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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6화 (16/110)

16화<쭈니>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방에서 욕실로 갈 때처럼 도영은 바지를 밟아서 죽 벗어 그대로 탈피한 뱀 껍질인 양 해변에 두고 바다로 들어갔다.

물에 안기듯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가볍게 씻고 천천히 수영했다. 하늘은 푸르고 바다도 푸르렀다.

도영은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가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검은 드로어즈만 입은 몸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들이 흘러내렸다.

그때 무언가 옆으로 지나가서 무의식중에 돌아보니, 가말이 물뱀처럼 스윽 미끄러져 지나가고 있었다. 홀딱 벗은 상태로.

물에 잠겨있긴 하지만 투명한 수면 아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넘실거렸다. 도영은 하도 기가 막혀서 물었다.

“너 뭐해?”

가말은 도영을 쳐다보았다.

“수영해.”

“나 속옷 입고 있는 거 안 보이냐? 넌 왜 다 벗어?”

이래 봬도 여자 앞이라고 자제한 건데 말이다.

“소령도 다 벗어.”

그러면서 가말은 뒤로 누워 팔을 휘저었다. 물이 워낙 투명해서 다 들여다보였지만, 너무 태연하니까 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것이, 그래, 꼭 삶은 달걀을 보는 느낌이었다. 도영은 그 정도의 무념무상인 상태였다.

도영은 제 뒤를 돌아서 개처럼 헤엄쳐 가는 가말의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문명인이거든.”

“소령은 자꾸 문명인 타령해. 별로 좋은 거 같지도 않은데.”

“타령이라는 단어는 또 어디서 배웠어? 너 정말 프랑스어 제대로 못 하는 거 맞아? 근데 왜 안 좋아?”

도영은 바닷물에 얼굴을 씻느라 가말을 보지 않고 물었다.

“알아야 하고 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

첨벙, 첨벙, 가말은 발을 저어 뒤로 헤엄치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외롭진 않으니까.”

“그럼 나도 안 외로워? 문명인이 되면?”

“적어도 이 섬에서 외톨이로 사는 거보다는.”

도영은 머리를 들고 대양 쪽을 바라보며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거의 맨몸인 상태로 수평선까지 탁 트인 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니 모든 세속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은 해방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젠 안 외로워.”

갑자기 톤이 진지해져서 도영은 돌아보았다.

“소령이 있으니까.”

뒤로 헤엄쳐 가다가 뭍에 닿았는지 가말은 허리까지 물이 찰랑거리는 해변에 앉아있었다. 실수로 얕은 물가까지 올라온 인어처럼 하얗고 눈부신 상체를 드러내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젖어, 햇빛을 받은 백사장보다 더 희게 빛나는 피부에 휘감겨있고 눈빛이 우미하게 빛났다.

아마 한동안 굳어있었던가 보다. 도영의 목가에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시간의 흐름을 일깨웠다.

도영은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더니 크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몸의 근육도 화가 난 것처럼 넘실거렸다.

“왜 그러….”

놀라 말하는 가말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음 순간 가말은 드러누워 도영에게 키스 받고 있었다. 도영은 그녀 위로 길게 누워있었다. 얽힌 네 다리 사이로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어 왔다가 밀려 나갔다.

그녀를 내리누르는 무게감이 기분 좋았다. 가말은 본능에 이끌려 도영의 목에 팔을 감았다. 도영이 입술을 떼고 거칠게 말했다.

“여기 온 남자들한테 다 그런 귀여운 소리를 했어?”

가말은 눈이 울렁거렸다.

“소령이 처음이야.”

도영은 다시 키스했다.

이 정체 모를 뱀파이어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도영도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밉고, 애잔하고, 의심스럽고, 사랑스럽고,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그를 충동질했다.

***

장작불이 타올랐다. 도영은 불빛이 비추는 가말의 옆모습을 빤히 보며 생각했다.

‘얘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날 여기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지.’

사정은 있지만 그건 이쪽과 관계가 있다기보다 개인적인 것 같았다. 가말을 쫓아다니는 질이 좋지 않은 녀석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가말이 이 섬에 오래 살았다는 걸로 보아 그쪽도 뱀파이어일 것이다.

그 스토커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섬에서 나가는 걸 말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가말을 보면 그런 미저리가 따라다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긴 주제에 귀엽고 사랑스럽다.

“내 이름은 도영이야.”

도영은 갑자기 말했다. 그러자 가말은 돌아보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소령이잖아?”

“그건 계급이야, 멍청아.”

정말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계급?”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 군인이니까.”

“군인? 전사?”

“비슷해.”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랑 싸울 수 있었구나.”

도영은 쓰게 웃었다.

“처참하게 졌지만. 역시 인간과 루아스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거겠지.”

“난 노력했어.”

도영은 기가 차 말했다.

“난 노력 안 했겠어?”

“아주 많이. 매일.”

가말은 진지했다.

“왜? 뱀파이어면 육체 능력은 기본으로 따라오는데 왜 그렇게까지?”

가말은 아차 싶어 하는 얼굴이더니 또 입을 닫았다. 이것도 그 주제에 연결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를 이 섬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말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물었다.

“그럼 소령 이름은 도영이야?”

“맞아. 도영 드페르.”

“도영 드페르….”

