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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17화 (17/110)

17화<쭈니>

가말이 따라오며 물었다.

“안 어두워?”

“아는 길인데 뭐.”

갑자기 가말이 한 걸음 물러섰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도영은 무의식중에 돌아봤다가, 가말이 발로 샥 감추는 걸 보았다. 도영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렸지만 정확하게 보았다.

‘발자국.’

저번처럼 신발을 신지 않은 인간의 발자국이었다. 이젠 분명해졌다. 가말은 누군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것도 남자.

저번에도 이번에도 크기로 봤을 때 발자국의 주인은 남자였다. 그리고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인이나 남편일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저쪽이 자신을 그냥 둔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제 여자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꼴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오픈마인드의 소유자이거나 바보가 아닌 한.

‘왜 숨기는 거지?’

상대가 뱀파이어라고 무작정 숨길 필요도 없는데. 그러니까 뭔가 숨기는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단순히 치정에 관련된 게 아닌.

도영은 갑자기 뒤를 보고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어디까지 따라와?”

“아, 미안.”

가말은 사과하고 한 걸음 물러났다. 도영은 오른쪽 덤불로 들어가 일부러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가말이 소리쳤다.

“어디까지 가?”

“네 녀석이 따라올까 봐 걱정돼서 그런다.”

“안 따라가. 어두워. 멀리 가지 마.”

도영은 주변을 은근히 살폈지만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밤새가 찌르르 울었다.

저 어둠 너머에 가말의 비밀이 숨어있었다. 도영은 느낄 수 있었다.

***

“뭐해?”

아침을 먹고 나서 가말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도영은 크로스백에 물건들을 챙기고 있었다.

“또 가려고?”

도영은 크로스백을 둘러메면서 대답했다.

“어제 다 못 봤으니까.”

가말은 어떡해야 도영을 말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웅얼거렸다.

“나 힘든데….”

“그럼 혼자 다녀올게. 이제 길은 좀 익숙해졌으니까.”

가말은 그런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듯이 얼른 말했다.

“도영 혼자는 위험해.”

“동물 정도는 혼자 상대할 수 있어.”

그러더니 가말을 빤히 보고 덧붙였다.

“뱀파이어가 덤비지 않는 한.”

가말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걱정돼. 같이 가.”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든가.”

그래서 둘은 어제처럼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도영은 채집하듯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흔적을 찾았다. 그러다가 흘긋 뒤에서 따라오는 가말을 보았다. 어제는 그렇게 당황하더니 오늘은 별말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도영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흔적을 지우라고 말했겠지.’

한참 가다가 나뭇가지를 밀고 나갔다.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웅장한 풍경이 드러났다. 반대편 저 멀리 폭포가 흐르는 절벽이 보였다.

“도영이 처음에 떨어졌던 폭포야.”

옆에 와 선 가말이 폭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폭포는 생각보다 컸다. 인간 주제에 저기에 떨어지고 살아난 게 신기할 정도로. 아마 가말이 잘 던진 탓이었을 것이다.

“더 갈 곳 없어.”

그러면서 가말은 돌아가길 바라는 것처럼 도영을 흘깃 보았다. 도영은 대답하지 않고 절벽을 따라 걸어갔다. 절벽 아래를 보는 눈이 진지했다. 꼭 지형을 살피면서 작전을 짜는 지휘관 같았다.

가말은 뒤따라가면서 힐끔 절벽 아래를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도영이 돌아섰다. 가말은 이 높이에서 인간이 떨어지고도 살 수 있을까 고민한 제 생각이 들켰을까 봐 괜히 지레 찔려 그를 보았다.

“응?”

“가말.”

도영은 두 걸음 다가오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웅장했다. 도영의 눈이 비스듬히 기운 햇빛을 반사해 연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왜…?”

