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18화 (18/110)

18화<쭈니>

도영은 토라가 자신을 기절시킬 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라! 그만둬!”

파라락.

쩌렁쩌렁한 소리에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막 도영에게 닿으려던 토라의 발이 멈칫했다. 그때 공기가 밀리면서 얼굴에 훅 바람이 불었다. 제 얼굴에서 고작 1cm 옆에 멈춘 발을 본 도영은 등골이 서늘했다.

갈대밭 사이에 똑바로 서 있는 가말은 처음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엄을 뿜었다.

토라는 돌아보고 말했다.

“마티.”

가말은 토라에게서 시선을 옮겨 도영을 보았다.

“도영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찾아낼 거야.”

뭘 찾아낸다는 말인지 물어보기 전에 가말이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도영이니까 괜찮아.”

토라는 도영을 한 번 보고 발을 내렸다.

“동감이야.”

도영은 기가 막혀 토라를 보았다.

“이럴 거면 왜 이렇게 열심히 막았어?”

토라는 씩 웃었다.

“소령님하고 노는 게 재밌어서 말이죠.”

“도영, 이리와.”

가말은 말하고 앞서갔다. 도영이 토라를 보자 그는 가라고 말하듯 앞쪽으로 손짓했다. 도영은 가말을 따라갔다.

숲을 헤치며 꽤 오래 갔다. 도영은 뒤에 따라오는 토라를 흘긋 보고 말했다.

“어디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려고 하는 거면 고통은 없이 보내줘.”

토라는 그 말이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외지인들은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뭐가?

묻고 싶었지만 말해줄 것 같지 않아서 묻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려주려는 것 같았고.

가말은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도영은 다시 토라를 돌아보고 물었다.

“그쪽은?”

“저요?”

“둘은 무슨 관계야?”

토라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분명했으면 질문을 했겠느냔 말이다.

그때 가말이 돌아보고 말했다.

“토라는 내 아들이야.”

“아들…?”

도영은 토라를 위아래로 보았다. 겉보기로는 가말보다 몇 살 많아 보였다. 물론 뱀파이어니까 외모로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내가 피를 줬어.”

가말이 이어서 한 말에 의문이 풀렸다.

“아, 그 아들.”

피를 받아 뱀파이어가 된 수혜자, 즉 요즘 불리는 말로 ‘클리엔테스’를 의미하는 거였다. 하긴, 인종적으로 다르니 친아들일 리는 없었다. 토라는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처럼 보였다.

“클리엔테스가 있었군.”

도영이 중얼거리자 토라는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남편이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까?”

“다 왔어. 여기야.”

그때 가말이 말하면서 앞서갔다. 도영은 토라에게 대답하고 가말을 따라갔다.

“세 번째쯤 되는 줄 알았지.”

“왜 하필 세 번째입니까?”

뒤에서 토라가 투덜거리며 따라왔다. 하지만 도영은 더는 토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 탓이었다.

존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의 부족을 소개받았을 때나 제이크 설리가 나비족을 소개받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섬의 토착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개 두려워한다기보다 호기심에 찬 기색이었다.

도영은 끝에서 끝으로 부족을 둘러보았다. 알 것 같았다. 가말은 토라를 숨겼던 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을 숨겼던 것이다.

도영은 가말을 돌아보았다.

“이 사람들을 숨긴 거야? 왜?”

“소령님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토라가 말했다.

“소령님은 다른 손님들과는 좀 다른 분이죠. 오히려 그래서 소령님께는 우리 부족을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소령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나한테‘는’이라는 건….”

갑자기 가말이 부족 쪽으로 걸어갔다. 부족 사이에 간간이 토라처럼 혼혈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가말이 한 할머니에게 손을 뻗어 그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게 도와주었다. 오래된 나무껍질 같은 눈매 속에 푸른 눈동자가 도영을 보았다. 그녀도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이었다.

가말이 말했다.

“앙엘라. 요하네스의 손녀야.”

요하네스의 손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선뜻 깨닫지 못해 쳐다보고 있다가 도영은 불현듯 깨달았다.

“바깥에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고….”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요하네스는 앙엘라의 할머니와 사랑에 빠졌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럼 그 편지는 뭐야?”

“제가 그런 내용으로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토라가 대답하고는 빙긋이 웃었다.

“요하네스는 작가였거든요.”

도영이 기막혀하는 사이에 토라도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돌아보고, 사람들 가운데서 말했다.

“환영합니다. 우리는 사타디 부족입니다.”

***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마을 뜨락 가운데 타오르는 화톳불 너머로 땅콩 같은 걸 까먹으면서 왁자지껄 웃었다.

태어나 매일 보는 사람들과 무슨 할 말이 그렇게 있을지 궁금했지만 부족사람들 중에 도영과 언어가 통하는 사람이 없어 물어볼 수 없었다.

가말이 태어났다던 옛 사타디 부족과는 어떤 연관도 없었지만 이 부족은 스스로를 ‘사타디’라고 칭했다. 성씨도 모두 동일하고 공평하게 ‘사타디’였다.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가말이 쓰는 옛 사타디어와는 언어계통학적으로도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자기들이 쓰는 말을 ‘사타디어’라고 불렀다.

도영은 옆에 앉아있는 가말을 보았다. 가말도 땅콩 같은 걸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영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제가 까놓은 걸 내밀었다.

