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27화 (27/110)

27화<쭈니>

니콜라는 홱 도영을 밀쳤다.

“테러리스트한테 붙잡혀서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져 실종됐는데? 네가 무슨 루아스라도 되는줄…!”

갑자기 니콜라는 도영 뒤쪽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도영도 뒤를 돌아보았다.

“가말.”

부르자 가말은 천천히 햇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주변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도영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익숙해지기도 했고 가말이 좀 또라이인 걸 알고 있어서 가끔 잊고 지내지만 그녀는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웠으니까.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쳐다보자 가말은 겁먹은 아이처럼 옆에 있는 토라 뒤로 몸을 숨겼다.

“이분은…?”

한 중사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슬며시 물었다.

“루아스… 아닙니까?”

그리고 한 중사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쪽은…?”

토라도 급한 대로 옷을 빌려 입어서 이쪽 기준으로는 남우세스러운 원주민 차림은 아니었지만 알다시피 그는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다가 옆에 서 있는 여군을 꼭 해파리를 처음 본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여군이 압도되어 주춤거렸지만 토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소장님을 봬야겠습니다. 오고 계십니까?”

도영은 말하고 걸어갔다. 하지만 가말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시선을 빼앗겨 따라오지 않자 돌아보고 말했다.

“가말, 이리 와.”

가말은 정신을 차리고 조르르 도영을 쫓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왠지 한 마음처럼 ‘뭔가 닮았는데.’ 하고 생각했다.

도영은 오지 않는 토라에게 말했다.

“토라, 너도.”

토라는 그제야 어슬렁거리며 따라갔다. 니콜라는 황당해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대체 뭘 주워온 거야?”

***

“바깥의 옷은 오랜만이군요.”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토라가 방 밖으로 나왔다.

브레이드가 섞인 머리카락은 한 갈래로 묶어서 그냥 좀 보헤미안적인 패션 감각을 가진, 원주민 핏줄을 지닌 사람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쪽의 옷을 입으니 몸속에 흐르는 반 백인의 핏줄이 발현되는지 묘하게 섬에 있을 때보다 서양인의 느낌이 났다.

“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영은 토라에게 커피 잔을 내밀었다.

“문명의 맛.”

도영도 샤워를 하고 마침내 마르고 닳도록 입은 전투복을 벗고 새 군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토라는 잔을 받아 건배하듯 한 번 들어 올렸다.

“타와는 역시 군복이 어울리는군요.”

묘하지만 도영은 토라와 반대로 섬에 있는 동안 피부가 타서 더 야생적인 느낌이 났다.

“여기서는 타와라고 부르지 마.”

“타와를 타와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릅니까? 혹시 우리 마티와의 관계가 부끄럽습니까?”

도영은 무심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일이 복잡해지는 게 싫을 뿐이야.”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한 노력일 텐데요.”

도영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말….”

궁금해지는데 그때 다른 쪽 문이 열리고 가말이 나왔다.

급한 대로 사이즈가 맞는 여군에게 빌린, 옷깃에 흰 선이 들어간 남색 테니스 원피스에 흰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깜찍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신기해.”

가말은 제 원피스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뭐가?”

“안 입은 거 같아. 가벼워.”

토라와 라토가 바깥세상에 다녀오면서 요즘엔 이런 옷들을 입는다고 몇 개 가져오긴 했지만, 그 중에 이렇게 예쁜 건 없었다.

“우리 마티도 여자라는 걸 잊고 있었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사다 줄 걸 그랬어.”

갑자기 도영은 가말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아이 러브 뉴욕 티셔츠가 누구 작품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토라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근데 누굴 기다리는 거야?”

“높은 사람.”

도영이 대답한 순간이었다.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한 군인이 각 잡힌 자세로 들어왔다. 그러자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말은 그런 도영을 의아하게 보았다. 그때 군인이 비켜선 문 너머에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짧게 친 화려한 금발. 붉은 눈.

뱀파이어였다.

“뱀….”

가말은 흠칫하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영은 살짝 손을 내밀어 가말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그리고 도영은 금발의 뱀파이어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소장님을 뵙습니다.”

MCTC 중앙근위사단의 사단장 알렉스 야크트훈트 소장의 붉은 눈이 가말을 보았다. 가말은 긴장했다. 토라와 라토 외에 뱀파이어를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특히 이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는 뱀파이어는.

외모는 이십 대 중후반쯤으로 사단장이라는 직위가 위화감이 들 정도였지만 가말을 지그시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에는 오래 묵은 것들이 내뿜는 기묘한 연륜이 침잠된 납처럼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나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게 베일 듯이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오히려 공주가 뒤처져 보일 아름다움이라 왕자님으로서의 자격이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마침내 렉스는 입을 열고 말했다. 난생 처음 듣는 언어로.

“……?”

도영은 의아해하고 가말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건….”

토라도 놀란 얼굴이었다.

가말은 얼른 렉스가 쓴 것과 같은 언어로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렉스가 말할수록 가말은 더 놀랐다.

도영은 답을 요구하며 토라를 보았다. 그러자 토라는 고개를 기울이고 작게 말했다.

