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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31화 (31/110)

31화<쭈니>

가말은 도영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만 섬에서는 도영이 눈만 부릅떠도 귀를 접고 깨갱거리던 녀석이 어째 밖에 나와서는 더 생떼를 썼다.

“내가 회사원이었으면 정강이 까일 각오라도 하고 데려간다지만 부대엔 민간인이 못 들어가.”

“나 민간인 아냐. 뱀파이어야.”

가말은 황급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까지 써먹을 정도로 절박한 상태였다.

하루종일 도영과 떨어져 있으라니, 그건 가말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영은 기가 찼다.

“분류 방법이 틀렸어. 군인이 아닌 사람은 모두 민간인이야.”

“소령님.”

그때 타오 대위가 나타났다.

“출근하십니까?”

“가능하다면 오늘 안에 말이죠.”

도영이 시니컬하게 말하자 타오 대위가 가말을 보고 말했다.

“가말 씨도 함께 가시죠. 뵙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영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 미친개… 아니, 얘를 말입니까?”

“네.”

타오 대위가 대답하자 가말은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나 부대란 곳에 가?”

반색하는 가말이 강아지 같아 귀여워서 타오 대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대로 모시겠습니다.”

“어서 가.”

가말은 대위가 말을 바꿀까 봐 얼른 앞서갔다. 도영은 그 모습을 봤다가 타오 대위를 돌아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기원전 14세기 인물을 만나는 건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이미 소문이 쫙 났습니다.”

이런 건 숨기려고 해도 잘 숨겨지는 게 아니라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안 가?”

가말이 돌아보고 재촉했다. 그래서 도영은 가면서 타오 대위에게 물었다.

“어디까지요?”

“걱정 마십시오. 원래 군에 접촉하던 라인을 넘어가진 않았습니다. 당분간은 그 선을 지킬 겁니다.”

도영은 생각에 빠졌다. 대공이 붙잡혀있는 상황에서 그 끄나풀들이 아직 가말을 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신중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때 이쪽으로 걸어오는 토라가 보였다. 한 걸음 뒤에는 자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토라가 이쪽을 발견하고 물었다.

“마티, 잘 잤어?”

타오 대위는 토라에게 말했다.

“토라 씨도 가시죠.”

“어딜 말입니까?”

“뵙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토라는 흥미롭다는 얼굴이 되었다.

“절 말이죠.”

그때 도영과 자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영은 알은체했다.

“오랜만이군요.”

“4년 전에 피카딜리 기지에서 마지막으로 뵀죠.”

자인은 말하고 살짝 묵례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도영이 그 난리를 겪고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존경심을 드러냈다.

“운이 좋았죠.”

도영은 별 기색 없이 대답했다. 어딘지 유대가 있어 보이는 둘의 모습을 본 가말이 앞서가려다가 토라를 돌아보고는 얼른 그의 손을 잡고 끌었다.

하지만 토라가 빨리 끌려오지 않자 급해하며 돌아보았다.

“토라, 어서.”

토라는 잡은 손을 밀어주며 말했다.

“가봐.”

가말은 조금 주저하다가 손을 놓고 도영에게로 갔다. 그러자 도영과 대화하던 자인이 자연스럽게 뒤로 오게 되었다.

토라는 도영과 함께 가는 가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의 마티를 떠나보내는 기분이 묘하네.”

마티는 어머니라는 의미라고 들었다. 자인은 말했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혈육 관계는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나와 라토를 낳은 사람은 우리가 쌍둥이여서 불길하다고 숲에 갖다버렸어. 마티는 우리를 데려다 키웠지. 우리에겐 마티가 진짜 마티야.”

토라는 웃으며 말했지만 갑작스러운 사연에 자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토라는 오히려 뜻밖이라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이거 심각한 이야기 아니야. 우리가 마티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거니까 오히려 즐거운 이야기인데.”

자인은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잊었군요.”

“자인은 생각보다 상식적인 사람인가 보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저라고 피도 눈물도 없는 건 아니니까요.”

토라는 싱긋 웃었다.

“응. 그런 거 같아.”

자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토라를 흘겨보았다.

“섣불리 확신하진 마십시오.”

***

“이쪽입니다.”

타오 대위는 말하고 자동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가말, 도영, 토라, 자인 순서로 따랐다.

그때 안에서 사람들이 한 번에 일어섰다. 가말은 어리둥절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눈에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성별과 나이대가 다양했다. 하지만 거의 정장을 입은 차림으로 보아 모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부 목에 출입증을 걸고 있었다. 부대에 출입 허가를 받은 민간인이라는 의미였다.

가운데 책상에 앉아있는 대령이 개중 백발이 성성한 중년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보스턴 인류학과의 헨리크 소어 교수님이십니다. 이쪽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마르셀 아리에스 부관장님, 언어학자….”

대령이 소개하는 사람은 모두 기라성같은 학자들이었다.

이어서 대령은 학자들을 보고, 멀뚱히 서 있는 가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가말, 사타디 부족의 딸입니다.”

학자들 사이에 아이돌을 만난 소녀 팬 같은 흥분과 감동이 일렁였다.

“일단 앉죠.”

대령이 말하자 모두 각자 자리에 앉았다.

“아, 가말 씨는 이쪽으로.”