그 눈빛에 압도되어 가말은 나직이 물었다. 도영이 그녀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키스했다.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순간 놀랐지만 가말은 이내 눈을 감았다. 폭포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듯이 크게 들리면서도 점차 사라지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도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도영이 속삭였다.

“가말, 미안해.”

가말은 몽롱해 제대로 의식하지도 않고 되물었다.

“뭐가…?”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타악.

그리고 도영은 가말을 밀쳤다. 온 힘을 다해. 가말은 눈을 크게 떴다. 절벽 바로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뭘 해볼 새도 없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반면 도영은 당장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가말을 잠시라도 따돌릴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황천길이겠지만 뱀파이어니까 괜찮을 것이다.

팍. 파사삭. 사삭.

나뭇잎들과 가지들을 헤치며 전속력으로 숲을 달렸다. 오가면서 최대한 길을 익혔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린 끝에, 너르게 펼쳐진 꽃밭이 나타났다.

이곳은 경계였다. 도영이 갈 수 있는 한계의 경계. 이곳 너머에 가말의 비밀이 있었다. 그곳을 향해 도영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피를 뿜어내는 게 느껴질 정도로 마구 달려갔다.

꽃밭을 지나 갈대밭이 이어졌다. 그리고 갈대밭도 거의 끝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옆에 휙 누군가가 나타났다. 도영은 눈을 크게 떴다.

“뭐…!”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였지만 뱀파이어라는 건 단번에 알았다. 왜냐하면….

도영은 당장 머리를 숙였다. 남자가 돌려찬 다리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리고 뒤에 있는 나무를 후려쳤다. 나무는 공기주머니가 터지는 뻥 소리를 내며 폭발해 날아갔다.

이건 뱀파이어라는 걸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힘이었다!

“토라!”

벌써 따라왔는지 멀리서 가말이 외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도영은 몸을 굴려 일어났다. 남자는 갈대밭 가운데서 그를 돌아보았다.

한 마디로 남자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구릿빛 피부, 가슴까지 오는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머리카락에 색실을 엮어 얇게 땋은 몇 개의 가닥을 양 옆으로 늘어뜨린 모습은 한눈에 원주민처럼 보였는데, 다시 보니 혼혈 같았다.

도영이 여자였다면 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깎았다는 말이 이렇게 어울릴 수 없었다. 체지방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늘씬한 근육질의 몸은 가말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면 이쪽은 남성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느낌이었다. 양 팔을 타고 올라 등 뒤로 사라지는 문신도 예술작품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도영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남자의 몸 따위 이렇게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뭔가 장식이 잔뜩 된 검은 천 쪼가리 하나만 허리에 두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장난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흥미로워하는 붉은 눈동자.

눈이 붉은 뱀파이어가 두 마리라니, 도영은 요즘 제 운이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실험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안녕, 토라.”

도영은 웃을 기분 따위 아니었지만 웃었다.

“아무래도 그쪽은 날 알고 있을 거 같은데.”

토라는 정중함까지 느껴지는 태도로 살짝 묵례했다.

“물론이죠, 소령님.”

원주민처럼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완벽한 영어였다. 그것도 영국 발음. 이런 차림이지만 바깥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토라는 이쪽이 여자라면 심장이 두방망이질 칠 미소를 씩 짓더니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더 가실 순 없습니다.”

“역시 섬 반대편에 뭔가 숨기고 있나 보군.”

“모두에게 사생활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마티의 사생활도 지켜주셨으면 하는군요.”

‘마티라면….’

설마 가말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도영은 물어보는 대신 토라를 위아래로 훑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할 타이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쪽하고 대화하니까 가슴이 다 뻥 뚫리는 거 같네.”

토라는 피식 웃었다.

“마티가 사타디어와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아람어도 꽤 합니다. 다만 현대 언어에는 조금 약하죠.”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사타디어라는 건….”

토라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말했다.

“사타디 부족의 언어입니다.”

“그런 부족은 들어본 적 없는데.”

