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35화 (35/110)

35화<쭈니>

“이런 건 어디서 났습니까?”

“롤라.”

롤라라면….

“그럼 어제 카페 웨이터랑 이야기했던 게?”

토라가 웨이터랑 껄렁거리며 대화하던 게 기억났다.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인은 석연치 않아 물었다.

“그 웨이터가 그 여자 연락처는 어떻게 알고요?”

“그전에도 가게에 오는 걸 몇 번 봤나봐. 꽤 미인이라서 결제할 때 본 전화번호를 몰래 저장해놨었대.”

자인은 토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범죄인데요.”

“잡아가든가.”

어쨌거나 그거야 경찰의 일이고, 자인은 메모지를 흔들었다.

“근데 그 웨이터도 이런 걸 그냥 줬다고요?”

“그냥이겠어?”

토라는 망고를 깎으면서 ‘이 순진한 양반 보게.’ 하고 말하듯이 오히려 되물었다.

“그럼요?”

“대신 나도 다른 연락처를 알려준다고 했지.”

“누구 연락처요?”

토라는 깎은 망고 한 조각을 칼 위에 얹은 그대로 내밀었다. 자인은 됐다고 손을 들어 거절했다. 그러자 토라는 그걸 제 입에 넣었다. 순간 자인은 뭔가 깨달았다.

“저요?”

토라는 망고를 마저 까면서 말했다.

“인기 좋던데.”

자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그녀가 원했을 때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한 적은 없었지만 토라가 말하니까 꼭 놀리는 것 같았다.

토라는 심상하게 말했다.

“전화 오면 한 번 받아줘. 그래도 순정이 있는 친구 같던데.”

“두 번 순정이 있으면 스토킹을 시작하겠군요.”

어차피 전화번호야 속옷보다 더 쉽게 바꿀 수 있는 거니 그걸 조건으로 정보를 얻었다면 특별히 상관없었다.

토라는 더 할 말이 없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가보자고.”

식사가 끝나자 토라는 일어났다.

***

여자는 토라를 보는 순간 알아보는 표정이 되었다.

“어, 당신?”

“쌍둥이야.”

라토와 잤던 여자라면 바로 차이를 알 테니 그냥 말했다.

“쌍둥이?”

여자는 토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네. 느낌이 너무 다르네.”

그러더니 여자는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토라에게 다가섰다.

“그런데 무슨 일? 그쪽 쌍둥이가 너무 좋았다고 추천이라도 해줬어?”

그때 갑자기 자인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자는 말을 멈추었다. 자인의 행동이 충분한 의사 표현이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인은 까불어도 좋은 상대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토라는 여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쌍둥이가 행방불명 됐어.”

“행방불명?”

여자는 눈을 깜빡이며 되묻더니 바로 경계하는 표정이 되었다.

“나완 관계없어. 하룻밤 잤을 뿐인 걸.”

“알아. 그냥 기억나는 걸 말해줬으면 좋겠어.”

“기억나는 거라고 해봤자…. 좀 무심한 사람이었어.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질 않더라고.”

토라가 제 쌍둥이는 자신과 다르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믿지 않았지만 확실히 좀 다른 모양이었다.

“어떤 남자들하고 이야기하는 거 같았어. 내가 기억하는 건 그게 다야.”

“어떤 남자들이었는데?”

“길을 묻거나 담배 한 개비 빌리자고 말 걸었을 거 같진 않은 남자들? 두 명이었어.”

“인상착의는?”

여자는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면서 토라는 물었다.

“아까 그건 뭐야?”

“그 여자와도 자고 싶은 거였다면 방해해서 죄송하군요. 괜한 시간 낭비를 하기 싫었을 뿐입니다.”

자인은 무심히 말했다.

“자인은 솔직하지 못하군.”

“너무 솔직해지는 거 같아서 문제입니다만.”

자인은 회의에 가득 찬 어조로 말하고, 아까부터 든 생각을 말했다.

“근데 아까 그 여자분… 가말 씨를 좀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티가 얼마나 예쁜지 알고 하는 말이지?”

토라는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아니, 물론 예쁜 건 비교가 안 되지만 분위기라든가 체형이….”

자인은 무언가 깨닫고 토라를 쳐다보았다.

“혹시….”

토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토는 마티를 배신하지 않아. 그거 하나만은 분명해.”

자인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니 문득 말했다.

“그런데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이름이 토라와 라토라니….”

‘또군.’

토라는 생각했다. 그들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하는 소리가 있었다.

“팰린드롬(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똑같이 읽을 수 있는 문자) 같군요. 꼭 연결된 거 같은 게, 쌍둥이 이름으로 좋네요.”

자인은 말하고 토라를 보았다. 토라가 자신이 이상한 이야기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죠?”

자인은 마뜩잖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토라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놀랍네. 보통 다들 마티가 우리 이름을 굉장히 성의 없이 지었다고 생각하던데 말이야.”

숨이 막히도록 은하수가 흐드러진 밤하늘 아래 모닥불 가에서 가말이 양옆으로 앉은 그들 쌍둥이의 손을 잡고 속삭이던 말이 있었다.

“너희는 이어져 있어.”

자인은 무심히 말했다.

“가말 씨가 그쪽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 상대에게 성의 없는 이름을 지어줬을 리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그 시각 도영은 양쪽 문설주를 붙잡고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로 서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등에는 거머리가, 아니 가말이 그의 허리를 양팔로 꽉 붙들고 들러붙어 있었다. 팔에 힘은 주고있지 않았지만 절대 풀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둘 앞에는 타오 대위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가말 씨, 소령님께서는….”

“싫어.”

가말은 단호했다. 그리고 도영의 허리에 두른 팔을 더 단단하게 감았다.

