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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34화 (34/110)

34화<쭈니>

문이 열렸다. 호텔 방은 조용했다. 하지만 자인은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방 내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말했다.

“됐습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토라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이 된 기분이군.”

“다른 공주님들이 기겁할 발언이군요.”

자인은 무표정하게 말하고 토라가 더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쉬십시오.”

그리고 차갑게 일별하고 방을 나오려고 했다.

“혹시 나 뭐 좀 사다줄 수 있어?”

갑자기 토라가 물었다. 자인은 상대가 조금만 더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부탁 같은 건 도저히 하지 못할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제가 심부름꾼처럼 보이십니까?”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나가도 상관없는데 자인이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그건….

자인은 돌아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게 뭔데요?”

토라는 몇 가지, 자인의 생각에는 도저히 중요하지 않은 물품들을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두리안 주스.”

“두리안 주스요?”

자인은 누가 두리안 주스 같은 걸 먹느냐는 소리가 들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토라를 보았다.

“두리안 주스 같은 걸 팔긴 해요? 본 적 없는데.”

“미국의 다양성이 그 정도밖에 안 돼?”

“다양성이라는 단어는 그런 데 쓰는 게 아니에요. 아무튼 알았어요.”

취향 한 번 특이하다 싶었지만 자인은 더 상대하기 귀찮아져서 대답했다. 토라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자인은 방을 나서며, 처음 군인이 되면서 생각했던 그림은 이게 아닌데 어쩌다 자신이 음료수 셔틀까지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자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몰라 호텔 주변도 면밀히 살펴봤지만 미행하는 기척은 없었다. 아까 낮에 봤던 남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호텔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정말 두리안 주스 같은 걸 팔 줄은….”

침대 위에 토라와 어떤 여자가 얽혀있었다. 여자는 거의 죽을 듯이 신음하고 있었고, 토라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바빴다.

“Fuck!”

자인은 욕설을 터뜨리며 당장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설주에 부딪히는, 난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실수까지 하고서야 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문 안 잠갔어?”

안에서 토라가 여자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동으로 잠기잖아요? 아, 하지만 저쪽은 키를 가지고 있었던 거 같네요. 그건 몰랐네. 아무래도 좋지만.”

그러고는 닫히는 문틈 사이로 여자의 신음소리가 따라왔다.

‘뭐 저런… 저런…!’

복도 바닥을 깨부숴버릴 것처럼 쿵쿵 걸어가는 동안 심장이 다 벌떡거렸다. 그런 걸 보고 피가 치솟을 정도로 순진해서가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마트에 가는 그 잠깐을 못 참아서 방에 여자를 끌어들여?

갑자기 자인은 멈춰 섰다. 하도 기가 차니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다행히 옆모습이어서 여자의 허벅지에 가려져서 둘이 연결된 모습 같은 건 보지 못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

자인은 로비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제 방으로 갔으면 됐지만 그냥, 같은 층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제 이마를 쓸었다.

정말로 아스피린이 필요했다.

그때 저쪽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낯익은 여자가 내렸다. 아까 토라와, 아니 정확히는 토라 아래 있던 여자였다.

여자도 자인을 알아보고는 왠지 모를 승리감에 찬 얼굴로-왜?- 그녀를 보고 앞을 지나가 호텔을 빠져나갔다. 자인은 매우 내키지 않았지만 그제야 일어나서 방으로 올라갔다.

여자가 갔으니 또 엄한 장면을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벨을 누르고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토라는 막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젖어있었다. 다행히 옷은 제대로 입고 있었다. 그리고 자인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욕 멋있던데?”

자인은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물었다.

“수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하셨습니까?”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수상하든 하지 않든 거기에 이빨이 달리진 않았을 테니까. 물어뜯진 않겠지.”

“남자는 그럴 때 가장 무방비 상태가 된다고 하던데요.”

“날 죽이려고 했으면 하기 전에 찌르지 않았겠어? 만약 그때 찔러도 여자 안에서 죽는 건 그야말로 황홀한 죽음이지.”

결국 자인은 대왕 지네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이 이렇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남자를 혐오하는 표정만은 숨기기가 힘들었다.

“아내분은 있습니까?”

감시 대상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일도 처음이었다.

있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가 깔린 말이었지만.

“아내는 만들지 않아.”

그런데 토라가 묘하게 진지한 투로 말했다. 뭔가 의미가 있는 말 같아 자인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왜요?”

토라는 빙긋이 웃었다.

“난 모든 여자의 거니까.”

그러더니 백 년간 수행을 쌓은 비구니도 앉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오게 할 그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인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해.”

자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별로 죄송하진 않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토라는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날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

자인은 무표정을 풀지 않았다.

“처음이라니 영광이네요.”

“어째서?”

토라는 거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물었다.

“그렇게 묻는 것에 답이 있는 거 같은데요.”

자인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토라는 몸을 기울여 책상을 짚었다.

“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랬다. 성별을 떠나 이런 존재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더 거부감이 느껴졌다.