“고대 사타디어야. 완전하진 않지만 나보다는 잘해.”

도영은 다시 둘을 보았다. 렉스가 이야기하는 중간에 본인 이야기를 하는지 ‘알렉’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가말이 렉스에게 뛰어가 안겼다. 도영은 움찔했지만 자리를 지켰고, 렉스는 가말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가말의 어깨에 올린 손에 결혼반지가 빛났다.

“일단 앉죠.”

렉스는 팔을 풀고 드디어 도영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했다. 가말은 좀 진정한 듯 원래 자리에 와 앉았다. 렉스도 자리에 앉아 말했다.

“수고가 많았습니다, 소령.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군요. 소식을 듣고 강 소위도 급하게 오고있는 중입니다.”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가말과 아는 사이입니까?”

처음에는 렉스가 뱀파이어라는 데 가말이 놀랐으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인연이 있어 보였다.

렉스는 가볍게 양손을 깍지 껴 책상에 올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 이 방을 나가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가말은 코드네임 ‘대공’, 현재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바로 기원전 14세기경 아나톨리아 서부 아와르나 일대를 지배했던 룩카 연합의 사타디 부족 출신인 쿠니스라는 인물의 형제입니다.”

그건 도영도 아는 사실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알게 됐을 뿐, 군 내부에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부에서는 어느 정도 대공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랬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지만, 이제 정말 모든 게 분명해졌다.

가말이 그 대공의 형제라는 것, 기원전 14세기에 태어났다는 것, 대공을 피해 오랜 세월을 숨어 살아왔다는 것.

도영은 제 앞에 앉아있는 가말의 둥그런 볼을 보았다.

가말이 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오히려 어느 정도 과장이 있었으면 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는 데 가슴 속에서 뜨겁고 어두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이건 대공에 대한 살의였다. 지켜줘도 부족할 제 혈육을 목 졸라 죽였을 뿐 아니라 아직도 자신이 빠뜨린 수렁에서 올라올 수 없도록 끌어내리고 있는, 참교육이 필요한 그 개자식에 대한 살의.

그사이에 렉스가 계속 말했다.

“사타디는 룩카 연합 내에서도 꽤 유력한 부족이었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기록에 ‘사타디’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했다고 합니다.”

“증언이요?”

역사 수업을 꽤 열심히 들었지만 ‘사타디’라는 이름은 스쳐 지나가기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당대에 기록을 봤던 사람들이라고 해야겠군요. 사타디에 관련된 기록은 전부 소실됐지만 옛날에 사타디에 관련된 기록을 봤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몇 있었습니다.”

가말은 슬퍼졌다. 사타디에 관한 기록이 남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부족 간의 싸움으로 멸족했기 때문이다.

그때 렉스가 여전히 무심하지만 조금은 온기가 감도는 눈으로 가말을 보았다.

“그리고 가말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플로스 꽃을 전달한 사람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에게’라는 건….”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이바노프 클랜에게.”

그때 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부터는 내가 이야기하지.”

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니트 티에 얇은 코트를 걸친 평범한 차림을 했고 렉스보다 명암이 좀 더 낮은 금발을 지녔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불순물 하나 없이 ‘붉은색’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눈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어도 압도적인 기백이 느껴졌다.

렉스가 속한 이바노프 클랜의 수장, 이반 이바노프였다.

누구보다 가말이 먼저 반응해 벌떡 일어났다.

“알렉!”

도영은 의아했다.

‘알렉?’

렉스가 아니라 이반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가말이 그가 서울 지부에 있을 시절 국장이었던 제 옛 상사를 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애칭으로 부르는 사이냐?’

도영은 기가 찼다.

“살아있었어….”

가말은 이반을 훑어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야말로. 하도 소식이 들리지 않아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오랜 친우였던 노인들이 회우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말은 원피스 자락을 꾹 잡고 말했다.

“살았어, 섬에.”

“오면서 들었어. 대공 녀석이 찾아내지 못할 만했군.”

그때 가말은 이반 뒤에 서 있는 동양인 여자를 발견했다.

풀면 가슴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었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눈동자가 맑았다. 십대 후반의 소녀처럼 보이는 데 비해 소위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모습이 희한하게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여자 뱀파이어였다.

“여자….”

가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제외한 여자 뱀파이어를 만난 건 이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가말이 인간이고 뱀파이어고 가리지 않고 피해 다닌 탓도 있었지만 그만큼 여자 뱀파이어는 숫자가 적었다.

“반갑습니다. 강연하 소위입니다.”

연하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반이 덧붙였다.

“안사람이야. 예전에 드페르 소령이 서울 지부에 있었을 때 소령과 한 팀이었고.”

그 말에 가말이 도영을 보자 그는 눈짓으로만 연하와 인사하고 있었다. 연하도 익숙하게 고갯짓으로만 인사를 건넸다. 꼭 둘 사이에 굳이 말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갑자기 가말은 홱 돌아보고 연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연하가 조금 놀랄 정도로.

가말은 물었다.

“알렉의 아내야?”

“네.”

“몇 번째?”

연하가 멈칫하고 순간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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