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쭈니>
가말은 물었다.
“알렉의 아내야?”
“네.”
“몇 번째?”
연하가 멈칫하고 순간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가말은 그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졌다. 이내 연하는 서늘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일단 첫 번째입니다.”
이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연하밖에 없어.”
도영도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적인 상식이 거의 없는 고대유물이라 그래. 강 소위 네가 이해해라.”
가말은 어리둥절해하며 도영을 돌아보았다.
“뭐가?”
“현대엔 그렇게 묻는 게 실례야.”
도영이 기가 차서 말하자 가말은 억울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알렉은….”
그 타이밍에 이반이 손을 들고 말했다.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앉지.”
이 자리에서 가장 웃어른이 말한 듯이 모두 별말 없이 착석했다. 사실 나이상으로 이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는 가말이었지만 혹시 가말이 그 사실을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것이다.
“좀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군.”
이반은 말했다.
“이천 년 전쯤이었을 거야. 내가 감염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지. 가말과 난 우연히 마주쳤어.”
***
이반은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숲을 헤치고.
숲은 어둡고 침울했다. 이런 깊은 곳까지 올 인간은 없을 것이다.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드는 이런 깊고 울창한 숲은 공포를 주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반은 더 깊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누군가의 공포가 될지언정 그에게 공포를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다 들려.”
벌써 이틀째 기척이 따라다녔다. 딱히 살의는 없었고 적당히 지켜보다 사라지겠지 싶어서 그냥 내버려 뒀는데 꽤나 끈질겼다.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덤불이 미미하게 움직이더니 가느다란 인영 하나가 걸어 나왔다.
경계심이 형형한 붉은 눈이 허공에 잔영을 남기듯이 천천히 움직였다. 많아야 열여덟쯤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였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진귀한 것들을 보아온 이반의 눈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치외법권으로 달아난 범죄자처럼 넝마를 걸친 꼴은 이상했지만 이미 그 미모만으로도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이미 주인이 있는 곳인지 몰랐군.”
이반은 라틴어로 말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이반을 위아래로 보더니 물었다.
“너도… ‘달라’?”
여자는 말투가 이상했다. 라틴어를 후천적으로 익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반은 여자가 뭘 묻는지 눈치채고 말했다.
“그쪽도 인간 같진 않은데.”
그때는 뱀파이어를 이르는 특정한 이름이 없었다. 사실 이반도 가말도 자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뭔가 ‘다르다’ 정도밖에.
가말은 이상하단 투로 물었다.
“근데 왜 공격하지 않아?”
이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자신이 놓친 게 있냐는 듯이.
“길 가다 마주친 사람한테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다른 ‘다른 것’들은 사나워.”
“제 영역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게 있는 모양이더군. 하지만 보다시피 이쪽도 헤매는 쪽이라.”
하지만 가말은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반은 가말이 그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돌아섰다.
“실례하지.”
몇 걸음 가는데 가말이 말했다.
“잠깐.”
서로 알진 못했지만 가말과 이반 둘 다 사람하고 대화한 지 꽤 오래된 상태였다.
가말은 숨어 살던 마을을 쿠니스에게 들킨 후 이 숲속으로 도망쳐와 혼자 지낸 지 5년쯤 되었고, 이반은 감염된 이후 자신이 무엇이 되어버렸는지 찾아 한 번도 정착지를 둔 적 없이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다.
가말은 이반이 숲에 들어온 이후 쭉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쿠니스가 보낸 사람일지도 몰라서.
하지만 이반은 계속 혼자였다. 그런 ‘척’을 하는 걸 수도 있지만 사실 이반을 처음 본 순간 깨달았다. 그는 쿠니스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수수한 여행자의 차림을 하고 있지만 갑옷이 더 잘 어울리는 제왕적인 패기를 내뿜는 늠름한 자태는 누구도 부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가말은 말했다.
“밥 먹고 가.”
***
의외로 가말이 내놓은 건 인간의 음식이었다.
이스트 없이 구운 간단한 빵과 토끼 고기를 넣은 스튜 정도였지만 제법 맛있었다. 오랫동안 원정을 다녔던 이반이 전쟁터에서 먹은 음식도 이것보다는 구성이 좋았으나 이제 그는 음식에 관해서는 불평하지 않게 되었다.