“안 돼. 가지 마. 못 가.”

“집에 다녀오시는 거뿐입니다. 돌아오셔서 한 번도 부모님을 못 뵀으니까요.”

타오 대위가 말하자 가말은 거의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나도 가. 응?”

“하지만 가말 씨는 약속과 테라피가….”

대위가 곤란해하며 말하자 가말은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도영의 등에 얼굴을 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도영은 한숨을 내쉬고 문설주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타오 대위에게 물었다.

“데려가도 됩니까, 이거?”

“그건….”

대위는 곤란해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괜찮습니다.”

그때 렉스가 나타났다. 타오 대위는 당장 옆으로 지켜서면서 거수경례하고, 도영도 자세를 바로 하고 거수경례했다.

“소장님.”

하지만 가말은 여전히 도영의 허리에 매달려있었다. 도영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또 힘은 세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렉스는 그런 가말을 보고 말했다.

“소령의 말은 잘 들으니까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잡힌 약속들이….”

“그건 우리 측이 도움을 받는 거니까 붙잡아둘 이유는 되지 않는 거 같군요. 누구에게나 휴가는 필요하니까요.”

소장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더는 토를 달 수 없었다. 가말은 활짝 웃었다.

“고마워, 알렉스!”

“렉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무표정을 푸는 법이 없는 렉스는 묘하게 온기가 도는 눈으로 말했다.

“응. 렉스.”

가말은 두 번 사양하지 않았다. 도영은 중얼거렸다.

“삽살개 같은 놈.”

“응?”

가말이 돌아 봤지만 도영은 이미 걸어가고 있었다. 가말은 렉스에게 인사하고 헐레벌떡 따랐다.

“렉스, 안녕!”

***

“도영아!”

도영의 부모님은 공항에 나와 있었다.

하반신이 마비된 아버지 엘리오는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어머니 사랑은 옆에 서 있었다. 간만에 실물로 만나는 아들을 보고 얼굴이 밝아지던 두 사람은 도영과 함께 나오는 가말을 보고는 얼핏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가말이 엘리오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서양인 도영.”

도영은 손가락을 튀겨 가말의 머리를 탁 쳤다.

“인사부터 안 하냐?”

가말은 그제야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안녕. 가말이야.”

“존댓말을 할 줄 몰라요. 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해하세요.”

도영이 덧붙였다. 사랑과 엘리오는 얼떨떨해 있다가 물었다.

“누구…?”

“짐짝이요.”

도영이 가감 없이 한 말에 가말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응. 짐짝이야.”

그러더니 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근데 짐짝이 뭐야?”

***

엘리오와 사랑은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돼. 삼천삼백오십 년을 살았다고?”

“나이만 먹었어요.”

도영이 말하자 가말이 정정했다.

“밥도 많이 먹었어.”

“참 자랑이다. 거기 냅킨이나 놔.”

“냅킨?”

“네모난 휴지.”

도영이 가말이 모르는 단어를 설명해주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엘리오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뭔가… 삼천삼백오십 년을 산 뱀파이어 이미지는 아니구나.”

도영은 가말을 한 번 보았다.

“섬에서 히키코모리로 살면 이렇게 되나 봐요.”

“아, 히기도모리. 나야. 도영이 말했어.”

가말은 그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하게 말했다. 사랑은 도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말투는… 원래 이래?”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랑 그렇게 오래 대화를 했는데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단어만 많이 알 뿐이지 말은 조금도 늘지 않은 거 보면 그냥 말투가 된 거 같아요. 존댓말은 애초에 안 하고.”

“난 오래 살았어.”

가말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존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도영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와, 슈퍼 꼰대.”

“꼰대가 뭐야?”

일반 단어는 이제 제법 알지만 역시 은어는 아직 좀 부족했다.

“너.”

“꼰대가 뭔데?”

“아, 귀찮게. 앉아.”

도영이 귀찮아하며 말하자 가말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그에 엘리오는 아까부터 참던 말을 결국 꺼냈다.

“이런 말은 실례겠지만….”

“애완동물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거였으면 이런 건 줘도 안 키우니까.”

엘리오는 입술을 발음하려던 모양 그대로 멈추었다. 가말은 발끈해서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키워!”

“안 키워.”

도영은 단호했다.

“왜 안 키워!”

“누가 너같이 식비 많이 들고 말도 잘 안 듣는 애완동물을 키운다고?”

“말 잘 들을게.”

가말은 시무룩해져서 웅얼거렸다.

“도영 없으면 싫어.”

혼나는 아이 같은 얼굴에 엘리오와 사랑이 도영을 힐끔거렸다. 도영은 못마땅했다.

“아, 이 자식은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데 뭐 있다니까.”

가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영은 안 나빠.”

도영은 테이블 쪽으로 고갯짓했다.

“자리에나 앉아.”

가말은 얼른 자리에 가 앉았다. 엘리오와 사랑도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수저를 들 때까지 가말이 기다리고 있기에 사랑이 말했다.

“많이 먹어요.”

가말은 웃었다.

“응. 많이 먹을 거야.”

엘리오와 사랑은 현명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가말의 캐릭터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 먹자.”

***

도영은 주변을 정리하고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푹 자라. 가말은 손님방에….”

엘리오가 말하려고 하는데 가말은 이미 도영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말끝을 흐리는 엘리오를 보고는 방어적인 태도로 말했다.

“도영이랑 잘 거야.”

최근 자신이 도영과 자는 데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아서였다.

엘리오와 사랑은 대번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도영을 보았다. 도영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요즘 그가 어딜 가나 한 번씩 하게 되는 말을 또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새끼 오리의 각인 효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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