“먹을래?”

도영은 받아들고 먹어보았다. 크기가 더 크고 식감은 더 퍼석한데 맛은 땅콩과 비슷했다.

그러면서 도영은 사람들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계속 혼자 산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네.”

가말은 능숙하게 땅콩 같은 것을 까면서 대답했다.

“내가 처음 왔을 땐 아무도 없었어. 깨어나니까 사람들이 있었어. 처음엔 적었어. 그런데 점차 많아졌어.”

아마 가말이 잠든 새에 다른 섬에서 이주해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다면 이 물러터진 성격에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냈을 리는 없고 어영부영 같이 살게 됐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있었던 쪽엔 인간의 흔적이 전혀 없던데.”

작정하고 숨기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런 흔적을 그렇게까지 감쪽같이 숨기기는 힘든 법이었다. 분명히 어디에라도 흔적이 있기 마련인데 흔적을 발견하는 게 직업인 도영으로서도 전혀 찾지 못했다.

“부족 사람들은 그쪽으론 가지 않아.”

가말이 말했다.

“왜?”

“거긴 내 땅이니까.”

“토지대장이라도 있나 봐?”

도영은 시니컬한 투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가말은 이제 알아듣기 힘든 단어를 이해하길 포기했는지 되묻지도 않고 말했다.

“가도 상관없다고 했어. 근데 안 가.”

도영은 말없이 유사 땅콩을 먹었다. 그러다가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갑자기 생각났다는 투로 물었다.

“왜 혼자 살았어? 부족에 남자도 많을 텐데.”

“부족 사람들은 날 다른 걸로 생각해.”

가말은 그런 질문이 놀랍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다른 거?”

도영이 돌아보며 묻자 가말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신.”

그러고 보니 부족 사람들은 이쪽 자리엔 전혀 앉지 않았다. 배척하는 느낌은 아니고, 가말을 제일 웃어른으로 대우한다는 느낌이었다.

하긴, 초월적인 육체 능력을 지녔고 영원히 사는 존재가 신이 아닐 이유도 없었다. 다른 데서 섬기는 신과 다른 건 피와 살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라는 점뿐이었다.

살아있다는 점에서 더 확실하게 그들을 보호해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사실 부족에겐 원래 사타디가 아닌 다른 이름이 있었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다른 이름‘들’이. 옛날에는 이 그리 크지 않은 섬 내에도 수십 개의 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족들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그들의 신에게서 이름을 빌렸다는 모양이었다.

도영은 고갯짓으로 토라를 가리켰다.

“그럼 저쪽은?”

적어도 같은 뱀파이어니 가말을 신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말은 도영이 토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토라는 아들이야. 태어나는 것도, 자라는 것도 봤어.”

사실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저쪽에 커다란 포대를 빈백 삼아 앉아있는 토라는 부족의 어떤 젊은 여자와 거의 휘감기다시피 앉아서 서로 지분거리고 있었다.

토라가 여자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면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여자는 숨넘어갈 듯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점차 둘의 애정표현이 진해져서 도영이 좀 더 순진한 사람이었다면 낯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부족 사람들은 아무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영 역시 뱀파이어와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세상에서 오긴 했으나, 사타디 부족은 거의 자연의 이치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친구는 바깥에 다니는 거지?”

도영은 확신조로 물었다. 겉모습은 원주민 버전 마르스 같은 느낌이었지만 토라에게서는 문명의 냄새가 났다. 가말도 고개를 끄덕였다.

“토라와 라토가 세상 소식을 전해줘. 플로스도 구해다 줘.”

가말의 입으로 플로스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괴리감이 들었다. 조금은 배신감도.

“그런데 꽃을 생으로 먹어?”

“다 떨어졌어, 요즘엔.”

“근데 라토는 누구야?”

“토라의 쌍둥이.”

도영은 멈칫했다.

“그쪽도 루아스야?”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토라, 라토 모두 내 아들이야.”

“저 녀석하고 똑같이 생긴 녀석이 하나 더 있다고?”

이게 여자들에게 희소식인지 비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쌍둥이….’

또 뭔가 생각날 것 같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영은 유사 땅콩을 하나 더 까먹으며 물었다.

“그 나머지 쌍둥이는 어디 있는데?”

“밖에. 토라와 라토는 번갈아서 밖에 나가. 이번엔 라토 차례야. 소식과 물건들을 가져와.”

부족 사람들이 쓰는 물건 중에 바깥의 물건들이 꽤 보이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혹시 라토에 대해 들은 거 없으십니까?”

그때 갑자기 토라가 도영 옆에 앉으며 물었다.

도영은 제 앞으로 팔을 뻗어 가말의 무릎에서 유사 땅콩을 한줌 가져가는 토라를 이상하단 듯이 보았다.

“그쪽 형제를 왜 나한테 와서 찾아?”

토라와 얽혀있던 여자는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토라가 갑자기 가버려서 불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토라는 유사 땅콩을 까먹으며 말했다.

“얼마 전부터 라토가 연락이 없거든요. 길어도 이주 일에 한 번씩은 연락했는데 이번에는 한 달이 넘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이 섬에 한 달 반째 박혀있어. 그런데 어떻게 연락을 한다는 건데?”

토라는 씩 웃었다.

“대답할 리가 없잖습니까?”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족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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