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쭈니>
가말은 점차 흥분해서 도영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도영이 살짝 입술을 떼고 말했다.
“흥분하지 말라고 했잖아.”
가말이 흥분해서 자칫 너무 세게 끌어안기라도 한다면 인간으로서는 곰이 장난으로 후려치는 데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미안….”
가말은 웅얼거렸다. 도영은 다시 키스하…려다가 고개를 숙이고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그리고 잡을 새도 없이 침대로 가더니만 뒤돌아 누웠다.
“도영, 괜찮아?”
가말은 뒤로 다가가 물었다. 왠지 도영이 기운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를 본 이래로 제일 의기소침한 상태 같았다.
“괜찮아.”
도영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생불 취급도 좋고,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한테 그런 큰아들이 생긴 것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손 치지만, 이 현실만큼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가말과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있다는 현실을.
그는 남자였다. 젊고 아주 건강한 남자.
게다가 밤마다 멀리서 아련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토라 녀석은 뱀파이어의 체력을 이상한 곳에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위험한 짐승도 없는 이 섬에서는 그 좋은 체력을 쓸 만한 곳이 따로 없겠지만 매일 밤 여자 하나를-최근에는 그 아키라는 여자- 기쁘게 해주고 있는 모양인데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말과 같은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야 하는 일은….
도영은 만약 자신이 중세시대의 이단심문관이 된다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미녀를 데려다놓고 쳐다보기만 해야 하는 고문을 개발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고문인지 본인이 제일 잘 아니까.
그런데 갑자기 가말이 뒤에서 도영을 끌어안았다.
“도영은 따듯해.”
신기할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하던 몸이 금세 이완되었다. 마치 고승의 사자후를 들은 악귀처럼 몸에서 욕정이 줄행랑친 느낌이었다.
도영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무조건 몸으로 사랑을 나눠야한다는 것도 편견이었다. 모름지기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는 플라토닉….
도영은 갑자기 돌아누워 가말을 마주보았다.
“미안하지만 난 요하네스가 아냐.”
고상한 정신의 교감 따위 개나 주라지.
물론 그건 픽션이긴 했지만.
“응. 아니야.”
가말은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도영이 왜 요하네스를 언급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영은 이런 녀석을 데리고 뭐하는 건가 싶어서 허무해졌다.
그런데 가말이 흘긋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도영은 이런 일 잘해.”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도영은 가말을 보았다.
“여자 많이 만났어?”
그러고는 가말은 도영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덧붙였다.
“나도 남자 많이 만났어.”
도영은 흠, 소리를 내었다.
“네가?”
“나 나이 많아.”
그만큼 만날 시간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도영은 침대에 팔꿈치를 댄 손으로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그래? 몇 명이나 만났는데?”
“셀 수 없어.”
가말은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숨어 다니는 상황에서 몸은 외로움을 달래기에 그나마 신속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로 셀 수 없다고 한 건 아니었다.
정말로 셀 수가 없었다. 삼천 년이라는 긴 시간의 선 위에 드문드문한 점처럼 이어져서 이미 기억이 흐릿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도 이 섬에 오기 전까지 이야기였다.
“나 사실 애 있어.”
그런데 바로 이어진 도영의 말에 가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도영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한 번씩 거짓말 했으니까 비겼지?”
가말은 얼굴이 불퉁해졌다.
“내가 거짓말한지 어떻게 알아?”
“그럼 거짓말이 아니라고?”
끽.
도영이 침대를 짚고 일어나자 침대가 작게 울었다. 가말은 저도 모르게 굽히고 있던 다리를 살짝 펴면서 주춤했다.
도영이 그 옆으로 손을 짚으면서 가까이 왔다.
“그럼 잘됐네.”
그가 드리운 그림자에 잠겨 가말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뒤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 낮은 숨소리, 가까이 다가온 몸이 뿜어내는 열기…. 밤의 속삭임처럼 은밀한 분위기에 심장에서부터 열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할까, 그녀를 보는 도영의 눈이….
