자마자 피가 온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도영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리 친다.”

가말은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입을 뗐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도영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반면 가말은 시야가 반짝이는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황홀한 빛깔이 물결쳤다.

“소령.”

붉게 물든 입술 사이로 기묘하게 향긋한 숨이 흩어졌다. 분명 비릿한 제 피 냄새여야 할 텐데, 가말의 몸속에서 여과된 것처럼.

마른 나뭇가지 같은 느낌을 주던 몸에 핑크빛 윤기가 돌았다.

흡혈을 끝낸 뱀파이어는 생각처럼 퇴폐적이고 섬뜩한 느낌이 아니라, 천연 해수 진주처럼 오묘한 빛깔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화사한 느낌에 가까웠다. 마치 광채가 손에 잡힐 것 같이…….

도영은 그대로 가말의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가말은 전혀 놀라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꼭 기다린 것처럼 그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그로서도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소령… 응….”

“송곳니 세우지 마.”

도영은 숨을 몰아쉬며 말하고 다시 키스했다.

이번에는 아주 부드러웠다. 성격상 좀 더 밀어붙이는 편일 것 같은데 큰 손으로 볼을 감싸고 맞닿은 입술을 벌려서 입술을 열고 매끄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가말은 이런 기분이 낯설었다. 여태껏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상대를 배려하면서 스킨십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여권이 미천한 고대와 중세의 남자들이어서도 있겠지만 그냥, 그러지 않았다.

“네가 남자들을 안달나게 만들어서 그래. 이상하게 널 보면 당장 차지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거지.”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다니엘은 섬에 오기 전에 한때 같이 지낸 인간이었다. 밭에서 남자들에게 린치당하는 걸 구해주자 가말을 제 집에 초대했고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동안 제 집에 머무르는 걸 허락했다.

그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즉 언젠가부터 인간들이 ‘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밭에서 린치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었던 고대 그리스를 지나온 가말로서는 동성애가 제 일은 아니어도 왜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 때문에 다니엘은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집을 지어놓고 혼자 지냈다.

따라서 가말이 머물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다니엘은 인생에 질곡이 많아서인지 젊은 나이에 비해 꽤 혜안을 지닌 사람이었다.

“부드럽게 키스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

제 입 속에 있는 혀가 달았다. 마치 말랑거리는 사탕 같은 느낌이어서 살짝 빨아보았다. 그러자 도영의 몸이 살에 맞은 듯이 굳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느낌이 좋았던 가말은 재차 반복했다.

갑자기 도영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까의 부드러운 태도는 거짓말 같았지만 맞닿은 느낌이 이상할 만큼 좋았다. 더 맞닿고 싶었다.

그런데 순간 도영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몸을 뗐다. 가말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뱀파이어의 폐에 숨이 모자를 정도로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다.

“Putain.”

도영은 낮게 욕설을 내뱉고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 때문에 지지대 없이 지금 자세에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고, 가말이 반사적으로 도와주려고 손을 뻗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러는 데 도영은 기가 찼다.

도영은 이마를 한 번 쓸고 골치가 아프단 어조로 말했다.

“그냥 있으면 어떡해? 싫다고 밀어내야지.”

“소령은 괜찮아.”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에 도영은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가말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니까.”

도영은 순간 벙쪘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았다.

“넌 친구한텐 다 키스하냐? 그게 어느 나라 상식인지는 몰라도 그럼 아주 배구공한테도 키스하겠다?”

가말은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왜… 화내? 근데 배구공이 뭐야? 소령 친구야?”

“그래, 내 베스트프렌드다. 꺼져, 이 자식아!”

***

저녁이 되도록 가말은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서 도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도영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저기, 소령….”

마침내 가말이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걸었다.

“목에 상처… 안 고쳐?”

도영은 감정이 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래. 이건 뱀파이어였다. 아무리 귀여운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꽃을 먹고 살아도,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였다.

그리고 여자 뱀파이어와 인간 남자는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왜냐? 생각해보라. 뱀파이어는 힘이 셌다, 아주. 그리고 그건 몸 전체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인간 남자와 여자 뱀파이어가 관계를 맺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따라서 남자 뱀파이어와 인간 여자는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뱀파이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 그건 상식이었다.

