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29화 (29/110)

29화<쭈니>

“떠나.”

갑자기 가말이 말했다.

이반은 놀라지 않았다. ‘다른 것’들은 타인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혼자서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인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적어도 가말은 그렇진 않았지만 이기적이었다.

벌써 보름이나 곁에 있게 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이반은 미련 없이 제 짐을 챙겨 일어났다.

“잘 있다가 가.”

가말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자.”

받아서 들여다보니 꽃이었다. 그녀가 가진 게 전부 들어있는 것 같은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이반은 물었다.

“죽을 셈이야?”

“아니. 난 죽지 않아.”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언하는 투였다.

“마티와 타와를 만날 자격이 없으니까.”

모르는 단어였지만 눈치껏 부모님 정도겠구나 알았다.

이반은 큰 결심을 한 듯이 결연한 얼굴을 한 가말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너 누구한테 쫓기고 있지?”

가말은 움찔했다.

그 정도는 이미 예전에 눈치챘다. 가말은 도망자가 보이는 모든 언행을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 쫓기는 범죄자는 아닌 게, 숲을 지나가는 기척이 인간이나 공식적인 제복을 갖춰 입은 군인이면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개인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내 아내가 되면 널 보호해주지.”

갑자기 가말이 여자로 보였다기보다 이렇게까지 말이 통하는 ‘다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가말은 이반을 보았다. 그 눈은 짙은 절망에 잠겨 절망하기도 절망해버린 듯 깊고 어두웠다.

“그럼 넌 죽어.”

그러고는 가말은 돌아섰다.

“약속해. 날 찾지 마. 그 사람은 널 찾아낼 거야. 그리고 날 찾아내겠지.”

“너도 생각보다 세상을 어렵게 사는군. 그냥 그 녀석을 죽이면 편해질 텐데.”

“삶을 거두는 건 신의 일이야. 신의 일을 사람이 하려고 하면 신은 벌을 내려.”

이반은 꽃 주머니를 보았다.

“벌은 이미 충분히 받지 않았어?”

둘 다 이 꼴이 된 순간에 말이다.

어쨌든 상대는 제 제안을 거절했고 더 꾸물거리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반은 말하고 돌아섰다.

“행운을 빌어.”

가말은 순간 발작적으로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이반의 등을 쳐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이반은 돌아보았다. 가말은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꼭 버려지는 강아지 같았다.

“알렉산드로스.”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본명이었지만 왠지 괜찮겠지 싶었다.

가말은 허공을 쳐다보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머지않은 과거에 그런 이름을 가진 왕이 있었는데….

그녀는 쿠니스를 피해 인기척이 없는 곳을 골라 숨어 다니느라 세상 소식에 어두운 편이었다. 하지만 그 왕은 거의 세상을 전부 정복할 것처럼 여기저기서 시끄러웠던 터라 기억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마 젊어서 요절한 걸로 알고 있었다. 아마 서른 즈음에….

가말은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반을 보았다.

아아, 그렇구나.

그도 버려진 것이다, 자신이 알았고 당연시 여기던 삶에서. 그녀가 그랬고, 많은 ‘다른 것’들이 그랬듯이.

“넌?”

이반은 물었다. 가말은 돌아서며 말했다.

“가말.”

그러고는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이반은 피식 웃고 돌아섰다. 어쩐지 조만간 또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리고 가말을 만나는 건 지금이 처음입니다.”

이반은 이야기를 끝냈다. 하지만 모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반이 가말을 보고 물었다.

“계속 섬에서 살았다고?”

“맞아. 하지만 아니야. 동굴에서 잠들었어. 태풍이 날 깨웠어.”

이반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말투는 여전하군.”

“이제 라틴어는 잘해. 하지만 현대 언어는 좀 어려워. 근데… 정말로 쿠니스가 감옥에 있어?”

“맞아.”

가말은 잠깐 말이 없다가 물었다.

“다쳤어?”

도영의 이마 한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적어도 토라는 그게 상당히 불편한 심기의 표현이라고 알았다.

가말이 그런 걸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나쁜 것이리라.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렉스가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하지만 대공이 테러단체를 운영하면서 낸 사상자만 해도 두 손가락으로 세기 어렵습니다.”

렉스가 덧붙이자 가말은 꼭 자신이 그런 것처럼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쿠니스가 한 일은… 들었어.”

훗날 이반은 쿠니스를 마주쳤을 때 가말이 피해 다녔던 ‘나쁜 꿈’이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가말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못돼먹기 그지없어서, 이 녀석이 가말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이라는 걸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혼자 스무고개 할 필요도 없이 그 녀석이 제 입으로 말했으니까.

“너 엄청 오래 살았네. 그럼 혹시 나랑 똑같이 생긴 여자 뱀파이어 본 적 없어? 이름은 가말이야.”

이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네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녀석이 멀쩡해진 건 아니었어. 오히려 널 찾겠다고 더 들쑤시고 다녔지. 그 과정에서 세를 불리더니 테러리스트 수괴 노릇을 하더군.”

“난….”

가말은 우물거렸다.

“그건 마티 잘못이 아닙니다.”

토라가 성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마티는 그때 마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겁니다. 설마 그때 마티가 죽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냐. 숨기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어야 한다는 의미야.”

이반 대신 도영이 한심하단 투로 말했다. 그러자 토라는 언제 목에 핏대를 세웠던 사람이라는 양 간단히 납득했다.