그쪽이 뱀파이어 같았다.
하지만 파괴적인 피의 갈증에 시달리는 뱀파이어보다 좀 더….
“잘돼?”
가말은 문득 도영이 뭔가 말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물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감아 쥐고 있는 도영이 머리카락을 쥔 그대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속삭임이 다가왔다.
“경험이 더 많은 쪽이 가르쳐주면 되니까.”
***
“마티.”
토라가 어깨에 손을 짚었다. 가말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토라는 연인을 대하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이야.”
그런데 옆자리에 도영이 없었다. 가말은 급히 자리를 짚고 일어나며 물었다.
“도영은?”
“밖에 있어. 역시 군인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운동을 빼먹지 않네.”
가말은 어젯밤 생각이 나서 살짝 볼을 붉혔다. 그런…. 역시 도영은 그런 일에 관련된 학위를 딴 게 분명했다.
“왜 얼굴을 붉혀?”
토라가 짓궂게 물었다.
“아냐.”
가말은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은 아이처럼 밖으로 뛰어나가려다가 다시 토라에게 돌아와서 물었다.
“나 예뻐?”
가말이 이런 걸 물어보는 일은 처음이라 토라는 놀랐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뻐.”
그러자 가말은 조르르 밖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에 씻긴 마을 풍경 속에 사람들이 간간이 보이고, 이미 운동하고 씻는 걸 마친 도영은 앉아서 줄을 꼬고 있었다.
“일어났어?”
도영은 가말을 보고 물었다. 가말은 은근슬쩍 도영 옆에 앉으며 물었다.
“뭐하고 있어?”
“토라가 하는 법을 알려줘서.”
그러고는 도영은 흘긋 가말을 봤다가 다시 작업하고 있는 줄을 보면서 말했다.
“눈곱이나 떼라.”
가말은 화들짝 놀라 제 눈을 짚어보고 도영이 장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토라를 흘겨보았다.
“토라.”
토라는 웃음을 터뜨리고 다른 쪽으로 갔다. 도영은 둘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막 눈곱을 다 뗀 가말에게 말했다.
“클리엔테스와 사이가 좋네.”
“좋지?”
가말은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는 듯이 되물었다. 도영은 줄을 꼬기 위한 나무껍질을 죽 벗겨내면서 말했다.
“하긴, 파트로네스와 결혼하는 클리엔테스도 있으니까.”
“토라와 라토는 내가 키웠어. 다섯 살 때부터.”
“저쪽 부모님은 어쩌고?”
“토라와 라토의 마티가 둘을 버렸어. 숲에.”
도영은 멈칫하고 가말을 보았다. 하지만 가말은 특별한 기색 없이 담담히 말했다.
“쌍둥이는 불길하니까.”
원시 부족들 중에서는 쌍둥이를 불길하게 여기는 부족도 많았는데 사타디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쌍둥이…?’
또 뭔가 생각날 것 같았는데 그 순간에 토라가 멀리 정자 아래서 말했다.
“식사하세요.”
도영은 돌아봤다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가자.”
“응.”
가말은 기뻐하며 따라왔다. 도영은 가면서 흘긋 가말을 보고 물었다.
“근데 너 안 씻냐?”
“먹고 씻을 거야.”
“더러워.”
가말은 세상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기겁했다.
“나 안 더러워!”
그러더니 우물가로 달려갔다. 도영은 먼저 가서 자리에 앉았다. 밥을 차리고 있는 토라가 물었다.
“타와, 옷은 계속 그걸 입고 계실 겁니까?”
도영은 여전히 군복을 입은 상태였다.
“타와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리고 문명인으로서의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이건.”
“곧 다 헤져서 입지 못할 텐데요.”
“내버려 둬.”
토라는 소스가 묻은 엄지손가락을 핥고 말했다.