가말이 뒤쪽으로 가는 도영을 당연한 듯이 따라가자 대령이 한가운데 준비되어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말은 그 자리를 한 번 보고 도영을 보았다.

도영은 저쪽으로 가라며 고갯짓했다. 가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차마 대령 앞이라 평소처럼 화는 못 내고 도영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가말은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학자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대령이 손짓했다.

“소령도 이쪽에 앉게.”

도영은 욕을 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가운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가말은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갖춰지자 대령은 가볍게 깍지를 끼고 말했다.

“바다 민족에 관해서는 베일에 싸여있습니다. 기록과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증언자가 없기 때문이죠. 한 명 있긴 하지만 저희에게 협조적이지 않아서요.”

대공을 말한다는 걸 다 알았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진 않았다.

“그 외에 현재 생존이 파악된 건 가말 씨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분들께 가말 씨가 아는 걸 이야기해줄 수 있겠습니까?”

가말은 의아했다.

“내가 아는 거?”

“네. 가말 씨가 태어난 곳이라든가 주변 상황, 사람들, 풍습 같은 걸요.”

“나 역사는 잘 몰라.”

“괜찮습니다. 당신이 기억하시는 것만이라도 이야기해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바다 민족에 관해서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까요.”

대령은 좌중 가운데 있는, 다소 젊은 편인 흑인 남자 학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워싱턴 교수님께서는 사타디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들과 시간을 보내려면 도영과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가말이 주저하자 한편에 서 있던 타오 대위가 나섰다.

“대령님.”

그리고 대령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도영은 의아해졌지만 청력이 좋은 가말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반응을 본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타오 대위가 물러나자 다시 가말을 보았다.

“만약 도와주신다면 부대에 오갈 수 있는 허가를 내드리죠. 협력자 자격으로.”

도영은 기가 막혔다. 설마 그런 식으로 일을….

그런데 가말이 바로 옆에 있는 학자를 돌아보더니 이랬다.

“뭐부터 들을래?”

도영은 천장을 보며 한숨을 삼킬 따름이었다.

***

유리 너머로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해 학자들과 대화하고 있는 가말이 보였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해도 가말은 꽤 진지하게 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령을 따르나 보군.”

도영은 옆에 와 선 대령을 보았다.

“새끼 오리의 각인 효과 같은 겁니다.”

“뭐가 어찌 됐든 아군으로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지. 역시 우리 소령은 유능하군.”

“별로 기분 좋아지는 칭찬은 아니군요.”

도영이 생시르(프랑스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을 때 대령이 팀 리더였던 인연이 있어 둘은 제법 가까웠다.

그래서 사석에서는 연대장인 대령을 대하는 말투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대령도 유리 너머 가말을 보았다.

“저 정도로 오래 산 뱀파이어의 협력 같은 건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른 녀석들은 전부 콧대가 높아서 부러질 지경이니까. 자기들이 뱀파이어 사회의 귀족인 줄 안단 말이야.”

대령은 어깨를 으쓱였다.

“신분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폐지되었다는 소리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어. 이미 머리에 피가 다 말라버려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가질 않는다니까. 하여간 꼰대란 종을 가리지 않아.”

대령은 가말을 고갯짓하고 물었다.

“입대할 생각은 없다고 하나?”

“군인의 재목이 아니에요.”

도영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딱 잘랐다. 대령은 의외여서 말했다.

“검술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그래봤자 자기를 섬에 처박혀 살게 한 사이코 하나 죽이지 못하는 간담인데요.”

“그쪽은 형제잖아.”

도영은 한심스러워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대령을 보았다.

“자기 형제가 몇백 명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의 기폭 장치를 들고 있다면 대령님은 어떡하실 겁니까?”

“형제를 죽이겠지.”

젊은 장교의 건방진 말투에도 대령은 별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군인이란 비정한 공리주의자들이지. 하지만 저쪽은 마음이 약해서라기보다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

“그래서 가말은 아니라는 겁니다, 더.”

그때 가말이 학자들과 대화를 끝내고 나왔다.

“도영!”

“가보겠습니다.”

도영은 거수경례하고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대령은 중얼거렸다.

“마누라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남편 같은 투인데 그래.”

***

토라가 방에 들어서자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일어났다. 은테 안경을 쓴 삼십 대 중후반쯤 된 백인 여자였다.

고위 관료 같은 투피스 정장을 입고 목에 출입증을 걸고 있었다. 머리는 한 갈래로 반듯하게 묶었다.

여자는 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예일 역사학과의 로라 밀러 교수님이십니다.”

뒤따라 들어온 자인이 여자를 소개했다. 토라는 교수의 손을 맞잡고 싱긋 웃었다.

“안녕.”

지긋이 손을 쥐는 힘에 교수는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다. 자인은 기가 막혔지만 일단 방 가운데 있는 탁자로 손짓했다.

“앉으시죠.”

토라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교수는 패드를 켜면서 말했다.

“오늘은 가벼운 질의 문답이니 긴장하실 필요는….”

“긴장 안 하는데.”

“아, 네.”

토라가 워낙 당당해 오히려 교수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아이스브레이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정말 필요해서라기보다 매뉴얼을 따르듯이- 일단 물었다.

“땋은 머리가 독특하네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그냥 예쁘라고 땋은 건데.”

토라는 무심히 말하더니 순간 기운이 바뀌면서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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