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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30화 (30/110)

30화<쭈니>

천지를 울리던 경고는 곧 꺼졌다.

「마티도 많이 적극적이 됐어.」

토라는 흐뭇하게 혼잣말했다.

“네?”

옆에서 갑작스러운 경고음에 놀라고 있던, 그를 방까지 안내해주는 역을 맡은 타오 대위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토라는 타오 대위가 막 소개해준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짧고 확실한 감상평을 말했다.

“닭장 같군.”

저벅….

그때 인기척이 나서 토라는 돌아보았다. 문밖에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짧게 친 검은 커트 머리, 무심한 검은 눈동자, 갑옷처럼 보일 정도로 딱딱해 보이는 군복.

“자인 서머 중위입니다.”

타오 대위가 여자를 소개했다. 자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머’라는 화사한 성이 무색할 정도로 눈빛이 무심하고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타오 대위가 말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서머 중위가 도와드릴 겁니다.”

그보다 감시역이라는 게 더 맞을 것이다. 토라는 깨달았다. 아직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감시를 붙여놓고 지켜보려는 의도라는 걸.

이해는 하지만, 감시자 역할을 할 사람을 잘못 골랐다.

토라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예쁘군.”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고 머리카락이 남자처럼 짧았지만 미모가 감춰지진 않았다. 게다가 동양계 혈통이 섞인 외모는 딱 토라의 취향이었다.

어쨌든 남자란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법이니까.

타오 대위는 움찔했다. 자인이 얼마나 외모에 관한 언급을 싫어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인은 무표정한 얼굴을 풀지 않고 말했다.

“외모에 관한 이야기는 삼가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라는 진짜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왜?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군인에게 외모에 관한 언급은 실례입니다.”

타오 대위는 놀랐다. 자인이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문명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특이사항이 있어서 그래도 총부터 꺼내어 들기 전에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토라는 팔짱을 끼고 흥미롭다는 어조로 물었다.

“군인은 여자가 아닌가?”

자인은 점점 더 무표정해졌다.

“아니라고 봐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여자를 어떻게 여자라고 보지 않아?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그 말에 타오 대위는 뜨악했다.

“서머 중위….”

얼른 자인을 만류하려는데 자인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손님께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군요.”

괜히 자신에게 넘어가는 게 자존심이 상해 툴툴거리는 여자는 몇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거부한 여자는 없었다.

토라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는?”

자인은 앞에 내민 손을 쳐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토라는 싱긋 웃었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자인은 움직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토라는 남들이라면 무안해져 손을 거두었을 시간이 지나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자인은 마침내 뒷짐 진 손을 풀어서 손을 맞잡았다.

토라는 그 손을 꽉 잡았다. 자인의 한쪽 눈썹 위쪽 근육이 살짝 움칫했다. 루아스가 아니라면 모를 정도였지만 토라는 분명히 눈치챘다.

‘그러면 그렇지.’

생각하며 손을 놓고 말했다.

“손이 작네.”

자인은 키가 커서 손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사실 여자치고 큰 편이었다. 하지만 토라에 비해서는 작았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은근히 이런 포인트에 설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인은 서늘하게 말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데는 전혀 문제없죠.”

토라는 ‘저런.’ 하고 웃어버렸다.

***

타오 대위와 자인은 복도를 걸어갔다. 한동안 말이 없던 자인이 갑자기 말했다.

“임무를 변경해달라고 요청하면 변경이 되긴 하는 겁니까?”

“아니.”

자인은 멈춰 서서 타오 대위를 보았다. 살짝 찡그린 채였다. 대위는 ‘뭐?’ 하고 묻듯이 돌아보고는 결백을 주장하는 투로 말했다.

“중위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잖아?”

자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처럼 탐탁지 않은 임무는 처음입니다.”

방에 들어선 순간 조용히 이쪽을 보는 토라를 처음 보고 자인은 말문이 막힌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백인 아버지와 사타디 부족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

같은 혼혈이라도 백인, 흑인, 동양인간의 조합처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혼혈이 아니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합이라 순간 기묘할 정도로 낯설었지만 그만큼 흔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압도적인 힘을 뿜었다.

백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익숙한 느낌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국적인 미가 섞여서, 새로운 예술 사조에 대해 선구자적인 혜안을 가진 예술가가 만들어낸 작품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이 고갱의 뮤즈는 뱀파이어 특유의 얼음장 같은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어서, 신이 ‘이보다 더 독특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으냐?’ 하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자네가 워낙 유능하니 일을 맡긴 거 아니겠어.”

타오 대위는 자인을 달래려는 듯이 말했다.

“별로 위로는 되지 않는군요.”

회의적인 어조였다.

“위로가 되라고 한 게 아니니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야. 워낙 유능한 자네가 필요할 정도로.”

그리고 타오 대위는 그들이 지나온 복도를 돌아보았다.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마. 아직 믿을 수 없는 점이 더 많으니까.”

