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20화 (20/110)

20화<쭈니>

“미안해.”

나란히 누운 채로 도영이 갑자기 말했다. 가말은 의아해하는 눈을 들었다.

“뭐가?”

“절벽에서 밀어서.”

그러면서 도영은 가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다쳤어?”

가말은 이런 질문을 들어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도영이 절벽에서 밀었을 때는 놀랐고 살짝 배신감도 들었지만 자신이 먼저 그에게서 감춘 게 있었기 때문에 이해했다.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난 강해.”

하도 당당한 투에 도영은 기가 막혔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부럽네.”

“도영도 강해.”

“루아스한테 그런 말 들으면 오히려 놀리는 거 같은데. 하지만 뭐,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니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런데 가말이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도영은 뭔가 의미가 있는 말 같아 가말을 보았다. 그때 가말이 다시 눈을 들어 도영을 보았다.

“같이 자도 돼?”

이미 사이좋게 누워있는 상황이고 실컷 즐겨놓고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눈치를 보는 동그란 눈이 귀여웠다.

도영은 가말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인간 남자가 감히 신이랑 같이 자도 되는 거야?”

“돼.”

가말은 다급하다 싶을 정도로 바로 대답했다.

“신이 그러고 싶으니까.”

***

정사가 끝난 뒤 토라는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아키를 돌아보고 말했다.

「우리 마티 취향이 저런 남자였구나. 이제 알았네. 의외로 막 대해주는 걸 좋아했나 봐.」

아키는 흘긋 토라를 보았다.

「저 손님은 인간인데도 말이죠.」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이니까. 뱀파이어가 되면 사실 모든 게 좀 쉬워. 하지만 인간으로서 어떤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정말 그 사람의 순수한 노력이지. 모아이 석상 같은 마티의 마음을 움직인 건 소령님의 그런 면이겠지.」

「어렵네.」

아키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근데 라토님이 화내지 않겠어요? 저 손님,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요.」

토라는 대답하지 않고 천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

그래, 다 좋았다. 섬에 표류당한 것도, 어쩌다 보니 어지간한 돌덩이보다 오래 산 여자 뱀파이어와 썸을 타게 된 것도.

하지만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가말과 이 섬에서 살게 되는 걸까?

나무 사이에 건 해먹에 누워있는 도영은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뭐가요?”

그러자 바닥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 토라가 돌아보고 물었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모습이었다. 희한한 건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다 소령님처럼 부정의 단계를 거치죠.”

토라는 알 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중에는 돌아가라 그래도 돌아가기 싫어질걸요. 절 믿으세요.”

“믿으라고 해도….”

“저도 밖에 나가서 몇 년 살아봤지만 공기도 나쁘고, 좁은 공간에 뭔 인간들이 그리 많이 사는지, 다들 햇빛을 제대로 못 봐서 얼굴은 허옇게 떠 있고, 스트레스에 절어서 좀비 같은 몰골에다가….”

이 정도면 바깥세상에 대한 상식이 넘치다 못해 지금 당장 도시에 갖다 놔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옷만 제대로 입는다면.

“난 밖에 가족이 있어.”

도영이 말하자 토라는 물었다.

“결혼하셨습니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셋이나 있지.”

“이름이 뭔데요?”

“엘리오. 니콜라. 줄리앙.”

토라는 물끄러미 도영을 보았다.

“거짓말 잘 하시네요.”

“드라마 수업 A 받았거든.”

어차피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영은 순순히 인정했다.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령님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빨리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편이 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쉬우실 겁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줄 몰랐다. 하지만 토라는 태연히 말했다.

“그리고 소령님이 정말 저희 부족 사람이 됐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밖의 가족에게도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부족 사람이 됐다고 생각되는 기준이 뭔데?”

“적어도 연기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러더니 토라는 덧붙였다.

“삼백 년 전 사람이지만 저희 아버지도 밖에서 왔죠.”

혼혈이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희가 배 속에 있을 때 죽어서 얼굴도 본 적 없지만 부족에 꽤 잘 적응했던 모양이에요.”

토라는 묻지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했다.

“요하네스도 마찬가지였고요. 참, 소령님이 본 편지 내용은 순전히 픽션이었어요. 요하네스는 이쪽으로 표류해서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앙엘라의 할머니였거든요. 첫눈에 앙엘라의 할머니한테 반해서 정말 낯 부끄럽게 구애했죠.”

“그럼 바깥에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는 건?”

“가족은 있었던 모양인데 집이 제법 부자였는지 유산 상속 문제로 신문에 나올 정도로 온갖 가족 잔혹사를 찍은 모양이에요. 요하네스는 거기에 질려서 다 버리고 항해를 떠났고. 헨리 소로 같은 사람이었거든요.”

헨리 소로를 언급하는 원주민이라….

토라는 계속 말했다.

“요하네스는 작가였죠. 완전 망했지만 책도 나왔었어요. 제가 원고를 들고 나가서 출판사에 넘겨줬거든요. 읽어본 적 없으세요? ‘존의 신비한 여행’이라고.”

“그거 꼭 읽어보고 싶네. 섬을 나가게 되면 찾아볼게.”

도영은 별로 관심이 없는 투로 말했지만 토라는 피식 웃었다. 그건 꼭 섬을 나가고 말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새소리 같은 여자들 소리가 들리고 움막 뒤쪽에서 여자들과 함께 가말이 나타났다. 도영이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자 어느새 옆에 와 서 있는 토라가 은근히 속삭였다.

“우리 마티, 예쁘죠?”