물론 도영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자신에게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여전히 문제는 아니었다. 이 머저리 뱀파이어한테 순간 그런 기분이 들어버린 건 죽음의 위기에 놓인 스톡홀름 신드롬의 피해자 같은 망상이었던 것이다.

“상처, 고쳐줄까?”

가말은 넌지시 물었다.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부탁할게.”

도영이 드디어 화가 풀린 것 같자 가말은 얼굴이 밝아졌다. 꼭 도영의 감정이 그녀에게 중요한 것처럼.

도영은 툭 말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무슨 얼굴?”

가말은 정말 몰라서 물었다. 도영은 길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됐어.”

상처 치료가 끝나고 도영은 해변에 드러누웠다. 처음 이 섬에 온 날처럼 별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방불케 하도록 반짝거렸다.

가말도 옆에 앉았다.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가말이 물었다.

“근데 왜 뱀파이어를 루아스라고 불러?”

하긴, 섬에서만 살았으니 이제 바깥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걸 모를 수도 있었다.

“마지막 공통 조상.”

도영은 하늘을 본 채로 말했다.

“사실 지구에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은 한 조상을 가지고 있어. 물론 가설이지만, 그러니까 인간이나 오늘 우리가 먹은 생선이나 저 풀이나 언젠가는 다 같은 하나의 종이었다는 거야.”

“같은 종이었다고?”

가말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럴 만도 했지만, 도영은 계속 말했다.

“응. 그리고 동물은 동물로, 식물은 식물로, 각자 지금 모습이 되기 전에 같은 형태로 존재했던 마지막 조상을 LUA(The Last Universal Ancestor)라고 불러.”

파도는 밀려오고 별은 빛나고, 분위기가 쓸데없이 낭만적이었다.

“인간을 뱀파이어로 바꾸는 미지의 X 바이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에 지구에 왔고, 같이 진화를 거치다가 어느 순간 인간은 인간의 모습으로,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의 모습으로 갈라졌다는 거야.”

물론 모두 학자들이 말하는 거의 SF 소설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형태가 같았던 조상인 LUA에 미지수를 뜻하는 X를 붙여서 뱀파이어를 루아스(Luax)라고 부른다고 들었어.”

가말은 생각에 빠져있더니 물었다.

“그럼 인간과 뱀파이어는 같아?”

“학자들은 형제 같은 거라고 하지. 호모 사피엔스랑 네안데르탈인처럼.”

“호모 사피엔스?”

가말은 그 단어를 모르는 듯 물었다.

“인간을 말하는 학명.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뱀파이어들은 ‘마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호모 비벤스로 불리고.”

오랫동안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호모 사피엔스에게 그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호모 비벤스의 등장은 충격적이고 마땅히 적대감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몰랐을 뿐, 둘은 이 지구에 거의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

저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게 아니었듯이.

“그럼 괴물이 아니구나, 뱀파이어는.”

가말은 중얼거렸다. 도영은 팔을 내려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거야 옛날에나 그렇게 불렀고 지금은 그냥 여러 종 중에 하나지.”

이렇게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안시 호숫가의 할머니 댁에 누워있었던 때가 떠올랐다.

머리맡엔 삼촌 줄리앙이 책을 읽고 있었고 아버지 엘리오는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튼튼하고, 유난히 강한 다리로. 부엌 쪽에서는 사촌들과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 사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영은 눈을 감은 그대로 말했다.

“가말. 내게도 집이 있어.”

가말은 나직이 대답했다.

“알아.”

그냥 아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흔적도 없는 그녀의 집과는 달리 바로 이 순간에도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가말은 약간 벙쪄서 도영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소령 뱀파이어 됐어?”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소리에 도영은 밥을 먹다 말고 눈을 들었다. 가말은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나 고민하며 말했다.

“뱀파이어처럼 먹어.”

도영은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결국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다리가 빨리 낫는 것. 그래서 다리를 회복하는 데 모든 걸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 없이 몸이 낫는 법이라면 잘 먹고 잘 쉬는 방법뿐이었다.

“그냥. 배고파서.”

“더 줄까?”

도영은 갑자기 가말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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