***

다음 날 아침 자인은 토라가 묵고 있는 방의 문을 보았다. 정말 이번 일은 왠지 모르게 마뜩잖았다.

한숨을 삼키고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아침은….”

말하며 안으로 들어선 자인은 막을 새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왔어?”

토라가 욕실에서 알몸으로, 정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팔에서 등으로 연결되는 문신을 제외하고는 깨끗한 구릿빛 피부를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여기는 시간을 잘 알 수가 없네.”

그러고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지 못한 양 서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자인은 애써 목소리를 억누르고 말했다.

“옷을… 입어주시겠습니까?”

“아, 문명 세계 사람들은 알몸에 민감하지. 섬에서 나온 지 좀 됐더니 잊고 있었어. 다 똑같이 가진 건데 참 유별나.”

그러면서 토라는 자인 앞으로 지나갔다. 이 상황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자인은 애써 삼켰다.

다른 남자였다면 이 시점에서 이미 총으로 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감시 대상을 멋대로 죽일 수도 없는 데다가, 원시 부족 출신인 사람이 알몸 상태로 아무렇지 않았다고 쏴 죽였다고 하면 아무리 좋게 말해도 이쪽이 다름을 포용할 줄 모르는 레드넥(미국 시골의 백인 보수주의자) 같았기 때문이다.

‘저쪽은 여기 문화권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자인은 가까스로 생각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그러나 또 무작정 그렇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게, 토라가 그의 표현으로 ‘문명 세계’라고 부르는 섬 바깥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추행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자인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옷을 찾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토라가 말했다.

“언제는 여자가 아니라며?”

“성추행은 동성 간에도 인정됩니다.”

토라는 애써 정면만 쳐다보고 있는 자인을 돌아보고 위아래로 훑었다.

“내 눈에 그쪽이 남자로 보이진 않는데.”

“…옷이나 입어주시죠.”

자인은 말하기를 포기했다. 어제부터 느끼긴 했지만 대화가 통할 상대 같지 않았다. 그런데 옷을 좀 더 뒤지는 소리가 나더니 토라가 투덜거렸다.

“옷이 마음에 안 들어.”

섬에서는 반은 전라로 살았을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이쪽 패션에 대해 조예가 깊으신가 보군요.”

“가끔 밖에 나오니까.”

“그럼 이곳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이 있단 말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옷은 언제 입으시는 겁니까?”

알몸으로 서 있는 남자와 한방에서 태연하게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나갈 것도 아니었다.

“나가서 다시 사야겠군.”

토라가 말하더니 바지를 입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흘긋 보니 이번에는 막 티셔츠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비인간적으로 발달된 등에 세필로 새긴 듯이 섬세한 문신이 티셔츠 아래로 사라졌다.

그 문신만은 아름답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제 생각을 깨달은 자인은 고개를 젓고 시선을 돌렸다.

***

화면 너머에서 아버지 엘리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무사한 거야?]

“무사해요. 보시다시피 멀쩡하잖아요. 작전이 좀 오래 걸렸을 뿐이에요.”

도영은 말했다.

다행히 부모님에게는 그의 실종 소식이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특수한 상황에서 포로로 잡혀간 만큼 상부는 도영이 죽었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고 가족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도영은 그냥 이대로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건 작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라고 둘 셈이었다.

섬에 표류되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해봤자 괜한 걱정을 끼칠 뿐이니까.

하지만 엘리오는 찡그린 얼굴을 풀지 않았다. 같은 직업 출신인 아버지를 속이기는 항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 이게 조작된 화면 같은 건 아니지?]

도영은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참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저밖에 모를 만한 거 한 가지 물어보세요.”

[우리가 같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 휴가 갔을 때 줄리앙이 불평했던 말이 뭐였어?]

“‘만약 여기서 식인종이 나온다면 너부터 먹으라고 할 거야.’”

그제야 엘리오는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내 아들 맞구나.]

도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일이 있어서 당장 기지를 비우기가 좀 그래요.”

[한 달 반 만에 겨우 돌아온 사람한테 또 바로 일을 시킨다고?]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더 말할 수 없어서 도영은 그냥 웃었다. 엘리오는 탐탁하진 않지만, 한때 같은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때 도영의 어머니 사랑이 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엘리오가 일을 갈 때마다 불안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도 그때는 상대가 ‘인간’이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도영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조만간 집에 갈게요.”

[약속하는 거지?]

“약속해요.”

도영은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문 옆에 앉아있는 가말이 도영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가?”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된다고 했잖아.”

가말은 뚱하게 말했다.

“나도 갈 거야.”

“내가 놀러 가는 줄 알아?”

도영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가말은 그야말로 마이동풍, 말이라고는 통하지 않았다. 뚱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나도 가.”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어젯밤 그들은 함선에서 내려 기지로 왔고, 도영은 바로 오늘부터 밀려있는 많은 일들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가말은 그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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