“상징적이네요. 문명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다 헤져서 결국 벗게 되는 날 부족민으로서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게 될 테니까요.”
도영은 실소를 지었다.
“쓸데없이 문학적이네.”
토라는 오늘도 바깥 기준으로는 노출도가 지나친 차림으로 나무 그릇을 들고 웃었다.
“제 집에 책 많으니까 원하시면 갖다 보세요. 꾸준히 사 모았거든요.”
그때 도영은 토라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어서 본의 아니게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너 지금 입고 있는 거 팬티 아냐?”
그랬다. 토라가 허리에 두른 천 조각 아래 입고 있는 건 검은 드로어즈였다. 그러고 보니 싸울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리를 휘두를 때도 그 사이에서 흉측한 장면을 보지 못하긴 했었다.
토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깥이 팬티 하난 기가 막히게 만들더라고요. 쫀쫀한 것이 한 번 입으면 벗을 수가 없다니까요.”
“대체 그 차림은 왜 하고 있는 거야?”
진짜 기가 차서 묻자 토라는 윙크를 날렸다.
“아이덴티티의 표출이죠.”
도영은 눈을 굴렸다. 이 녀석도 또라이 기질이 다분한 것이 괜히 가말의 클리엔테스가 아니었다.
그때 가말이 와서 도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토라가 그릇을 건네주면서 짓궂게 말했다.
“마티 이제 내 옆엔 앉지도 않네.”
“아?”
가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엉덩이를 슬쩍 움직여서 도영과 토라 사이로 옮겨갔다.
“가운데야. 딱 가운데.”
토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우리 마티 너무 사랑스럽지 않아요?”
가말은 얼굴이 불퉁해졌다.
“나 놀리지 마.”
도영은 많은 뱀파이어들을 만나봤지만 이런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 관계는 처음 봤다.
참고로 ‘파트로네스’는 피를 준 뱀파이어를 의미했다.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는 서로 뗄 수 없이 밀접하지만 진짜 혈육이 아닌 관계 특성상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쪽은 가말이 실제로 토라-와 그 쌍둥이-를 키웠기 때문인지 진짜 핏줄 같았다.
어쨌든 토라가 조금이라도 가말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말 한마디에서라도 티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토라가 가말을 대하는 태도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섞인 존재를 대하는 정도였다.
그만큼 토라는 가말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걸로 보였다. 자신이 확인한 바, 그만한 능력이 있기도 하고.
“마티 삐쳤어? 이거 줄게 화 풀어.”
토라는 말하면서 도영으로서는 정체 모를 녹색 채소를 가말에게 내밀었다.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나 이거 싫어.”
토라는 짓궂게 웃었다.
“알아. 그러니까 주는 거야.”
“토라 나빠.”
가말이 질색하자 토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서도 가말이 뼛속 깊이 가진 외로움과 두려움의 실체는 뭔지, 도영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가말이 도영을 가리키고 말했다.
“도영 줘.”
도영은 기가 찼다.
“너 싫은 걸 왜 날 줘?”
그러면서 도영은 토라에게서 채소를 받아먹었다. 어쨌든 독만 없으면, 아니 약한 독까지는 소화할 수 있는 튼튼한 위장 덕분에 편식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토라가 뭔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뭐가?”
도영이 물었다.
“마티가 소령님한테 빠진 이유요. 나빠 보이지만 실은 다정한 남자. 소령님 은근히 마성의 남자였네요.”
“나 네가 싫어지려고 한다.”
도영이 질색했지만 토라는 해맑게 웃었다.
“설마요. 절 싫어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도영은 눈을 굴렸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 도영도 진심으로 토라가 싫진 않았다. 묘하게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가말이 거들었다.
“응. 모두 토라 좋아해.”
“나도 마티 좋아해.”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도영은 머리가 아파 왔다.
“이젠 팔불출이냐? 적당히 좀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