자인은 이제 아무런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에 대한 기준은 문화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틀렸어. 더 자세히 봐.”

그러더니 정말 감상하란 듯이 가만히 있었다.

돈을 주고 그를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여자가 전 재산이라고 내놓지 않을까?

자인은 미간이 꿈틀거렸다. 거부감이 가슴 속에서 불뚝거렸다.

“언제까지 봐야 하는 겁니까?”

토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인은 정말 화가나 보였다. 질투심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거부감이 뿜어져 나왔다.

“다음부터는 미리 경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남들의 은밀한 현장 같은 건 덮치고 싶지 않거든요.”

토라는 희극적으로 제 가슴을 짚었다.

“거절당하는 남자의 심정이란 게 이런 거였군. 끔찍해.”

자인은 제 방으로 가려는 듯 돌아서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거절당한다고 슬플 것도 없지 않습니까?”

토라는 빙긋이 웃었다.

“난 자인을 꽤 좋아해. 강한 사람은 멋있으니까.”

자인은 오히려 그 말에 더럽혀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 표정이 하도 실감이 나서 토라는 웃어버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웃음을 멈추고 목뒤를 쓸었다.

‘들킬 생각은 없었는데.’

그 타이밍에 돌아올 줄이야 그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일부러 여러 군데 돌아다녀야 구할 수 있는 물품들을 섞었는데.

안 그래도 어떻게 그걸 다 단시간에 구해왔나 싶어서 토라는 자인이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간 봉지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먼 가게까지 가야 살 수 있는 물품 몇 개가 없었다.

‘구하기 어려운 건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런 생각이었던가 보다.

토라는 웃어버렸다.

하여간 성격하고는.

***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입대하고부터 군인으로 살아온 자인에게 있어 아침이 오는 건 또 다른 루틴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루틴을 완벽하게 해내는 데는 꽤 쾌감이 있었다. 예술가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면에서 자인은 스스로 군인의 재질을 타고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침이 오는 게 싫은 건 오랜만이었다. 토라의 얼굴을 봐야 하니까.

치과에 끌려가는 아이의 심정으로 방으로 갔는데 토라가 없었다.

‘어딜…!’

다급히 찾으러 나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토라가 들어왔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은, 광고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뭐해?”

그러고는 오히려 물었다.

자인은 인상을 쓰고 물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진정해. 아침 사러 다녀온 거뿐이니까.”

토라는 탁자에 음식이 담긴 봉지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둘은 여행을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서 괜히 얼굴을 내놓고 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아침을 사오는 건 자인의 몫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플로스가 떨어졌습니까?”

냉장고 안에 플로스가 뻔히 들어있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난 진짜 음식을 먹는 게 좋아.”

토라는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자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운명의 장난이군요. 전 플로스만 마시고 살 수 있다면 좋겠는데. 삼시세끼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드는 일이니까요.”

“그게 무슨 재미야? 먹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큰 즐거움인데.”

그러면서 토라는 봉지 안에서 친환경 마크가 붙어있는 그릭 요거트를 꺼내 뚜껑을 깠다. 자인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모두가 인생을 재미로만 사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여유가 없는 거야.”

그러고 토라는 뚜껑에 묻은 요거트를 핥아먹었다. 묘하게 혀까지 야해 보이는 남자였다.

자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요?”

“자인이 그렇단 이야기는 안 했는데. 아니, 그전에 인생을 재미로만 산다는 거 내 이야기 한 거였어?”

자인은 물끄러미 토라를 보았다. 보통은 예의 때문에라도 대놓고 그렇다고 하진 않겠지만….

“네. 그랬는데요.”

이 남자를 상대로는 예의를 차리고 싶지가 않았다.

토라는 가볍게 웃었다.

“몰랐네.”

몰랐을 리가? 하여간 의뭉스러운 사람이었다.

“안 먹어?”

토라가 탁자에 놓인 봉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쨌든 음식은 죄가 없었으므로 자인은 토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개인행동은 삼가주세요.”

토라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식사하는데 그가 한쪽 엉덩이를 들어서 엉덩이 주머니에서 접힌 메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연락처를 얻었어.”

“무슨 연락처요?”

요즘 시대에 종이 메모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자인은 의아해하며 메모를 받아 펼쳤다.

“라토가 하룻밤을 보냈다는 여자.”

그리고 토라는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녀석이 원나잇을 했다니.”

“그쪽 쌍둥이인데 어련할까요?”

어제 일이 생각나 자인은 비꼬기를 멈출 수 없었다. 토라는 흘긋 그녀를 보고 말했다.

“라토는 나와 달라.”

그 말을 믿는다기보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편견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일은 확실히 잘못됐으므로 자인은 제 잘못을 인정하고 말을 돌렸다.

“이런 건 어디서 났습니까?”

“롤라.”

롤라라면….

“그럼 어제 카페 웨이터랑 이야기했던 게?”

토라가 웨이터랑 껄렁거리며 대화하던 게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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