“당연하죠. 기록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현대인은 알 수가 없죠.”

도영은 무언가 깨달았다.

“혹시 가말이 그쪽 출신인가?”

토라는 빙긋 웃었다.

“참 분명하죠. 안 그렇습니까?”

다음 순간 토라는 도영 뒤에 서 있었다.

‘늦었다!’

도영은 뒤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토라는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도영의 팔을 잡아 막고 넘어뜨렸다. 그리고 홱 손을 들었다. 노을 아래 붉은 눈이 횃불처럼 번쩍였다. 사냥 본능이 깨어난 맹수의 얼굴이었다.

“안 돼!”

그 순간이었다. 비호처럼 갈대를 젖히고 나타난 가말이 토라를 덮쳤다.

“마티, 여기 내리막…!”

토라가 깜짝 놀라 외치면서 와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뱀파이어 두 명분의 무게다 보니 굴러가는 소리도 육중한 바위가 굴러가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기회를 잡은 도영은 당장 일어나 다시 갈대를 헤치며 뛰기 시작했다.

삭, 사사삭.

금방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뱀파이어 둘이. 도영이 싸워온 이래 가장 최악의 조건이었다.

갈대가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영은 당장 칼을 휘둘렀다. 토라의 발이 검에 작렬했다.

토라는 그 반동으로 아크로바틱 선수처럼 공중에서 돌아 착지하고는 말했다.

“제 속도에 반응하는 인간은 소령님이 처음입니다.”

“훈련받은 인간을 무시하지 말라고.”

“무시는요. 존경하는 겁니다.”

차작.

옆에 가말이 있는지 다시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이 갈대밭이 의외로 육체 능력이 월등한 두 뱀파이어의 시야를 가리고 위치를 알려줘서 도영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도영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갈대가 끝나는 순간 늪이었다. 도영은 깜짝 놀랐다.

“뭐…!”

불행히도 가속도가 붙은 물체는 단번에 멈출 수 없었다. 도영은 그대로 늪에 빠지고 말았다. 허우적거리며 겨우 몸을 돌려보니 늪가에 서 있는 토라는 즐거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얌전히 말을 듣는다고 하시면 꺼내드리죠.”

어쩐지 간간이 공격하면서 쫓아오기만 하더니 여기 늪이 있다는 걸 알고 이쪽으로 몰아붙인 거였다.

점차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늪 바닥에 가라앉은 미라가 되고 싶지 않은 한 방법이 없었다. 도영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얌전히 말을 듣지.”

그러자 토라는 의기양양해하는 얼굴로 긴 갈대를 뽑아서 도영에게로 뻗었다. 도영은 갈대를 잡았다. 토라는 엄청난 힘으로 그를 쑥 끌어당겼다. 그리고 반대 손을 내밀었다. 도영은 손을 붙잡고 올라섰다.

갑자기 토라는 움찔하고 도영을 보았다. 갈비뼈 아래쪽에 칼이 닿아있었다. 뱀파이어의 피부 결에 딱 맞는 방향으로.

도영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숨도 쉬지 마.”

뱀파이어의 피부에는 각자마다 다른 ‘결’이 있어서 일견 강해 보여도 결이 맞으면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팔을 잡았을 때 피부 결의 방향을 찾아낸 것이다. 토라는 깨달았다. 각도가 너무 완벽해서 인간을 찌르는 정도의 힘만 줘도 쑥 들어갈 터였다.

토라는 도영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감탄했습니다.”

“무서워해야 할 걸.”

도영은 칼을 좀 더 들이밀었다.

“확실히….”

토라는 중얼거리다가 휙 다리를 돌려찼다. 도영은 당장 옆으로 몸을 던졌다. 토라의 발이 아슬아슬하게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사람은 아니군요.”

토라는 씩 웃으며 말하고 발을 딛기 무섭게 다시 돌려찼다. 그건 인간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도영은 토라가 자신을 기절시킬 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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