점심만 먹고 갈 생각이었지만 숲은 워낙 빨리 어두워지는 곳이었다. 뱀파이어인 그들이 어둠 속에 나간다고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어둡고 축축한 밤의 숲을 헤매고 다니는 건 역시 그리 선호하는 일은 아니었다.
사냥할 때를 제외하면.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타오르는 장작불과 포근한 잠자리를 더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가말도 특별히 당장 가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반은 그냥 그대로 하룻밤 눌러앉았다.
“언제 달라졌어?”
모닥불 가에 앉아 이반은 물었다.
“오래전.”
가말은 그렇게 대답하고 이반을 위아래로 훑었다.
“넌 어려.”
그때 이반은 삼백오십 살이 채 되지 않았다. 눈도 붉어지기 전이었다.
이반은 웃어버렸다.
“누군가에게 어리다는 소리를 듣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것도 나이가 들지 않는 데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외모로는 열여덟밖에 먹지 않은 가말에게 듣자니 기가 찰 정도였다.
“눈이 붉어질 거야, 곧.”
가말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이반은 가말을 보았다. 앞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붉고 선명한 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눈은 어쩌다….”
“어느 날 눈을 뜨니까 변해있었어. 오래 살면 변해. 오래 산 ‘다른 것’들은 다 그랬어.”
“가뜩이나 눈에 띄는데 더 띄겠군.”
이반은 중얼거렸다. 거의 포기한 어조였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열었던 연회에서 쓰러져 나흘간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다른 생물이 되어있었다.
결코 인간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그는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삶에서 퇴출당하다시피 황야를 맴돌게 되었다.
오랫동안 자신이 뭐가 돼버렸는지 답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답은 찾지 못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반은 물었다.
“그 눈 때문에 숲에 숨어 사는 거야?”
아무래도 붉은 눈은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알비노가 있긴 하지만 이때는 알비노 같은 ‘평범하지 않음’도 만만치 않게 눈에 띌 때였다.
하지만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가말은 자신이 영원히 숨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이 가장 닫혀있을 때여서 거의 자폐 상태에 가까웠다.
이반은 어깨를 으쓱이고 더 묻지 않았다. 정적 가운데 장작불이 타올랐다.
순간 이반이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기침했다. 몇 번 기침하고 나자 손바닥에 피가 묻어나왔다. 별로 놀라울 건 없었다. 오랫동안 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를 오래 마시지 않았어?”
가말이 그 모습을 보고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이반은 무심히 제 손에 고인 피를 닦아냈다.
“보름 정도 마시지 않으면 피를 토하더군.”
“장기가 다치는 거야.”
“잘 아네.”
꼭 그쪽도 오래 피를 마시지 않아본 것처럼.
이반은 피로 얼룩덜룩한 제 손을 보았다. 밖에서는 제국이 일어섰다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며 흥망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자신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말이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먹어.”
이반은 의아했다.
“꽃?”
가말이 주머니에서 꺼내 내민 건 꼭 자기 눈 같은 색을 지닌 붉은 꽃이었다.
이반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생 꽃을 씹는 취미는….”
하지만 가말은 꽃을 이반의 입에다가 밀어붙이면서 재차 말했다.
“먹어.”
이반은 기가 찼다. 일찍이 그에게 이런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별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서 꽃을 가져다가 끓고 있는 스프에다가 뜯어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가말이 팔을 덥석 쥐었다.
“타.”
그러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타면 소용없어.”
“뭐가?”
“목이 마르지?”
갑자기 다른 여자가 된 듯이 눈에 현요한 빛이 어렸다. 이반이 지닌 갈증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뭘 해도 그 목마름이 사라지지 않아.”
가말은 갑자기 원래 눈빛으로 돌아와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걸 먹으면 나아. 충분하진 않아. 곧 배가 고파. 그래도 나아.”
이반은 꽃을 보았다. 꼭 피 같은 색이었다. 그도 피를 대신해서 먹을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같은 ‘다른 것’들은 꼭 피를 마셔야만 했다.
