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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22화 (22/110)

22화<쭈니>

아이들이 외양간에 있는 소들에게 여물을 주고 있었다.

사타디 부족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웠다. 사냥은 거의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비옥한 땅에서는 적절한 소출이 나고, 굳이 사냥을 하지 않아도 고기가 있고, 강에서는 팔뚝만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남자가 적네.”

도영은 부족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쌓아놓은 나무 장작을 수십 묶음씩 한 번에 옮기고 있는 토라가 대답했다.

“여자가 많은 편이거든요.”

도영은 토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너한텐 천국이겠네.”

“전 장난감 같은 거죠.”

그렇게 말하는 토라는 특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처럼 약간 신이 나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그 상태로 돌아보고는 물었다.

“근데 안 도와주십니까?”

도영은 토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뱀파이어가 인간한테 말하네.”

“뱀파이어도 무거운 건 무겁습니다.”

“그럼 인간한텐 어떨 거 같아?”

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타디 부족은 수레나 기중기도 따로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두 발이 달려서 어디나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동성 면에서도 뛰어난, 말 그대로 살아있는 수레와 기중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시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치고 집들이 꽤 크고 튼튼한 나무집들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영은 결국 옮기는 걸 도와주면서 말했다.

“차라리 결혼을 하지 그래? 네 녀석이라면 줄줄이 데리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럼 안 되죠. 전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부족의 대가 끊기잖아요.”

그 말에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도영은 옆에서 제 키보다 높은 장작더미를 옮기고 있는 가말을 돌아보았다.

“넌 어떻게 뱀파이어가 됐어?”

토라나 그 쌍둥이는 가말이 감염시켰지만 가말이 어떻게 감염됐는지는 들은 적이 없었다. 따로 파트로네스가 있을….

“몰라.”

“몰라?”

도영은 되묻고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이렇게 됐어.”

“아무 일도 없이?”

“응.”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겠지.”

“늪에… 빠졌었어.”

가말은 꼭 이 말을 해도 되나 고민하는 것처럼 조심하며 대답했다.

“뭐?”

그런데 도영이 놀라 되물었다. 생각보다 놀라는 반응이어서 가말은 오히려 되물었다.

“응?”

“늪에 빠졌다고?”

“어… 응.”

가말은 뭔가 잘못됐나 싶어서 대답했다. 도영은 재차 물었다.

“늪에 뱀파이어가 숨어있었다거나?”

“아니. 누구한테 물린 기억은 없어. 왜?”

도영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손을 내젓고 걸어갔다.

“아니야.”

뒤에서 토라가 눈으로 ‘왜 저래?’ 하고 물었고 가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주 드물게, 늪에 빠졌다가 흡혈귀가 된 케이스가 보고되고는 해요.”

예전에 연구원이 한 말이 떠올랐다.

“말했다시피 최초의 흡혈귀는 외계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원형 X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최초의 흡혈귀들은 공룡처럼 멸종했고 이 원형 바이러스도 사라졌죠.”

오랜 야근으로 당이 떨어진 탓인지 연구원은 막대 사탕을 빨면서 계속 말했다.

“근데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죠? 늪에서 몇천 년 전 미라가 썩지도 않은 채로 발견됐다는. 비슷한 원리로 가끔 늪의 바닥에는 원형 X 바이러스가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실수로 늪에 빠졌다가 감염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나 봐요.”

즉, 늪에서 뱀파이어가 태어나는 건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개발로 이젠 그런 늪조차 남아있지 않지만요. 아쉬워요. 남아있었다면 정말 소중한 샘플이었을 텐데. 아무튼 고대에나 가능한 이야기였죠.”

‘기원전 14세기.’

가말은 고대에 태어났다.

도영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가말과 토라가 목소리를 낮추고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영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둘이 뭘 숙덕거리고 있어?”

토라는 웃으며 돌아보았다.

“저녁 뭐 먹을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저녁이 난 아니길 바랄게.”

둘의 분위기로 보면 그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가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도영 안 먹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저녁은 뭔데?”

가말은 도영을 쳐다보았다.

“어….”

“토란 스튜입니다.”

토라가 대답했다. 도영은 약간 기가 찬다는 반응을 보였다.

“늘 먹는 건데 굳이 상의할 필요까지 있어?”

“다른 재료를 넣어볼까 하고요.”

도영은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토라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근육이 많은 타와의 몸은 질길 거 같아서 싫거든요.”

“안 질길 거 같으면 괜찮고?”

그러고 도영은 돌아섰다. 아직은 늪에 대해 말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가말이 기억하지 못할 뿐 늪에 숨어있었던 뱀파이어에게 물렸던 걸 수도 있었다.

도영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토라는 작게 말했다.

「조심해. 워낙 감이 좋아서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가말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려고 하는데 토라가 그녀를 잡았다.

