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쭈니>
토라는 대기하고 있는 헬기 앞에서 돌아보았다. 드디어 라토를 찾으러 가기 위해 나가는 토라를 배웅하는 길이었다.
가말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해, 토라.”
“걱정 마, 마티.”
가말은 말없이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당장에라도 짐을 챙길 것처럼 말했다.
“안 되겠어. 나도 같이 가.”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는 너무 눈에 띄어. 오히려 라토를 찾기 힘들어질 거야.”
게다가 가말이 남는 조건으로 일찍 관찰 기간을 끝내준 거여서 어차피 둘 다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대공의 하수인들이 가말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계속 나 혼자 밖에 잘 다녔던 거 잊었어?”
“하지만 지금은….”
토라는 가말의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 난.”
둘이 그러고 있는 게 실제로도 혈육은 아니지만 모자라기보다는 꼭 연인이 헤어지는 모습 같았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가말은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토라는 자인을 가리켰다.
“자인이 같이 가주잖아.”
자인은 계급으로 불러달란 말이 목 끝까지 찼지만 모자의 시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말이 자인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잡았다.
타인과 이런 접촉이 자연스럽지 않은 자인은 순간 손을 뺄 뻔했지만 상대가 가말이어서 참았다. 시각적으로 예쁘고 무해해 보이는 느낌이란 자인에게도 꽤 큰 힘을 발휘했다.
가말은 거의 물기가 도는 눈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토라를 지켜줘, 자인.”
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습니다.”
자신이 지키지 않아도 이런 장대 같은 뱀파이어를 누가 어떡하겠냐 싶었지만 역시 말은 하지 않았다. 토라는 즐거워하는 눈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녀올게.”
토라는 말하고 돌아섰다.
가면서 자인이 말했다.
“파트로네스님껜 다정하군요.”
“마티니까.”
토라는 대답하고 능글거렸다.
“자인에게도 다정했으면 좋겠어?”
“계급으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자인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토라는 피식 웃었다.
“쌀쌀맞아라.”
자인은 이 남자가 대체 진지한 건지 진지하지 않은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
음악이 쿵쾅거렸다. 금요일 밤이니까 이해하지만 클럽 내부는 사람이 터져나갈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색색의 빛이 스쳐 지나가는 저편에 토라는 처음 보는 여자와 거의 휘감겨있었다. 자인은 그 모습을 바에 앉아 지켜보았다.
제 딴에는 실마리를 모으고 있다는데 그보다는 그걸 빌미로 즐기고 있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저 남자는 자기장 같은 걸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순간 여자들이 와르르 들러붙었다. 그 가운데는 간간이 남자들도 있었지만 여자들 서슬에 다가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토라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면 시도라도 해볼 텐데 토라는 온 모공에서 농도 짙은 헤테로의 공기를 내뿜었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저렇게까지 비인간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여자들이 들러붙어 대는 남자는 지긋지긋했다.
“혼자야?”
그때 한 남자가 자인에게 물었다. 자인은 내려 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멀리서 토라는 그 모습을 보았다. 자인은 남자가 은근슬쩍 몸을 붙이며 허리를 감싸 안아오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저런 취향이었나 싶었다.
‘취향이 나쁘네.’
저런 쪽 취향이라면 그를 상대로 아무 반응도 없는 게 이해됐다.
그런데 남자가 허리춤에 있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자인은 그때를 기다린 듯이 한쪽 입 끝을 끌어올려, 당장 허리춤에 있는 걸 꺼내 겨눌 것 같다는 의미에서 치명적인 웃음을 지었다.
“꺼내게 하지 마.”
그러고는 바로 무표정으로 돌아가서는 남자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주춤거리다가 사라졌다. 토라는 피식 웃어버렸다.
“니카도 찜 쪄 먹겠네.”
“뭐라고요?”
중얼거리는 소리를 제대로 못 들었는지 옆에 있는 여자가 되물었다.
“아냐. 잠깐만.”
토라는 가지 말라는 듯 붙잡는 여자를 떼어놓고 자인에게 다가갔다.
“이런 덴 별로 즐기지 않나 봐?”
“일하는 중이니까요.”
자인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럼 친구들하고 오면?”
“분위기는 맞출 줄 알죠.”
그렇게 말해도 자인이 저기 여자들 같은 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좀 맞춰주면 좋겠는데. 지금은 너무 둘 중 하나잖아. 지독하게 실연당했거나 잠복근무 중인 경찰.”
자인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실연당한 쪽으로 하죠.”
그런데 갑자기 토라가 가까워졌다. 자인은 움찔하며 물러날 뻔했다가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켰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영향력도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난 실연당한 여자를 위로해주는 남자 역할인가?”
자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토라는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여자들이 다 팬티를 벗고 달려드는 거겠지만 본인도 그걸 즐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자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벌떡 일어나서, 토라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왜?”
“화장실이요.”
한 마디 툭 내뱉어놓고 화장실로 가는 자인을 보며 토라는 피식 웃었다.
“철옹성이네.”
자인은 술주정뱅이 둘이 붙어서 키스하고 있는 화장실 입구를 지나 화장실을 훑어보았다. 모든 칸의 문을 밀어보며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맨 마지막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얇은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주사기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건 뱀파이어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뱀파이어에 대해 좀 아나?”
자인의 상사가 물었다. 자인은 대답했다.