도영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고 토라를 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토라는 틈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여기 온 남자들이 다 마티를 숭배하다시피 했지만 아무한테도 마음을 주지 않던, 그 이름도 유명한 사타디 섬의 모아이 석상이라고요. 그런 마티가 거의 처음으로 마음을 허락한 남자가 소령님이라는 겁니다.”

마티는 사타디어로 ‘엄마’라는 뜻이라고 들었다. 즉, 토라는 가말을 엄마라고 부르고 있는 거였다.

“아무리 클리엔테스라지만 그 얼굴로 엄마, 엄마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토라는 허리에 한 손을 짚고 삐딱하게 섰다.

“마티가 백 년에 한 번씩만 애를 낳았어도 저만 한 아들이 몇 명이나 있을 거 같습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때 가말이 끼어들었다.

“둘이 무슨 말 해?”

꼭 자기만 빼놓고 이야기한다고 질투하는 아이 같았다. 도영은 손을 젓고 해먹에 다시 누웠다. 그러자 가말이 옆에서 기웃거리며 물었다.

“도영, 졸려?”

“졸려.”

도영은 눈을 감은 그대로 대답했다. 가말은 해먹을 잡고 말했다.

“나랑 놀아.”

“애냐? 놀게.”

그런데 그때 한 젊은 부족 여자가 지나가면서 꽃을 이마에 대었다가 도영 앞에 내려놓고 갔다.

도영은 의아해졌다. 다음에는 중년 여자가 지나가면서 주먹만 한 주머니 하나를 도영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가 내려놓고 갔다.

“저게 뭐야?”

도영이 주머니를 보며 묻자 해먹 뒤에 있는 가말이 대답했다.

“밀알.”

도영은 돌아보고 되물었다.

“밀알?”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알.”

이게 무슨 덤 앤 더머의 대화도 아니고, 도영은 기가 막혀 말했다.

“그러니까 밀알을 왜 나한테….”

이번에는 또 다른 중년 여자가 작은 상자를 바치고 갔고, 소녀 둘이 꽃다발을 바쳤다. 그러자 토라가 흐뭇해하면서 말했다.

“벌써 소문이 났나 보네요. 소령님은 마티의 남자라고. 마티의 남자면 우리 부족의 큰 타와니까요.”

타와. ‘아빠’였다.

도영은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젠 생불 취급인가 싶었다.

“아주 꽃으로 장식해서 제단에 올려놓지 그래.”

“돌아가시면 알아서 그렇게 할 겁니다.”

토라의 말에 도영은 눈을 굴렸다.

「큰 마티!」

그때 모여 있는 소녀들이 가말을 불렀다. 그러자 가말은 그쪽으로 갔다. 향기를 남겨놓고.

가볍게 뒷짐을 지고 서서 소녀들과 대화하는 가말은 부족의 소녀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아이들도 가말을 신이라기보다 돌하르방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았다.

가말을 건드리는데도 특별히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부족 사람들에게 신이란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사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때 소녀들이 약간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도영 쪽을 보았다.

「저기 봐요.」

가말도 돌아보았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가말을 응시하는 도영 위로 나무 그늘이 넘실거렸다.

소녀들은 가말을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었다. 도영은 꼭 사람을 저렇게 보았다. 깊숙이 파고드는 것처럼. 가말은 볼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

“와우, 우리 마티가 소녀처럼 보이네요.”

도영 옆에서 토라가 감탄했다. 뭔가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도영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고 돌아보았다.

“뭘 먹는 거야?”

토라는 도영에게 샐러리 같은 초록 식물 줄기를 내밀었다.

“사탕수수요. 드실래요?”

***

“안 자?”

가말이 물었다.

꺼져가는 화톳불 가에 앉아있는 도영은 가말을 빤히 보았다. 그러자 가말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영?”

도영은 일어나며 다소 냉담하게 말했다.

“오늘은 따로 자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이 부족의 큰 타와가 되어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결혼도 안 한 총각한테 그런 말만 한 아들 녀석이 생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

“잘 자.”

가말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고 어물거리는 사이에 도영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정적이 흘렀다.

도영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부스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뒤척였다.

결국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집을 가로질러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가말은 문 옆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앉아있었다.

“도영.”

도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도대체 왜 이렇게 버려진 강아지 같은지 알 수 없었다. 한 부족에게서 신 대접도 받고 친아들처럼 자신을 위해주는 클리엔테스까지 있는데.

“자러 가.”

도영이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가말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미워하지 마.”

도영은 잠깐 말이 없는가 싶더니 가말의 팔을 풀어냈다.

가말은 순순히 말을 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매달리긴 했지만 억지로 매달린다고 도영이 마음을 바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지켜본 결과 도영은 꽤나 칼 같은 부분이 있었고, 자신이 마음속으로부터 납득하지 못하는 점에는 의문을 품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도영이 가말을 끌어당겨 안으로 들어갔다.

“어…?”

가말은 어리둥절했다.

탁.

문이 닫혔다. 그리고 도영이 가말의 팔을 당기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키스했다.

가말은 흡 숨을 삼키며 긴장했다가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도영은 계속 키스하면서 그가 잡고 있는 가말의 팔을 제 허리에 감게 했다. 그리고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가말은 벽에 등이 닿았다.

도영은 그쪽이 삼천 년을 산 것처럼 입맞춤에 능숙했다. 아니, 이런 일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박사 학위라도 있는 것 같았다.

가말은 점차 흥분해서 도영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도영이 살짝 입술을 떼고 말했다.

“흥분하지 말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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