「하지만 정말 말하지 않을 거야? 마티가 섬에 숨어사는 이유.」

「그건….」

가말은 주저했다. 하지만 이내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

***

도영은 오두막에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부족 사람들도 다 순박하고 착해 보였고, 이 섬을 나가지 않는 가말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리라고 어느 정도 납득도 하게 됐다. 사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복잡한 상황일수록 더 간단하게 생각해보자면 이 많은 전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에 돌아가야 했다.’ 이대로 바깥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어 섬에서 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섬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말이나 토라를 잘 설득하기만 해도 섬을 나갈 수 있는데 말이다.

생각에 빠져있는데 가말이 오두막 입구에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도영, 우리 밭에 가.”

역시 자신이 엮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영도 갈래?”

“난 됐어.”

생각할 게 좀 있었기 때문이다.

“응, 그럼….”

가말이 말하려고 하는데, 그 뒤로 밭에 갈 준비를 마친 토라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잔소리에 성경 인용까지. 하여간 저건 양아들인지 시어머니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초록 풀이 무성한 밭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햇볕은 뜨거웠고 공기는 맑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스트레스 프리의 삶 그 자체라니까요.”

토라는 박물관에서 볼 법한 보습을 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도 문명 세계의 거리에 나가면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거나 혹은 달려올 차림을 한 그는 실용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가죽조끼를 하나 더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난 군인이지 농부가 아냐.”

도영은 풀을 베는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햇빛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밀짚모자를 빌려 쓴 상태였다. 군복에 밀짚모자가 그리 어울리진 않았지만 이미 티셔츠가 헤져서 구멍이 날 지경이라 또 그렇게까지 이질감이 있다고 하긴 어려웠다.

“여기서 살면 그런 구분은 무의미해요.”

“토라도 물레 돌려.”

가말이 거들었다.

안 그래도 도영도 토라가 여자들하고 모여앉아서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몸은 마르스가 울고 갈 녀석이 헤스티아(화덕과 가정의 신)처럼 능숙하게 물레를 돌리고 있는데 꼭 합성해놓은 그림 같았다.

어쨌거나 도영은 밭일을 하면서 말했다.

“누굴 바보로 아나. 네 몸은 싸우는 몸이야.”

가말과 토라는 멈칫했다. 하지만 도영은 전혀 심각하지 않은 투로 계속 말했다.

“단순히 루아스라서 발달한 게 아니라 싸우기 위해 일부러 장기간 훈련한 몸이지.”

토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도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말했잖아. 난 군인이야. 그 정도도 모를 거 같아? 그러니까 아직도 너희들이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다는 의미지.”

도영은 김장하다가 허리가 아픈 사람처럼 허리를 들고 잠깐 밭 멀리를 쳐다보았다.

“그게 나한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거고.”

그리고 다시 일하며 말했다.

“하지만 인생사라는 게 그래.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정말 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거든. 아니, 내가 생사도 알리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게 어떻게 나한테 해가 아니야?”

토라는 아무런 말하지 않고 그저 도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너희 부족, 극단적으로 젊은 남자가 적어. 적대 부족도 없고 사냥도 하지 않고 위험 요소라고는 없는 환경에서 말이야.”

“…….”

“어촌이면 다들 배 타고 나갔으려니 하겠지만 고기잡이배는 보이지도 않고. 젊은 남자들, 즉 병력이 어딘가로 빠져있다는 의미지.”

그러고는 도영은 계속 풀을 잘랐다. 그러다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가말과 토라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도영은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

토라는 정신을 차리더니 픽 실소를 흘렸다.

“소령님한테 저희 부족을 숨긴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어요. 이런 일을 걱정한 거죠.”

뭘 새삼스럽게, 라고 말하듯이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토라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마티의 형제 때문이에요.”

“가말의 형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토라, 말하지 마.”

갑자기 가말이 다급해져 토라를 만류했다.

“도영이 나 미워해.”

도영은 가말을 보았다.

“네 형제가 살아있어?”

가말은 꾹 입술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토라가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마티, 오히려 이야기하는 게 소령님도 여기 적응하기 더 쉬울 수도 있어.”

그래도 가말은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다물었다. 그러자 토라가 대신 말하긴 하지만 입에 담는 일 자체가 불쾌한 듯 인상을 쓰고 말했다.

“살아있어요. 끔찍한 녀석이죠. 그 녀석이 마티를 쫓고 있거든요.”

도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라며? 왜 가말을….”

그 순간 섬광이 쳤다.

도영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가말과 토라가 의아하게 보는 사이에 낫으로 쓰는 칼을 집어 홱 겨누었다.

“도영?”

가말은 놀랐다. 도영은 전에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분노와 경악, 그리고 절망감까지 뒤섞인.

“너, 대공하고 무슨 관계야?”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억눌려 목소리까지 허스키했다.

도영은 마침내 가말이 누구를 닮았는지 깨달았다.

코드네임 ‘대공(ANTIAIRCRAFT).’ 얼마 전까지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루아스 테러집단 ‘SN’을 운영하다가 3년 전 체포되어 수감된 수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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