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쭈니>
도영은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부모님의 표정을 보면 새끼 오리의 각인 효과 변명을 딱히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가말은 혼자 자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별수가 없었다.
누가 이 미친개를 말릴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인 것 같았다.
도영은 제게 딱 붙어 옆에 누워있는 가말을 흘긋 보았다. 개나 고양이면 귀엽다 하고 배나 쓰다듬어주겠지만 이건 뭐….
모든 남자들이 꿈속에서나 봤으면 하는 미녀가 제 옆구리에 찰싹 붙어있는데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림의 떡인 것을.
시선을 느꼈는지 가말은 눈을 뜨고 물었다.
“왜?”
도영은 말해 뭐하랴 싶어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빼내 젓고 내려놓았다.
“됐어. 자.”
그러자 가말은 구무럭거리며 도영에게 좀 더 붙었다.
“도영은 따듯해.”
맞닿은 몸의 굴곡이 느껴졌다. 부대에서 하던 대로 도영은 속으로 라 마르세예즈(프랑스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가 호전적이기 이를 데 없어서 진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심장이 뛰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말은 안정을 찾은 것처럼 거의 잠들 듯이 보였다. 그런 가말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질문이 나왔다.
“따듯하기만 해?”
“응?”
가말이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너 말이야.”
부스럭.
기왕 말이 나온 거 도영은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이불이 끌려오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 소리도 없는 와중이어서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남자한테 이렇게 딱 붙어서 자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가말은 흡사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인 양 물기 어린 눈을 올려 뜨고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의미인데…?”
그 눈빛을 보고 도영은 깨달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 묻는 거였다. 기가 막혔다. 마냥 순진하기만 한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도 귀여운 얼굴에 속은 것이다.
도영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엉큼한 녀석.”
중얼거리고 키스했다.
“불안했어.”
가말은 중얼거렸다.
“밖에 나와서 더는 내가 싫은가 하고.”
도영은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런 생각을….”
“섬에서는 자주 했는데, 밖에선 안 해.”
“그건….”
둘이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도저히 참지 못할 것 같아서라고 어찌 말하겠는가?
하지만 환경이 바뀐 만큼 가말로서는 불안해할 만한 소지가 있긴 했다.
도영은 가말을 보다가 툭 물었다.
“너 내가 그렇게 좋아?”
가말은 놀랍게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당당하게 이랬다.
“응.”
도영은 신체조건이 뛰어난 남자로 살면서 꽤 많은 여자들에게 고백을 받아봤지만 이렇게 제 감정에 솔직한 사람도 처음이었다. 가말은 전혀 계산 따위 하지 않았다.
“도영을 생각하면 이상해. 가슴이 꽉 죄어들어.”
가말은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얼굴이었지만 숨기지 않고 끝까지 말했다. 불그스름한 볼가가 좀 더 짙어졌다.
“막 쿵쾅거리고, 오싹거려.”
도영이 내내 ‘새끼 오리의 각인 효과’ 소리를 하고 다닌 건 그냥 그런 게 아니었다. 가말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인식하는 새끼 오리라고 믿었다.
가말이 그를 좋아한다는 거야 오래전에 알았지만 혼자 오래 살았으니까. 아무리 오래 잤다 하더라도 긴 세월을 살면서 그냥 지나친 것만 포함하면 종을 불문하고 꽤 많은 남자들을 만났을 것이다. ‘셀 수 없을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그중에 하필 인간에 불과한 그를 좋아하게 된 건 타이밍의 기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유난히 외로웠고, 사랑에 빠질만한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져있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탁 트인 자연에 여자와 단둘이 갇혀있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서로 진짜 감정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가말을 온 세상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은 크리스마스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당연히, 도영은 오래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도영은 손으로 제 눈을 덮었다.
“이래서 널 데리고 나오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아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바깥에서는 날 다스릴 자신이 없었거든.”
“누구 눈치를 봐…?”
“글쎄…. 아마 내 양심.”
새끼 오리의 각인 효과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말이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서늘한 손이 다가와 눈을 덮고 있는 손을 치웠다. 가말이 팔꿈치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고 있어 검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커튼처럼 늘어져 있고 도영 위로 그녀가 드리운 그림자가 졌다.
“도영….”
가말은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늘에 가려진 눈빛은 우미하게 깊었다.
도영은 이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말의 이미지를 평생 잊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나 좋아해.”
아련한 눈빛에 비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명령조였다.
도영은 몸을 일으켜 가말 위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
***
도영은 부엌 창문 너머로 아침의 정원을 보며 물을 마셨다. 뒤로 엘리오가 지나가며 말했다.
“새끼 오리한테 그러면 잡혀간다.”
도영은 물을 뿜었다. 싱크대 위에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데 엘리오가 말하고 거실로 나갔다.
“내 귀도 만만치 않게 좋거든.”
도영은 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욕구불만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마음이야 통했지만 그들의 육체 사이에는 ‘종 차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놓여있었으니까.
가말과 뭔가 더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런 건 없었다.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도영은 돌아서서 싱크대에 기댄 채로 생각했다.
‘역시 내가 루아스가 되는 수밖에 없겠지.’
물론 그냥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늙어 죽으면 가말은 또 혼자가 될 것이다. 토라와 라토가 있지만 그 둘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감염된다고 다 성공하는 게 아니니까 섣불리 시도해볼 수도 없었다.
