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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26화 (26/110)

26화<쭈니>

가말은 헐레벌떡 마을 어귀를 향해 달려갔다. 언뜻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지나치게 조용했다. 불길함에 심장이 깨질 듯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전부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가말은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마티! 타와!」

집도 반쯤 불타 무너져있었다. 그리고 사방에 마티가 아끼던 그릇, 그녀의 옷을 넣어두던 상자, 자신이 쓰던 액세서리와 카펫, 타와의 의식용 가면까지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있었다.

어디에서도 마티와 타와가 보이지 않았다.

「타와! 마티!」

가말은 실성할 것 같다는 기분이 뭔지 실감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마을에 숨을 쉬고 있는 존재는 없었다.

달리다가 뭔가의 잔해에 걸려 넘어졌다. 평소였다면 무릎이 깨질 정도로 세게.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열이 터져 나왔다.

가말은 풀을 쥐어뜯으며 덫에 걸려 죽어가는 짐승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마티와 타와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안일한 판단이.

부스럭.

소리가 났다. 계속 울음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가말은 흠칫했다. 그녀가 갈 만한 곳을 예상하고 쿠니스가 쫓아온 걸 수도 있었다.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온몸이 후들거렸지만 일어나야만 했다. 도망가야 했다. 그녀를 죽인 살인자, 그러면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위선자….

그녀의 쌍둥이로부터.

***

“오래 돌아다닌 끝에 이 섬을 발견했어. 이곳엔 아무도 없었어. 혼자 살았어. 토라와 라토를 만나기 전까진.”

긴 이야기가 끝났지만 도영은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도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가말은 조용한 눈으로 그를 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난 섬에서 나갈 수 없어.”

옆에 있는 토라는 그런 가말을 안타깝게 보면서 어깨를 안았다.

“마티.”

가말은 괜찮다고 말하듯 토라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 모습을 보는 도영의 가슴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폭풍우 쳤다.

걸음을 잘못 디뎌 수렁으로 떨어진 순간 더 깊은 수렁으로밖에 빠질 수 없었던 이 여자의 삶에 대한 연민, 분노, 슬픔, 답답함, 어느 것이 먼저인지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휘몰아쳤다.

도영은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일단,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눈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한때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국제 테러리스트 네트워크 수괴의 혈육이라는 데 놀라야 할지….

아니면 대공이 제 형제에게, 그것도 쌍둥이에게 품은,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나르시스트적인 근친상간 애에 놀라야 할지.

혹은 차라리 자신이 사라지겠다며 수천 년간 외딴섬에 숨어 산 이 얼간이의 바위산급 인내심에 놀라야 할지.

“도영…?”

도영이 아무 말이 없자 가말은 불안해하는 어조로 불렀다. 도영은 겨우 자신을 다스리고 손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 대공은 감옥에 있잖아. 그래도 나갈 수 없다는 이유는 뭐야?”

가말은 의아한 눈을 했다.

“감옥에…?”

이건 무슨 반응인가 싶어 도영도 의아한 눈을 했다.

“3년 전에 체포돼서 감옥에 갇혀 있잖아.”

“뭐?”

도영은 기가 찼다.

“설마 모른다고 하지 마.”

가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도영을 쳐다보았다. 도영은 정말 모르는 건가 싶어 말했다.

“대공은 보석과 감형 없는 78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야.”

“그 말은….”

“적어도 780년 동안 녀석이 감옥 밖을 나오는 일은 없다는 의미지.”

가말은 뜻밖의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가 겨우 물었다.

“그럼 쿠니스가 날 쫓아오지 않아…?”

그렇게 묻는 어조에서 얼마나 그 사실을 두려워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도영은 거의 화가 났다.

“정말 그거 때문에 이 섬에서 나가지 않은 거라고? 이 오랫동안?”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토라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라토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습니다.”

“번갈아서 밖으로 나간다며?”

도영이 묻자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는 계속 라토가 밖으로 다녔습니다. 전 원래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언젠가부터 라토가 자원해서 그러라 했죠.”

토라는 나직하게 말했다.

“마티, 라토를 찾아야 할 거 같아. 느낌이 좋지 않아.”

***

도영과 가말은 해변에 서 있었다. 저 멀리 모터라도 달아놓은 듯이 토라가 빠르게 헤엄쳐오고 있었다. 교본으로 써도 될 만큼 완벽한 자유형 자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라는 해변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젖은 개처럼 고개를 저어 물을 털어냈다.

“타와 말이 맞아. 대공은 3년 전 MCTC 특수부대에게 체포돼서 ICC(국제형사재판소)에서 780년형을 선고받았어.”

가말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럼 정말….”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의 미저리 같은 쌍둥이는 감옥에 있어. 마티, 이제 섬을 나가도 돼.”

가말은 살짝 현기증이 나 토라의 팔을 잡았다. 토라는 가말을 부축한 채로 도영을 보았다.

“타와도 말이죠.”

도영은 팔짱을 풀었다.

“종교는 믿지 않지만 정말 신한테 감사라도 드리고 싶군.”

그리고 가말을 보고 물었다.

“근데 쌍둥이라며? 왜 나이가 달라? 그것만 아니었다면 이미 전에 알아봤을 거야.”

