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쭈니>
가말은 당장 상자에서 나와서 뛰어가려고 했다.
「쿠니스, 큰일 났어. 아다위가…!」
쿠니스가 아다위에게 달려가려는 가말을 붙잡아서 반동이 일 정도로 세게 돌려세웠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죽었어.」
가말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무언가를 깨닫는 순간 경악하는 얼굴이 되었다.
「설마….」
쿠니스는 당장 가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말은 얼결에 끌려갔다. 아직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쿠니스는 문 뒤에서 바깥의 기척을 살피고 바깥으로 나갔다.
「쿠니…!」
「조용히 해. 아직 아다위를 발견하면 안 돼.」
쿠니스는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매끄럽게 마을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그들을 감싸왔다.
한참이나 헉헉대며 끌려가고서야, 가말은 드디어 깨달았다. 이건 현실이라는 걸.
「쿠니스!」
가말은 팔을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쿠니스! 마을로 돌아가야 해!」
갑자기 쿠니스가 가말을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았다.
「사랑해.」
그리고 뜨거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해, 가말.」
「쿠니….」
쿠니스가 가말을 떼어내고 우악스레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열망이 이글거리는 얼굴에 가말은 말문이 막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란투가, 그리고 아다위가 그녀를 보던 눈이었다. 여자를 원하는 남자의 열망이 담긴.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자기 여자 형제들과 결혼해.」
짝 소리가 났다.
쿠니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가말을 보았다. 하지만 가말은 온 힘을 다해 쿠니스의 뺨을 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다는 거야?」
가말은 쿠니스도 처음 보는 모습으로 분을 토했다. 단전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강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란투도 아다위도 아무 죄를 짓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가말은 꾹 이를 물었다. 힘을 준 눈에 눈물 같은 윤광이 빛났다.
「마을로 돌아가. 잘못을 빌어. 네 죗값을 치러!」
아이러니하지만 쿠니스는 그 순간 가말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나 어린 소녀 같던 그녀가, 늘 약간은 수줍어하는 얼굴이 사랑스럽던 그의 쌍둥이가 이토록 올곧고 강한 모습을 보이는 데 전율이 올라왔다.
아니, 가말이 실은 강한 신념과 의지가 있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다. 둘은 쌍둥이였으니까.
쿠니스는 가말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가말.」
치솟아 오르는 열망을 참을 수 없어 무작정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며 속삭였다.
「사랑해. 널 원해.」
가말은 몸을 뒤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쿠니스는 더욱 강하게 옥죄어왔다.
「쿠니스! 쿠니….」
「제발 날 받아 들여줘. 내겐 너밖에 없어. 다른 여자를 사랑해보려고 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많은 여자를 안아도 다 네 대체품에 불과했어. 이 머리카락….」
가말의 머리카락을 쥐고 깊이 향기를 맡았다.
「이 피부….」
얼굴을 감싸 안고 볼에 입술을 맞대었다. 한참 저항하던 가말은 순간 말을 잊을 정도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래에서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욕정의 증거.
타악.
가말은 쿠니스를 밀쳤다.
「쿠니스! 넌 내 형제야. 우린 쌍둥이라고!」
「그러니까!」
쿠니스는 벼락같이 소리쳤다. 가말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랐다.
「넌 내 걸로 태어났어. 신이 내게 널 주신 거야.」
살인 행위가 불러일으킨 광기와 열기에 사로잡혀 쿠니스는 신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내 거야!」
그리고 거세게 가말의 어깨를 쥐었다.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이 아파서 가말은 쿠니스를 불렀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쿠니스는 다시 한번 벼락같이 소리쳤다.
「내게 되지 않을 거라면 네가 살 이유가 뭐야?」
순간 강한 손이 가말의 목을 졸랐다.
「쿠니…!」
놀라서 부르려고 했지만 목을 쥔 손의 힘이 엄청났다.
「쿠…!」
「날 사랑하겠다고 말해!」
쿠니스는 거의 울음 같은 소리로 외치며 가말의 목을 흔들었다.
가말은 손톱을 세워 제 목을 휘어잡은 손을 떼어내려고 긁어내렸다. 손톱이 살갗에 박혀들고 부러져 날아갔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열기와 분노에 눈이 먼 쿠니스는 고통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내리누르는 힘에 밀려 바닥에 넘어진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면서 계속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쿠니스는 소리가 삭제된 영상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영상 속에서 마침내 가말은 힘을 잃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쿠니스는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흠칫하고 천천히 손을 떼었다. 축 늘어진 가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말…?」
쿠니스는 조심히 불렀다. 하지만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낯에 죽은 자 특유의 푸르스름한 냉기가 흘렀다. 그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봄꽃처럼 화사하던 새 신부를 시신처럼 보이게 하는 비정한 빛깔이었다.
「가말.」
쿠니스는 장난하지 말라는 듯이 부르면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가….」
그 순간이었다. 가말의 몸이 아래쪽으로 조금 스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가 걸쳐 누워있는 늪의 가장자리가 무너진 탓이었다.