“그건 그렇지.”

“아무도 말려들지 않게 하려고 한 거겠지만.”

도영이 무심히 말하자 가말은 제 마음을 알아준 데 감동 받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도영.”

그러자 토라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도영을 보았다가 가말을 보았다. 뭔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것처럼. 도영은 괜한 말을 했다 싶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일단 좀 쉬는 게 좋겠습니다.”

렉스가 말했다.

“방을 내드리죠.”

연하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나갔다. 어딘지 화가 난 몸짓이라 가말은 어리둥절해했고, 이반은 한숨을 내쉬고 따라 나갔다.

밖에서 얼핏 소리가 들렸다.

“렉스도 만나기 전 이야기야.”

“알아요.”

안다고 말은 하지만 연하는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누구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얼마나 많은 여자들한테….”

“가말이 유일했어.”

갑자기 가말이 연하를 붙잡고 말했다.

“그때 알렉은 외로웠어. 그게 다야.”

연하는 가말을 보았다.

“알렉이 아니에요. 이반이에요.”

가말은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반.”

연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나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가말을 보았다.

“그런데 왜 반말해요?”

가말은 멀뚱히 연하를 보았다.

“나 나이 많아.”

“그래도 초면에….”

“그럼 너도 해.”

가말이 말하자 연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는 것이다.

“그래, 그럼.”

도영은 눈을 굴렸다.

“얼간이들.”

그러고는 걸음을 돌리자 가말이 연하에게 말하고 헐레벌떡 도영을 따랐다.

“그럼 나중에 봐.”

연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설마 하며 이반을 보았다.

“저거 혹시…?”

“맞는 거 같은데.”

이반도 의외라는 듯이 말하자 연하는 기막혀하는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도영과 가말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소령님 무슨 짓을 한 거야?”

반면 복도를 지나 도영은 갑판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도영은 돌아보더니 가말을 물끄러미 보았다. 장난기가 없는 눈동자였다.

“국장의 아내가 되지 그랬어. 그럼 그 섬에서 지금까지 살 일도 없었을 텐데.”

가말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반은 마르스 같았어.”

도영은 관자놀이 혈관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자식이?’

그때 가말은 고개를 젓더니 진지하게 덧붙였다.

“근데 내 취향 아냐.”

도영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네 취향은 뭔데?”

불어오는 바람에 샤워를 하고 그대로 말린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옷자락이 물결쳤다. 해가 넘어가는 수평선은 진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더 짙어 보이는 잿빛의 푸른 눈동자에 묘한 빛을 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도영은 뱀파이어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지만 한 번도 그가 어떤 뱀파이어보다 약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남자라면 죽지 않을 거라는 묘한 믿음을 주었다.

그게 얼마나 허무한 믿음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도영이 내뿜는 압도적인 생명의 에너지에 가말은 믿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잘생겼으니까.

지금까진 자신도 자신이 이렇게 얼굴을 밝히는지 몰랐다. 란투나 아다위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들에게 그렇게 끌리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잘생긴 걸로 따지자면 거의 비현실적인 렉스나 이반을 따를 사람이 없겠지만 그런 얼음 조각을 깎아놓은 것 같은 아름다움은 그녀의 심금을 울리진 않았다.

“그런 게 있어.”

가말은 웅얼거렸다. 도영은 길게 숨을 내쉬고 팔짱을 풀었다.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배정받은 방에 거의 다다랐는데 아직까지 가말이 따라오고 있기에 돌아보고 물었다.

“왜 따라와?”

“잔다며.”

“그런데?”

가말은 도영을 가리켰다가 자기를 가리키고 말했다.

“우리 같이 자.”

안 그래도 설마 싶었는데 섬에서처럼 할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영은 기가 차 말했다.

“여기선 안 돼.”

“왜?”

가말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남자고 넌 여자니까.”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에는 아니었어?”

“여긴 문명 세계야.”

그제야 둘이 함께 잘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가말은 얼굴이 불퉁해졌다.

“싫어. 도영이랑 잘 거야.”

도영은 손짓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가말은 순순히 따라왔다. 그리고 도영은 어떤 방에 도착해서 말했다.

“들어가.”

가말은 도영이 손짓하는 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자?”

“응.”

그러고는 바깥에 그대로 서 있는 도영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잘 자라.”

도영은 말하고 돌아섰다. 예상대로 가말은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르는 모양인지 건너편에서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줘!

걸어가는 내내 멀리서 그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영은 제게 배정된 방으로 갔다. 그리고 재킷을 벗으려고 하는데 함선을 울리는 쾅 소리가 났다.

도영은 깜짝 놀랐다. 이어서 경고가 터졌다.

삐잉. 삐잉. 삐잉.

멀리서 소란이 일고 사람들이 마구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영의 방문이 열리고 가말이 들이닥치더니 와락 도영을 끌어안았다. 그 힘에 밀려 도영은 휘청하면서 벽에 부딪쳤다.

“너…!”

“도영이랑 잘 거야!”

가말은 동아줄인 양 도영을 붙잡고는 고집스럽게 외쳤다. 문밖에서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 보다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전 함선에 소문이 퍼지는 데는 오늘 저녁이 지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도영은 얼이 빠져 생각했다.

‘하느님 맙소사.’

왜 토라가 ‘괜한 노력일 텐데요.’라고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제어가 안 될 만큼 힘 좋은 미친개가 그밖에 따르지 않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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