속는 셈치고 입에 넣고 씹었다. 들큼한 풀 맛이 올라왔다. 그는 인간이었을 때도 풀보다 술과 고기가 더 입에 맞는 육식파였기 때문에 그리 유쾌한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 씹으면 씹을수록 묘한 맛이 느껴졌다.
씁쓸한 풀 맛이면서도 피처럼 달고 향긋한….
이반은 가말이 발치에 놓아둔 꽃 주머니를 보았다.
“이런 식물은 본 적 없어.”
“여긴 안 자라. 높은 산에 가야 돼.”
“넌 이런 게 어디서 났어?”
“하늘에 닿는 산.”
이반은 의아해졌다.
“그런 곳엔 왜 갔어?”
“피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은 투였다.
“뭘?”
가말은 눈을 들었다.
타닥, 타닥.
장작불이 제 몸을 일그러뜨리며 전위적인 춤을 추었다. 만약 그때 훗날 알게 되는 동화를 봤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불이 마치 붉은 구두를 신은 카렌 같다고.
“나쁜 꿈.”
***
이 숲으로 오기 전 가말은 쿠니스를 피해 산으로 갔다.
산은 높고 눈으로 뒤덮여있었다. 무작정 높은 산을 찾아 올라갔기 때문에 그게 안데스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만년설의 추위는 주변 온도에 민감하지 않은 뱀파이어의 살갗마저 태우듯이 파고들었다. 지나친 추위는 춥다기보다 오히려 손끝, 발끝에 하얀 불꽃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파사삭.
눈조차도 얼어 발밑에서 깨졌다. 그리고 건조한 눈발이 하얗게 휘날리는 시야에,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레바스였다. 마치 거인이 초승달을 무기 삼아 내려쳐 지구의 표면에 상처를 낸 깊은 계곡 같은.
조금이라도 지낼 만한 곳을 찾아 가말은 크레바스 속으로 내려갔다.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런 곳을 탐험하려는 정신 나간 사람은, 훗날 안데스에서 인류 최초로 꽃을 발견해서 플로스를 개발하는 마리에테 블란두스 박사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말은 단지 지낼 만한 공간을 찾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예민한 후각에, 어느 지점에서부터인가 무슨 향기가 났다.
가말은 본능적으로 그 향기를 따라갔다. 분명히 피 냄새는 아닌데 왠지 피 냄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크레바스가 깊어지면서 눈과 얼음도 미치지 못해 평범한 흙이 드러났다. 점차 지구 내핵에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꼭 ‘잃어버린 세계’라도 등장할 것 같았다.
그리고 가말은 발견했다. 붉은 꽃들이 수없이 피어있는 광경을.
가말이 한국의 설화에 대해 알았더라면 서천꽃밭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난생처음 보는 기묘한 꽃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멀리까지 이어졌다.
가말은 홀린 듯이 꽃으로 다가갔다. 하나 꺾어 자세히 보았지만 역시 난생처음 보는 종류였다. 숲과 산을 돌아다니며 살면서 식물에는 빠삭해졌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맛있는 냄새….」
굶주림에 자기도 모르게 꽃을 씹었다.
묘한 맛이었다. 풀 특유의 쌉싸름하면서도 이상한 단맛이 있었다. 꼭꼭 씹으면 피 같은 맛이 났다.
가말은 어느새 허겁지겁 꽃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이 가말이 ‘꽃’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한동안 그 동굴에 있었지만, 그곳은 뱀파이어의 육체 능력으로도 살 만한 곳은 되지 못했다. 식량은 풍부했지만, 너무 추웠고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동물마저. 곧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낮이면 빛과 눈, 침묵, 밤이면 어둠과 눈, 침묵뿐이었다.
결국 가말은 꽃을 최대한 챙겨 산을 내려 왔다.
***
“나쁜 꿈?”
이반이 묻자 가말은 일어났다.
“자.”
그러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이반을 처음 보았을 때, 마치 제단에서 걸어 내려온 마르스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줄 마르스는 없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뿐이었다.
가말은 꾹 눈을 감았다.
“떠나.”
갑자기 가말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