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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5화 (15/110)

15화<쭈니>

“소령, 뭐해?”

가말이 물었다.

도영은 부목을 다리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가볍게 다리를 움직여보자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다리가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가말이 물었다.

“다 나았어?”

“응.”

도영은 부목으로 썼던 나무를 옆으로 치우며 대답했다. 가말은 말했다.

“다행이다.”

어쨌든 진심이었다. 실수로 다치게 했다고 해도 도영이 절뚝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미안했으니까.

그런데 덜컥 걱정되기 시작하는 이유는 뭔지, 곧 알 수 있었다.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뭘?”

“집에 갈 준비.”

갑자기 가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사이에 도영은 일어나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못 가.”

그런데 가말은 말했다. 도영은 멈추었다.

“나간 사람 없어.”

돌아보자 가말은 굳은 결심을 한 얼굴이었다.

“요하네스도 육지에 아내와 아이가 있었어. 하지만 여기서 나가지 못했어. 소령도 나갈 수 없어.”

가말은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가말에게 끌리는 마음이 명백한 사실을 자꾸 덮어버리려고 했다.

“웃기지 마. 밖엔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가말이 저항할 거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여전히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가말은 섬밖에 발견되는 걸 극도로 경계했으니까.

그런데 가말은 갑자기 조금 주저하더니 넌지시 물었다.

“여자… 야?”

그쪽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는데 이쪽이라고 제대로 대답해줄 마음은 없었다.

“그래.”

어쨌든 어머니는 여자니까 거짓말은 아니었고.

가말은 꾹 입술을 다물고 있더니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갈 방법은 없어.”

“넌 뱀파이어잖아. 헤엄을 치든 뗏목을 만들든 뭐든 할 수 있잖아.”

“내가 왜?”

가말은 정말로 알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난 섬에서 나가지 않아.”

“대체 왜? 여기 뭐가 있는데? 빌어먹을 모래와 토란뿐이잖아?”

어지간히 벽창호 같은 모습에 도영은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하지만 가말은 이런 상황을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새롭지 않은지-여기 표류했던 모두 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각자 나름대로 저항을 했을 테니까.-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갈 수 없어. 나갈 길 없어.”

“좋아.”

도영은 순순히 말했다. 가말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가말은 표정을 잘 숨기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영도 그녀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멋대로 해. 난 가야겠으니까.”

도영은 차갑게 말하고 돌아섰다. 순간 어느새 다가온 가말이 팔을 잡으려고 했다.

“안 돼.”

도영은 그 손을 미끄러뜨리듯이 피하면서 가말의 멱살을 잡았다.

가말은 흠칫했다. 하지만 도영은 멱살을 잡아당겨 가말을 좀 더 가까이 끌고 왔다. 마음만 먹었다면 제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가말은 놀란 탓에 엉거주춤 끌려왔다.

도영은 나직한 그러나 이미 결심을 끝낸 확고한 투로 말했다.

“이번에는 내 두 다리, 두 팔을 다 부러뜨려야 할 거야.”

그러고는 맞닿아있는 것도 싫다는 듯이 멱살을 놓았다.

“위험해.”

돌아서서 가는 도영을 보며 가말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도영은 마뜩잖아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가?”

가말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말했다.

“이 섬을 나가면 죽어. 모트가 있어.”

순간 자신이 아는 가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음울한 표정이었다.

도영은 나중에야 ‘모트’가 고대 중동 신화에 속하는 ‘죽음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알았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웃기지 마.”

도영은 돌아서 갔다. 가말은 마치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망연히 서 있었다.

***

도영은 지체하지 않고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가말의 도움 없이 탈출하려면 뗏목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뗏목을 만드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약 한 달간 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뗏목에 쓸 만한 나무를 봐두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칼이 없는 게 제일 불편했지만 얼마 전 숲속에서 녹이 다 슬어서 쇳덩이에 가까운, 중간 길이의 칼을 하나 찾아냈다.

아무리 열심히 갈아 봐도 뭔가를 자르고 베기는 무리였지만 급한 대로 찧어서라도 자를 정도는 되었다.

가말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가말이 도와준다면 뗏목이야 하루만에도 완성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도영은 손을 털었다. 간만에 고강도의 노동을 했더니 땀이 흥건했다.

부스럭.

소리가 났다. 도영은 홱 돌아보았다.

“가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도영은 말없이 모래 위에 놓인 칼을 집었다. 그리고 조용해진 수풀로 다가갔다.

홱 수풀을 제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동물이라도 있을까 싶게 고요했다. 그때 숲 어디선가 새가 푸드덕 날아갔다.

이곳은 묘한 섬이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

아침에 눈 뜬 도영은 비어있는 가말의 자리를 보았다. 가말은 밤에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 딴엔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이쪽으로서도 무작정 이해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겐 바깥에 삶이 있고 가족, 친구들에게 생존도 알릴 수 없는 상황인데 무작정 ‘나갈 수 없다.’ 그 말만 듣고 ‘아, 그렇습니까.’ 하고 여기 정착할 리 없잖은가?