“MCTC에서 일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요.”
“그럼 뱀파이어는 자신을 감염시킨 감염원 외에 다른 감염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거 알고 있겠군.”
“네. 그게 뱀파이어가 동족을 마실 수 없는 이유라고 들었습니다.”
“맞아. 잘못 마셨다가는 다른 감염원의 공격을 받아 사망에 이를 수 있으니까.”
그러고는 상사는 책상 위로 손바닥만 한 검은 케이스를 내밀었다. 자인이 열어보자 케이스 안에는 충격 흡수용 보충재 안에 철제 주사기가 하나 들어있었다.
“뱀파이어는 동족의 피를 마실 수 없다는 원리에 착안해서 뱀파이어의 혈청을 조작해서 만든 거야. 쉽게 말하자면 뱀파이어 전용 독약이지. 최근 군 실험실에서 나온 ‘신상’이라 그만큼 효과는 확실해.”
상사는 조용히 자인을 보았다.
“이걸 써야 할 때는 중위가 잘 알겠지.”
토라는 감시역이 인간이라 안심하고 있겠지만 이 정도 양이면 토라 같은 덩치를 가진 뱀파이어도 쓰러지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자인은 독약을 잘 갈무리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토라는 아까와는 다른 여자와 휘감겨있었다. 여자들은 하나 같이 미인이었다.
자인은 당장 제 안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쓰고 싶은 사심을 꾹 억눌렀다.
***
도영은 토라가 간 후로 수심에 가득 차 있는 가말을 보고 물었다.
“허전해?”
가말은 도영을 돌아보지도 않고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걱정이야.”
토라 그 녀석이 어디서 맞고 다닐 일보다 때리고 다닐 일을 걱정해야겠지만 그렇게 끔찍이 여기는 클리엔테스가 혼자 나갔으니 이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도영이 그답지 않게 위로의 말을 해주려고 하는데 가말이 말했다.
“토라가 너무 순진해서.”
도영은 기가 찼다.
“우리 지금 같은 토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맞지?”
“토라는 착해.”
“아, 그래. 고슴도치도 제 어미한테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법이지.”
가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생각에 잠겨있었다. 도영은 가말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네 클리엔테스라면.”
그제야 가말은 ‘응?’ 하고 돌아보았다.
“나한테도 그… 미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영은 거칠게 뇌까리더니 돌아서서 갔다. 가말은 어리둥절했다.
“도영?”
가말은 얼른 도영을 따라갔다.
“토라는 정말 착해. 그게 문제야.”
***
토라는 간판을 확인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웨이터가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둘은 노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 웨이터가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또 오셨네요.”
순간 토라와 자인은 흘긋 서로를 쳐다보았다.
부대에서 어제 나온 토라가 여기 왔었을 리 없었다. 토라와 같은 얼굴을 가진 누군가가 왔었던 것이다.
“이런 맛을 내는 집이 흔하진 않죠.”
토라는 바로 표정이 바뀌더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벽에 붙은 칠판 메뉴를 보면서 커피를 시키고 말했다.
“요즘 제가 일이 많다 보니 헷갈리네요. 제가 언제 여길 왔었죠? 최근이었던 거 같긴 한데.”
“꽤 되셨죠. 한 한 달 정도 된 거 같네요.”
“그런데 기억하시는군요.”
“손님 같은 분을 잊긴 힘들죠.”
그러고는 웨이터는 갔다. 토라와 자인은 섣불리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누가 어디서 듣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인간보다 훨씬 밝은 토라의 귀에, 멀리서 웨이터들끼리 소곤거리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새 여자가 바뀌었네.”
“저런 얼굴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
토라는 자인을 보았다.
‘그새 여자가 바뀌었다.’
그럼 라토가 여자랑 같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
자인은 토라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탐탁하지 않은 투로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냐.”
그러고는 토라는 일어났다. 자인은 물었다.
“어디 가요?”
토라는 엄지손가락을 젖혀 카운터 너머에 있는 화장실을 가리켰다.
“같이 갈래?”
자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돌렸다. 토라는 직원이 서 있는 카운터를 지나가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말했다.
“통제하려는 여자는 피곤하다니까요.”
웨이터는 바깥을 보고 있는 자인을 흘긋 보았다.
“멋진 분이신데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 같았다. 안 그래도 자인은 꽤 미인인 데다가 몸이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져있어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토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운터에 팔을 걸치고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저 카리스마에 반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컵은 이렇게 놓아라, 칫솔은 저렇게 놔라, 물기 좀 닦아라, 알잖아요? 여자들 잔소리.”
그러고는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거기다가 저 통제하려는 병까지 겹쳐지니까 침대에서도 얼마나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은지 반응이 오다가도 죽어버린다니까.”
그러면서 토라는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라고 말하듯이 은근히 제 아래쪽을 눈짓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고, 사정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거의 희극적으로 보일 정도로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저번이 훨씬 나았죠.”
한편 자인은 토라가 평소보다 더 유난히 껄렁거리며 웨이터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저러고 있어?’
토라와 웨이터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자인은 좀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토라 자체가 못마땅했으므로 더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쪽 테이블에서 남자 하나가 일어섰다. 자인은 기척을 느꼈지만 돌아보지 않고 선반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남자 하나가 일어서서 화장실로 가고, 그 뒤에 남은 나머지 남자는 핸드폰을 하면서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눈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