가말은 이름을 한 번 곱씹더니 활짝 웃었다.

“멋있어.”

도영은 가슴이 불쑥 찔린 것 같았다. 그가 뚫어지라 쳐다보고만 있자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영?”

도영은 벌떡 일어났다.

“자자.”

“벌써?”

“밥 먹고 이 닦았으면 됐지. 뭐 할 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애석하지만 말이다.

***

도영은 설핏 잠에서 깬 순간 가말이 옆에 앉아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기가 찼다.

‘뭐 하는 거야, 진짜.’

요즘 가말은 자신이 그에게 반했다는 걸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섯 살도 이것보다는 제 마음을 더 잘 숨길 줄 알 것이다.

아직 아침은 밝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가말은 자지도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이걸 미저리 같다고 해야 할지 귀엽다고 해야 할지….

그때였다.

탁.

밖에서 돌 같은 게 날아와 통나무집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가말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재빨리 일어나 발소리를 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끽.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도영은 의아해져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잠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다가 기척이 사라졌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따라 나가볼까 싶었지만 일단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말이 돌아왔다. 도영은 잠에서 깬 척 부스스하게 돌아보고 물었다.

“어디 갔다 와?”

“깼어? 화장실.”

그러고는 가말은 천연덕스럽게 제 자리에 누웠다. 도영은 다시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을 뜬 그대로 생각했다.

이젠 정말 확실해졌다.

‘누군가가 있다, 이 섬에.’

***

다음 날 아침을 먹으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섬의 반대편에는 뭐가 있어?”

한참 밥을 먹던 가말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밥을 삼키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그래?”

그러고는 도영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난 자리를 다 치우고 생각난 김에 말한다는 투로 말했다.

“심심한데 구경이나 가볼까?”

“응?”

가말은 눈을 깜빡였다. 도영은 일어서며 말했다.

“반대편으로 가보자고.”

가말은 벌떡 일어났다.

“안 돼. 어, 무서운 짐승이 있어.”

“방금전엔 아무것도 없다며?”

“도영이 무서워할까 봐 그랬어. 엄청 크고 사나워.”

꼭 잘 시간이 됐는데도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는 아이를 겁주는 투였다. 도영은 의심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짐승이 우는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없어? 도영은 인간 귀라 그래.”

‘아주 크고 사납다’고 할 정도의 짐승이 우는 소리라면 아무리 인간 귀에라도 들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매일 이 근처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지겹고 한 번 가보지, 뭐. 그리고….”

그러고는 가말을 위아래로 보았다.

“이 섬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여기 있는 거 같으니까.”

가말은 곤란했다. 하지만 더 말리면 수상해 보일 것이다. 도영은 벌써 멀리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가방 나 좀 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물건을 가말의 크로스백에 넣었다.

“가자.”

어떡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도영은 이미 준비를 끝내고 길을 나서고 있었다.

“도영, 같이 가.”

가말은 얼른 따라갔다.

***

당연하지만 숲은 얼마 전에 왔을 때와 변한 게 없었다. 조심스럽게 찾아봐도 ‘동물 외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은 없었다.

“도영, 돌아가자.”

가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영은 흘긋 돌아보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잖아.”

‘다리를 한 번 더 부러뜨릴까?’

가말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가 생각을 고쳤다.

저번엔 실수였다고 해도 고의적으로 도영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눈치가 빨라서 일부러 부러뜨린 걸 알면 얼마나 화를 낼지 알 수 없었다.

도영이 화를 내는 건 싫었다.

앞에서 도영은 나뭇잎을 젖히고 나아갔다. 꼭 길을 아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가말은 조급해져 말했다.

“도영, 해가 져.”

도영은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앞잡이로 뱀파이어가 있으니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걱정은 없지만, 문제는 뭐가 나타나도 그가 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가자.”

도영은 가말을 지나 걸어가며 말했다. 가말은 안도하고 얼른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밥 뭐 먹고 싶어?”

“고기.”

“도영 고기 좋아해.”

“너만 하겠어?”

부스럭.

둘이 사라지는 뒤로 수풀이 흔들렸다. 그리고 수풀을 헤치고 발이 나타났다. 진흙이 묻은 남자의 맨 발이었다.

***

“잘 자.”

“너도.”

도영과 가말은 각자 인사하고 자리에 누웠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한동안 가말은 돌아 누워있는 도영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소리는 점차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그걸 확인한 가말은 살그머니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돌아누운 상태인 도영은 조용히 눈을 떴다. 전혀 졸음기가 없는 눈이었다. 도영은 그대로 숨소리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있었다. 소리가 흐트러지면 눈치챌 테니까.

끽.

가말이 통나무집을 나가는 소리가 났다. 도영은 한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면서 가말을 불렀다.

“가말.”

어디선가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덤불이 부스럭대면서 가말이 나왔다.

“도영? 안 잤어?”

도영은 가말이 온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뭐 했어?”

“화장실 갔다 왔어.”

도영이 그쪽으로 가려고 하자 가말은 알게 모르게 살짝 막아서면서 물었다.

“어디 가?”

“화장실 가지 어디 가겠어?”

그러면서 도영은 덤불을 헤치고 들어갔다. 가말이 따라오며 물었다.

“안 어두워?”

“아는 길인데 뭐.”

갑자기 가말이 한 걸음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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