도영은 자신을 믿는 편이었지만 확률상의 문제에서는 그리 배짱을 부리지 않았다. 제 몸과 정신으로 제어할 수 없는 부분에까지 객기를 부리는 건 만용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오, 안녕.”
그때 밖에서 가말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잤어?”
엘리오가 물었다.
“죽었다 깼어.”
가말이 능청스럽게 하는 말에 엘리오는 실소를 지었다.
“그런 말은 누가 알려줬어?”
“엘리오 베이비.”
그러자 엘리오는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오가 웃음에 인색한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처럼 빵 터져서 웃는 일이 잦았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가말이 주방 문 너머로 나타났다.
“도영.”
도영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와.”
가말이 오자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 가말은 깜짝 놀랐다. 도영이 이렇게 달콤한 행동을 한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좋아서 안겨들었다.
“내가 베이비냐?”
행동에 비해 말투는 여전했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오한텐 베이비야.”
“이런 집채만 한 베이비는 나도 거절하고 싶은데.”
어느새 다시 온 엘리오가 싱크대에 컵을 넣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장 보러 갈 건데 가말도 갈래?”
“장?”
“현대인의 사냥이지. 음식물을 구하러 가는 거야.”
“응. 나도 갈래.”
준비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 엘리오가 휠체어를 움직여 운전석으로 가더니 장애인용으로 개조되어있는 차의 봉을 잡고 팔의 힘만으로 차에 올라탔다.
아버지를 안아 올려줄 힘이 충분한 도영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남은 휠체어를 접어서 뒤에 싣는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엘리오, 멋있어.”
가말은 정말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로 말했다.
“옛날엔 다리가 잘린 사람은 내다 버렸어. 쓸모가 없다고 했어. 그런데 이젠 다리가 없는 사람한테 다리를 줘. 문명 세계는 멋진 거 같아.”
가말은 정말 그게 기쁜 것 같이 웃었다. 엘리오도 덩달아 웃었다.
“착하구나, 가말은.”
그리고 중얼거렸다.
“너 같은 사람이 어쩌다 뱀파이어가 됐을까?”
정말 그게 궁금한 것처럼 일말의 씁쓸함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침묵이 감돌았다.
“죽고 싶지 않았어.”
가말은 대답했다.
“감염될 때 기억은 잘 나지 않아. 하지만 계속 그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열여덟의 나이에 갓 결혼한 새신부가 난데없이 살해당하면서 얼마나 강렬하게 그 생각을 했을까.
도영은 가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가말은 도영이 그러는 건 좋지만 왜 갑자기 그러는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
세 사람은 마트에 도착했다.
“와….”
밖에 나와서도 계속 부대에 있었던 탓에 대형 마트를 처음 와 보는 가말은 수많은 물건이 종류별로 정리되어있는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았다.
“가말. 한눈팔지 마.”
도영은 말하고 엘리오를 도와 장을 보기 시작했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을 뿐이지만 도영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시선이 느껴져 가말은 내려다보았다.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약간 넋을 놓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말은 아이가 쥐고 있는 봉지를 보고 물었다.
“그건 뭐야?”
아이는 어린아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불어로 대답했다.
“하리보.”
“하리보?”
가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새로운 젤리의 대명사가 된 유명 젤리 회사의 이름을 알 리 없었지만 아이는 가말을 외계인 보듯이 보았다.
“하리보 몰라?”
“몰라.”
그러자 아이는 봉지에 손을 넣어 젤리를 꺼내더니 건넸다.
“자. 알게 될 거야.”
가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너 멋있다.”
가말이 보이지 않아 다시 돌아온 도영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찼다. 둘 사이에 적어도 로마제국이 거의 두 번 일어섰다 망하는 정도의 나이 차가 있다는 건 알고 있을까?
사람이 노인이 되면 오히려 어린아이가 된다고 하듯이 저 녀석도 갈수록 더 어려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먹어봐.”
크면 여자깨나 울릴 것 같은 카리스마를 뽐내며 아이는 말했다. 가말은 몰랑거리는 게 신기하면서도 경계되는 얼굴로 젤리를 입안에 넣었다.
순간 심 봉사가 눈을 뜨듯이 눈이 번쩍 뜨였다.
“맛있어…!”
***
가말은 소파에 앉아 원통 젤리 박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엘리오는 그런 가말을 보고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저거 괜찮을까?”
“뱀파이어인데 배탈이야 나겠어요.”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도영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엘리오는 가말을 보며 웃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삼천삼백 년을 살았다는 뱀파이어가 처음에는 황당하고 기막혔지만….
“뱀파이어가 다 저렇게 귀엽다면 나도 한 마리 키우고 싶구나.”
“저는 반대예요.”
도영은 바로 말했다.
“식비가 얼마나 드는지 아세요? 오죽하면 뱀파이어를 군인으로 만든 게 정부 지원 없이는 식비가 감당이 안 돼서라는 소리가 있겠어요?”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줄리앙이 생각나, 어쩐지. 이상하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
“괜찮아, 아버지. 줄리앙은 행복해.”
갑자기 가말이 젤리 박스를 안은 채로 끼어들었다. 엘리오는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네가 줄리앙은 어떻게 알아?”
“줄리앙이 말해줬어.”
가말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