찰그랑.

천장에 달린 모빌이 흔들리면서 빛에 비친 유리가 반짝거렸다.

그가 돌아간다고 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던 가말의 표정이 떠올랐다.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설명이라도 해주든가.’

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든 그가 집에 돌아가는 일을 그만두진 않을 거라는 점에서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속 편할 수도 있었다.

도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뭐….”

뗏목이 모두 부서져 있었다. 재료를 다시 모아 만들 수도 없을 만큼 완전히. 그리고 범인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자식이 진짜…!’

“가말!”

도영은 뱃심을 끌어모아 외쳤다. 사방에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가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도영은 이를 꾹 물었다. 그리고 다시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

도영은 통나무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뗏목 옆에 자리를 펴놓고 자고 있었다. 모두 타서 재가 된 장작불이 마지막 불을 빛내고 있었다.

가말은 뗏목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예전에 만들어본 적이 있는지 이미 꽤 만들어진 상태였다. 이 정도면 이삼일 안에 바다에 띄울 수 있을 것이다.

뗏목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건들지 마.”

갑자기 도영이 말했다. 가말은 움찔했다. 도영이 돌아보았다. 전혀 잠들지 않았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가 거기 손댈 권리가 있어?”

마지막 불을 빛내는 장작불 빛에 비춘 눈에 윤광이 돌았다. 하지만 가말은 꾹 이를 물고 뗏목을 붙잡았다.

한 부대의 장정이 필요한 무게의 뗏목이 모래를 흘리며 허공으로 떴다. 가말은 그걸 집어던져 사정없이 산산조각냈다.

쿵! 콰직!

이어서 잔해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굴러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도영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 통나무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말은 문가에서 얼쩡거렸다. 그러다가 겨우 결심하고 문을 열었다.

“소령….”

“당장 꺼져.”

목소리를 높일 가치도 없었다. 가말이 자신에게 이럴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가말은 오히려 안으로 들어왔다.

가말은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눈물을 뚝 흘렸다. 도영은 눈 밑이 움찔했다.

“운다고….”

뭐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가말은 우는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아니, 오히려 우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미안해, 소령. 미안해….”

가말은 돌하르방의 가슴도 움직일 정도로 처연한 모습으로 정말 서럽게 울었다.

“미안해. 정말로….”

그러면서 가말은 가슴에 못 박혀 나오지 않던 말을 뱉어냈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모트는 그녀가 사랑하는 누구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저승으로 가는 티켓을 발행하는 일에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도영을 살리는 길은 모트의 시선에서 벗어난 이곳에서 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도영이 한숨을 내쉬고는 드러누웠다.

가말은 의아해져 그를 보았다. 옆으로 누워있는 도영이 빤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연한 빛이 도는 눈은 더 이상 화내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깊고 진지하게 사색하는 느낌이었다.

도영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이리와.”

가말은 의외였지만 도영이 마음을 바꿀세라 당장 다가갔다. 그러자 도영은 옆자리를 고갯짓하고 말했다.

“누워.”

가말은 상사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얼른 옆자리에 누웠다.

주저하다가 살짝 손을 얹었다. 그러자 도영은 말했다.

“무거워. 누르지 마.”

“미안.”

가말은 얼른 팔을 치웠다. 그리고 손을 어디 다 둬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도영의 티셔츠 끝만 살짝 쥐었다.

도영은 왜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게 군인인 자신의 직업병 탓인지 이 모순적이게 사랑스러운 뱀파이어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소령은 따듯해.”

가말은 작게 속삭였다.

“옛날엔 돼지를 끌어안고 잤어.”

도영은 기가 막혀 가말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돼지랑 같은 취급이냐?”

“춥진 않았지만 따듯해서. 돼지가 아파했어. 그래서 다음부터는 안 그랬어.”

도영은 한숨을 삼키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사연이냐. 좀 적당히 하라고.’

그러고는 돌아누워 가말을 안았다.

“소령…?”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말은 숨을 멈추었다. 도영의 향이 훅 가까워졌다. 낮 내내 햇빛 아래서 일한 탓에 뜨거운 햇볕과 부드러운 천, 희미한 땀 냄새가 섞인 향이었다.

“내가 안는 건 안 아프니까.”

도영의 가슴 안에서 심장이 피를 뿜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가말은 눈을 감았다.

“응. 따듯해.”

***

도영은 눈가에 느껴지는 햇살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런데 가말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영은 깜짝 놀라 고개를 물렸다.

“뭐야?”

가말은 유난히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소령 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왜?”

“그러고 싶으니까?”

가말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래.”

도영은 따지기도 귀찮았다.

“더워.”

자는 사이에 올라간 온도에 옷이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그래서 도영은 목 뒤에서 티셔츠를 잡아 앞으로 벗어냈다.

“씻어야지.”

그리고 혼잣말하고 일어나 통나무집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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