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쭈니>
탁.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문이 열리고 감시인이 들어왔다. 가말은 벽 쪽에 붙어 양어깨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감시인은 그녀 앞에 섰다. 가말은 애써 고개를 들며 물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물… 물을… 주세요… 부탁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이 나서 형용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지금이라면 바다라도 전부 들이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목이 마른 건지 배가 고픈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누가 배 속을 파먹는 것처럼 배가 고픈 것 같다가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말랐다. 섬뜩하게 압도적인 기갈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가 ‘모자르다’고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감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가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가말은 의아해져 감시인을 보았다.
늪에 빠졌다가 올라온 그대로라 온갖 것들이 말라붙은 신부복은 원래 색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퀴퀴한 악취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날밤에 남편을 죽인 이 부정한 여자에게서는 무언가 참을 수 없게 하는 윤기가 흘렀다.
가말의 턱을 쥐고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떡이 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도 진흙이 묻어 얼룩덜룩했다. 하지만 볼을 쓰는 엄지손가락 아래로 피부는 서늘하고도 부드러웠고 눈은 고통이 묻어나는데도 맑고 깨끗했다.
그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 점차 배 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결혼식에서 봤을 때부터 욕정을 느꼈지만 화려하게 꾸몄던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비현실적으로 시선을 끄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욕을 하는 내내, 감시인은 그녀를 만지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내일이면 사형당할 테니까.
감시인은 가말의 팔을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그러고는 가말 위로 올라갔다. 가말은 흠칫했다.
「얌전히 있으면 물을 주지.」
그러면서 감시인은 가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만…. 제발….」
「아다위를 죽인 건 널 원한 악마일 거야. 이런 가녀린 팔로 아다위를 죽인다는 게 말이 돼?」
감시인은 헐떡이며 말했다.
「제발….」
가말은 감시인을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입속에서 무언가가 자라는 게 느껴졌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때 가말 스스로도, 헉헉거리느라 바쁜 감시인도 몰랐지만 가말의 눈동자 속 홍채가 흥분한 맹수의 것처럼 서서히 좁아졌다.
가말은 꿈틀거리는 감시인의 목덜미에 털이 생긴 모양까지도 자세하게 보였다.
어떤 물체도 이렇게 가깝고 세밀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모르던 세계를 볼 수 있는 신의 눈을 가지게 된 느낌이었다.
감시인이 움직이느라 들썩거리는 피부 아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솨아아…. 솨아….
폭풍이 친 다음 날 강에 탁류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피부 아래 흐르는 물의 흐름이 느껴졌다. 가말은 입을 열었다.
‘목이 말라.’
감시인의 몸 안에서 나는 물소리가 점차 강해졌다.
‘마시고 싶어.’
가말은 감시인의 목덜미를 향해, 번득거리는 송곳니를 내려찍었다.
피부에 송곳니 끝이 닿으려는 찰나 멈칫했다. 감시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헐떡이고 있었다.
가말은 질끈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감시인을 밀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시인은 거인이 집어다가 던진 것처럼 허공을 붕 떠서 날아갔다. 그리고 힘없는 인형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 벽에 부딪혀서야 멈추었다.
가말도 놀랐고 감시인도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파랬다.
「아, 악마다…! 악마야!」
감시인은 기겁하고 뛰쳐나갔다. 가말은 얼떨떨해 제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힘은…?’
쾅.
갑자기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감시인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이 자리에서 살인이라도 낼 것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타와에게 말 좀 해주세요. 제가 아니에요…. 제가….」
남자들은 듣지 않고 가말을 짐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이글거리는 태양빛이 쏟아졌다. 빛에 몸이 타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부족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장로가 선고했다.
「첫날밤에 남편을 죽인 죄는 크다. 널 사형에 처한다.」
「아니에요, 제가…!」
가말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럼 누구란 말이냐?」
장로는 가슴이 서늘하도록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말해보아라. 누가 아다위를 죽였느냐? 너와 아다위 밖에 없는 신방에서.」
가말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로는 혀를 찼다.
「우리는 평화와 통합의 상징으로서 널 받아들였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그러더냐? 아다위를 죽여 우리 부족의 대를 끊으라고?」
「아니에요!」
가말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하지만 부족장의 장자인 쿠니스가 아다위를 죽였다고 하면 일은 더 커진다. 부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가말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아다위를 죽였어요.」
「왜냐?」
장로는 일을 틀림없이 하려는 듯 물었다.
「아다위를….」
가말은 천천히 입을 뗐다.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실을 내뱉는 데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다른 남자가 있었더냐?」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아다위를 죽였다고?」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말은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비록 혼인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남편을 제 손으로 죽인 과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하도 처연해 모두 말문이 막혔다.
침묵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장로가 말했다.
「아다위를 만나 사과해라.」
사형집행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하려는 순간이었다.
퍽.
칼이 목을 꿰뚫었다. 가말은 눈을 크게 떴다. 사형집행인은 옆으로 무너졌다.