대공의 본명은 극비 사항이라 모를 수 있어도 얼굴만큼은 그렇게 사진을 봐왔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가말과 대공은 표정이나 풍기는 느낌 자체가 너무 달랐고, 대공 녀석의 형제가 살아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토라가 말했다.

“꽃을 먹고 사는 루아스는 나이를 먹습니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부작용이 보고된 바는….”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만큼 오래 꽃을 먹은 루아스가 있겠습니까? 저만해도 계속 꽃을 먹고 살아왔지만 처음 감염되었을 때와 똑같습니다. 아주 느리게 노화가 진행되는 겁니다.”

도영은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어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았다.

“피를 마시지 않고 나이를 먹고 햇빛 아래 돌아다닐 수 있는 게 무슨 뱀파이어야?”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지도 모르죠. 우리는 그저 다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종은 진화를 거치죠. 이게 당신 문명 세계 사람들이 마시는 사람, ‘호모 비벤스’라고 부르는 우리 종의 진화 과정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영원히 살다가 나이를 먹어가는 쪽으로 진화하는 건 말이 안 돼. 그건 퇴화에 가깝지.”

“영원히 산다는 게 진짜 궁극적인 진화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게 아닐까요? 영원한 삶을 줬지만 정말 영원히 사는 개체는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토라는 가말을 보았다. 도영도 그녀를 보았다.

가말은 두 사람이 하는 대화가 너무 빠르고 어려운 단어가 많아서 전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섬에서만 살아온 그녀가 굳이 현대 언어를 배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토라는 괜찮다는 듯이 가말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마티와 그 미저리 쌍둥이만 해도 엄청나게 오래 산 루아스로 분류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외로워하는 존재라는 걸, 외계에서 온 X는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거겠죠.”

토라는 도영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X는 몰랐겠죠. 본래 인간이었던 존재에게 영생이란 돼지 목의 진주일 뿐이라는 걸.”

도영은 아무런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토라는 가말에게 물었다.

“마티, 준비됐어?”

가말은 아직도 주저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토라는 허리춤에서 그 작은 천 어디에 넣어온 건지 미스터리한 무전기를 꺼냈다.

오래된 모델이었지만 너무 제대로 된 무전기라 이상할 지경이었다. 도영은 무전기를 건네받았다. 그 모습을 가말이 지켜보았다.

“도영….”

***

헬기의 블레이드가 일으키는 바람에 모래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해변에 서 있는 도영은 눈을 찡그렸다.

마침내 해변에 헬기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무장한 군인들이 내렸다. 개중 한 군인이 소리 높여 물었다.

“도영 드페르 소령님이십니까?”

“맞습니다.”

도영이 대답하자 군인은 총구를 내리고 다가왔다.

“용케 살아계셨군요. 신호를 받고 모두 뒤집어 졌습니다.”

꼼짝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다들 어떤 반응이었을지 상상이 됐다.

도영은 물었다.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구출되었습니다. DUSTWUN(실종자, Duty Status Whereabouts Unknown)은 소령님이 마지막입니다.”

도영은 안도했다. 폭탄이 터지면서 의식을 잃고 헤어졌기 때문에 팀원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말은 그 모습을 풀숲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장한 남자들과 대화하는 도영이 낯설어 보였다. 정말 ‘문명 세계의 사람’ 같아서 멀게 느껴졌다.

그때 도영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가말.”

가말은 움찔했다.

“괜찮아. 나와.”

가말은 옆에 있는 토라를 보았다.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가말은 일어나 천천히 수풀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토라가 따랐다. 하지만 군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가말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가말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도영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말의 손을 잡아끌어 헬기로 다가갔다.

헬기 승무원이 가말이 오르게 도와주고, 도영도 이어서 헬기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토라가 올랐다.

시선이 마주치자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토를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토라는 그렇게 말했다.

도영은 창밖을 보았다. 신이 떠나는 사타디 섬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거대한 군용 함선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시추선 같았다. 함선이 금세 가까워졌다.

“착륙합니다.”

조종사가 말했다.

수송기가 함선에 내리자 소리를 내면서 램프도어(화물 적재문)가 내려가고, 점차 벌어지는 틈새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영은 램프도어를 통해 내려섰다.

무인도에서 볼 때나 함선 위에 서서 볼 때나 같은 바다였지만 냄새가 달랐다. 기름과 철, 엔진이 뿜어내는 수증기의 냄새가 그가 정말 문명 세계에 돌아왔음을 알려주었다.

“소령님!”

저 멀리서 외침이 울렸다. 한 중사를 필두로 1팀 대원들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팀원들은 오자마자 도영이 말할 새도 주지 않고 그를 둘러싼 채로 마구 말을 쏟아냈다.

“소령님 정말 살아계신 겁니까?”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으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였다.

“도영 드페르!”

팀원들을 헤치고 니콜라가 나타났다. 도영은 놀랐다.

“네가 어떻게….”

같은 MCTC지만 소속이 다른 친구 니콜라는 이 함선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니콜라는 도영을 부둥켜안았다.

“이 개자식!”

황당함이 가시자 도영은 자신이 정말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어.”

니콜라는 중얼거렸다. 도영은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니콜라는 홱 도영을 밀쳤다.

“테러리스트한테 붙잡혀서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져 실종됐는데? 네가 무슨 루아스라도 되는줄…!”

갑자기 니콜라는 도영 뒤쪽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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