쿠니스는 깜짝 놀라 멈추었다. 제 발도 늪의 가장자리를 디디고 있어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물러났다. 늪에 빨려 들어가면 자력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말은 머리부터 늪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
쿠니스는 흠칫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가말을 건져내기엔 늦었다는 걸 알았다.
점성이 짙어 진흙처럼 뭉클한 늪 속으로 얼굴이 사라지고, 어깨가 빨려 들어가고, 쑤욱 밀려들 듯이 피와 흙으로 더럽혀진 신부복을 입은 다리가 사라졌다.
흰 신부복 끝자락마저 빨려 들어가고 나자 정적이 감돌았다.
어린 새신부의 시신을 삼킨 늪은 비정하게 고요했다. 사방에 벌레들이 쓰르륵 울었다.
쿠니스는 소리 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그는 오늘밤 세 사람을 죽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형제를.
「아니야…. 아니… 아니야!」
쿠니스는 땅바닥에 엎어져 울었다.
「미안해, 가말. 미안해.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너무 화가 나서…. 그러려던 게 아니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흐느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가말의 시신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늪에 가라앉은 시신은 떠오르지 않으니까.
자신이 란투와 아다위를 죽였다는 걸 아는 사람도 가말뿐이었다. 이대로 마을로 돌아가도 누구도 오늘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쿠니스는 천천히 손을 얼굴에서 뗐다. 주변은 고요했다. 벌레들이 울었다.
그 순간이었다.
촤아악.
늪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쿠니스는 눈을 크게 뜨며 분노하는 신의 포효 같은 모습을 쳐다보았다.
***
가말은 늪에서 기어 올라오며 기침을 토해냈다. 머리에서부터 질퍽한 늪의 물이 떨어져 내렸다.
늪은 식탐이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한 번 삼킨 먹잇감은 절대 뱉어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늪에서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능했다.
사방이 시끄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했는데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지나치게 시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소리치고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얽히는 소리가 귀를 몽둥이로 내려치듯이 울려왔다.
「찾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면서 새까맣게 몰려든 건 아다위의 부족 사람들이었다.
간간이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는, 경멸과 분노와 두려움이 넘실거리는 눈을.
결혼식에서 그녀에게 웃으며 축복을 빌어주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녀를 더럽고 추한 것인 듯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살의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첫날밤에 남편을 죽인 여자!」
가말은, 정말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가 않았다.
「네…?」
「일어나!」
남자들이 거칠게 가말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세우려다가 한 남자가 휘청하며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그를 타박했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미끄러진 거야!」
남자는 화를 내고는 다시 일어나 가말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무거워? 옷 때문인가?」
그러고는 가말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말은 어렵사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니스는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이 놀라던 표정이 기억나는데 그가 왜 그런 표정을 했는지,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쿠니스… 쿠니스는….」
가말이 중얼거렸지만 시끄러운 와중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
사람들이 홱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가말을 끌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군가가 누워있었다. 전사의 성장을 입은 아다위였다. 배 위에 올려 맞잡은 손에는 이 시기에 피는 모든 꽃이 섞인 꽃다발을 쥐고 있었고, 귓가에도 꽃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파랗게 물든 피부.
가말은 흠칫했다. 이건 아다위의 시신이었다. 역시 꽃으로 장식되어있어서 순간 발견하지 못했지만 목에 흰 천이 감겨있었다.
「첫날밤에 이런 짓을 하다니!」
누군가가 가말을 밀치며 소리쳤다. 온힘을 다해 밀친 것치고 가말은 조금 휘청거렸을 뿐이지만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이리저리 밀쳤다.
「사악한 여자!」
「악마야!」
결국 가말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위로 계속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가말은 무서웠다. 지금까지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는데 말로 때린다는 게 이런 건지 실체가 없는 말에 찔리듯이 온몸이 떨리고 아파왔다.
그녀는 아다위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쿠니스가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증거도 없었지만 ‘쿠니스가 했다.’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쿠니스가, 항상 다정하고 무엇이든 그녀를 먼저 위해주었던 제 쌍둥이를 고발하는 말이….
「가둬!」
남자들이 다시 가말을 일으켰다. 사람이 아닌 것을 다루듯이 거칠고 난폭한 손길이었다. 아마 이때 그녀가 여전히 인간이었다면 온몸에 멍들고 긁힌 상처가 났을 것이다.
가말을 끌고 가 감옥으로 쓰는 움막에 밀쳐 넣었다. 가말은 무릎을 찧으며 넘어졌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돌아보며 물었다.
「쿠니스… 쿠니스는 어디 있어요?」
남자는 가차 없이 혐오하는 표정을 퍼부었다.
「돌아오지 않았어. 네 쌍둥이도 네가 죽인 거지?」
가말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내가….」
쿵.
하지만 문이 닫혔다. 움막 너머로 바깥은 아직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흥분해서 외치고 떠드는 소리가 벽을 타고 웅웅 울려왔다.
몸의 떨림을 잦아들게 하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었지만 가말은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궁금했다. 대체 쿠니스는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자신은 왜 이렇게 갈증이 나는지.
혀로 입술을 쓸었다. 입술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