쿵.
그리고 사형집행인이 사라진 자리에 쿠니스가 서 있었다. 어느새.
그녀처럼 늪에 빠졌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진흙 덩어리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흙을 뒤집어쓰고 눈만 형형하게 빛났다.
발끝에서부터 떨림이 올라와 가말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자신을 묶고 있는 오라를 풀기 위해 팔을 들썩거렸지만 그때는 힘을 쓰는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풀리지 않았다.
쿠니스는 무너지듯이 가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갓 벌레를 보듯 사형집행인을 보던 눈이 애절하게 떨려왔다.
「가말.」
손을 들어 가말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걱정했잖아. 내가 한순간 화가 나서…. 미안해. 정말로. 용서해줄 거지, 응?」
가말은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쿠니…!」
한 전사가 뒤에서 검을 후려쳤다.
퍽.
하지만 쿠니스에게 검은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가말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가말은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쿠니스의 눈에 폭발하는 살의를.
가말은 본능적으로 외쳤다.
「안 돼!」
하지만 쿠니스는 손으로 그대로 전사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퍽 소리가 나며 피와 잔해가 튀었다.
터질 듯이 팽창한 눈에 전사가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지는 모습이 비쳤다. 쿠니스는 그대로 말했다.
「마티와 타와가 죽었어.」
「뭐…?」
「네가 아다위를 죽였다고 평화 협상이 결렬됐다면서 찾아가서 모두 죽여 버렸어.」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거짓, 거짓말….」
가말이 이해하고 이해하지 않고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쿠니스는 피 칠갑 한 채 돌아보고 웃었다.
「신이 내게 복수할 힘을 주신 거야.」
「악마! 악마…!」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쿠니스의 전신에 힘과 피에 대한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그만! 쿠니스, 그만…!」
살육이 시작되었다. 가말은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그 가운데 부모를 잃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듯이 입을 벌렸다. 가말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쿠니스는 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가말에게 다가와 가말을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가까워서 그랬겠지만 하필 아다위와의 신방이었던 곳이었다. 시신과 피 묻은 자리는 치워져있었지만 미처 다 치우지 못한 신방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쿠니스는 가말을 꽉 끌어안았다.
「가말. 너무 무서웠어. 한순간 널 잃는 줄 알았어.」
쿠니스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가말은 몸을 돌려 쿠니스를 누르고 목을 졸랐다. 쿠니스는 저항하지 않았다. 애잔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똑같이 해.」
꾸욱….
가말은 계속 손에 힘을 주었다. 쿠니스는 흠칫했다. 가말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힘이 강해진 자신만큼이나.
그제야 그녀가 그와 똑같은 힘을 얻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그냥 붙잡혀있기에 미처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비록 허우적거리긴 했어도 그를 붙잡아 늪으로 끌어들인 건 가말이었다.
「가말… 가말…!」
쿠니스는 숨이 졸린 소리를 터뜨렸다.
「그만해. 가말…! 숨이, 숨이 막혀!」
손의 힘이 약해진 사이 틈을 타서 홱 자세를 반전했다. 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날렸다.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거의 굉음처럼 났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목이 날아갔겠지만 같은 힘을 얻은 가말은 얼굴만 옆으로 돌아갔다.
또 화를 참지 못했다.
쿠니스가 아차 할 새도 없었다. 가말은 홱 그를 보았다. 그러자 쿠니스는 정수리부터 심장까지 관통당한 느낌이었다.
그건 단 한번도 가말에게서 보지 못한, 분노와 독기가 불을 뿜는 눈빛이었다.
가말은 쿠니스를 걷어찼다. 엄청난 힘에 쿠니스는 날아가 벽에 처박히면서 그대로 집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녀를 겁탈하려던 감시인은 정말 살짝 밀어낸 정도에 불과했었던 것이다.
그 찰나를 가말은 놓치지 않았다. 달려나가 시신들 사이에 울고 있는 아이를 낚아채 끌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쿠니스가 잔해들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다.
「가말!」
가말은 다리에 반동을 준 순간 거의 하늘을 날 듯이 엄청난 높이를 훌쩍 뛰어올랐다. 포식자에게 쫓기는 절체절명의 순간 본능에 내재 된 제 능력을 깨닫는 동물처럼.
「가말-----!!!」
뒤쫓아 오는 쿠니스의 울음이 온 천지를 울렸다. 아이는 그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며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고 말았다.
가말은 멈추지 않았다.
***
가말은 언덕 위에서 아이를 내려주고 말했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마을이 있어.」
아이는 울음 때문에 얼굴이 얼룩덜룩했지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였다. 가말은 당부했다.
「멈추지 마.」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멈칫하고 돌아보았다.
「아다위, 가말이 죽이지 않았지?」
이런 어린아이마저 아는 명백한 사실을 아다위의 부족이 알지 못했던 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뛰어.」
아이는 꾹 울음을 참고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