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37화 (37/110)

37화<쭈니>

엘리오는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네가 줄리앙은 어떻게 알아?”

“줄리앙이 말해줬어.”

가말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엘리오는 의아해졌다.

“줄리앙이?”

“응.”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없는 사람들이 내게 말해. 내게 속삭여. 하고 싶은 말을.”

“그럼 영매 같은…?”

엘리오는 딱히 그런 걸 믿지 않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냐. 대다수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건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야. 죽은 사람들은 자기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말을 걸지 않으니까.”

갑자기 가말은 유창하게 말했다.

언어 실력이 늘어도 가말은 버릇이 됐는지 아이처럼 브로큰 언어를 썼다. 하지만 종종 문법적으로 완벽한 말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도영도 설거지를 하다 말고 가말을 쳐다보고 있었다.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솨아아, 솨아아, 계속 흘러내렸다.

“하지만 난 줄리앙과 이야기하고 싶어.”

엘리오는 왠지 모르게 다급해져 말했다.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잖아.”

“그건….”

엘리오는 말문이 막혔다.

“줄리앙이 행복하다고 했지? 정말 그렇게 말해?”

“응.”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줄리앙이 행복하다.

그 생각만으로도 엘리오는 그가 다리를 내놓으면서도 구하지 못했던 제 형제에 대한 죄책감으로 보냈던 숱한 불면의 밤이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울지 마. 내 얼굴로 바보 같아 보이니까.”

갑자기 가말이 말했다. 엘리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줄리앙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가말은 눈매를 둥그렇게 휘면서 웃었다. 꼭 줄리앙이 드물게 한 번씩 웃어주던 것처럼.

“제가 말해준 거예요.”

갑자기 도영이 말했다.

“너 이제 사기도 치냐?”

도영이 기가 찬다는 투로 말하자 가말은 오히려 분통을 터뜨렸다.

“아, 도영. 말하지 않았으면 엘리오는 정말 줄리앙이 행복하다고 생각해.”

“우리 삼촌이 알면 네가 뭔데 내 마음을 아는 척하냐고 화낼걸. 우리 삼촌 무섭다. 너 하는 게 하도 기막혀서 그냥 보고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 능욕이 도를 넘기 전에 그만해라. 사과해, 인마.”

엘리오는 눈물이 쏙 들어간 상태였다. 가말은 정말로 미안해하며 말했다.

“미안, 엘리오. 엘리오 슬프지 않게 해주고 싶었어.”

“허리 숙여서 사과해.”

도영이 말하자 가말은 또 순순히 따랐다. 그런데 젤리 박스를 안은 채로 허리를 숙인 탓에 소분되어 있는 젤리 봉지가 우르르 떨어졌다.

“아, 이 자식이. 당연히 쏟아진다는 생각을 해야지, 바보야?”

도영이 타박하면서 무릎을 굽혀 젤리 봉지를 주웠다. 가말도 옆에 쪼그려 앉아 주우면서 말했다.

“도영 말 들었어. 도영 잘못이야.”

“이제 남 탓까지 하냐?”

엘리오는 황당해 있다가 이내 실소를 짓고 말았다. 어쩐지 이 이상한 그림도 괜찮아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가말이 일어나 엘리오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도영은 어쩐지, 그게 제 쌍둥이의 손에 살해당한 그녀가 제 몸이 상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형제를 구하려고 했던 엘리오에게 그래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뻐근한 흉통 같은 감정이 가슴을 조여 왔다.

엘리오는 가말의 등에 손을 얹은 그대로 물었다.

“가말, 내 딸 할래?”

“안 돼요.”

가말이 대답하기도 전에 도영이 잘랐다. 그러자 엘리오는 도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짓궂은 얼굴을 했다.

“딸도 여러 가지 딸이 있는 법이니까.”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투에 도영은 골치가 아팠다.

“아버지.”

가말은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활짝 웃고는 다시 엘리오를 안았다.

“엘리오는 이미 내 타와야.”

***

공간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벽에 가 부딪쳤다가 저 벽에 가 부딪쳤다. 긴 그림자가 을씨년스러운 복도를 걸어가는 발을 쫓아왔다.

재소자용 실내화를 신은 발은 어떤 셀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으로 슥 종이를 밀어 넣었다.

어둠 속에서 손이 나와 종이를 가져갔다. 그리고 전서구의 다리에 다는 메시지처럼 둥글게 말려있는 종이를 느긋한 손짓으로 돌돌돌 펼쳤다.

내용을 확인한 손이 갑자기 멈칫했다.

“가말을… 찾았다고?”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와스락.

꾹 종이를 쥐자 종이가 주먹 안에서 우그러졌다. 그리고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나직하게 짓씹는 음성이 따라왔다.

“그런 곳에 숨어있었군. 그러니 찾을 수가 없었지.”

***

토라는 패스트푸드 식당에 앉아있었다. 저 멀리 키오스크에서 주문하는 자인이 보였다.

그냥 앉아서도 주문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서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는지 굳이 키오스크로 가서 주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토라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엉덩이가 멋지네.”

딱 올라붙은 것이 가죽 바지라도 입으면 남자들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자인은 외적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예쁘다는 소리에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군인이란 점을 감안하면 ‘여자’보다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도가 지나쳐서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도 저럴까 싶었다.

“자인 서머.”

어젯밤에 같이 잔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델마였나. 그녀가 호텔 방 탁자의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28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사관으로 입대해서 시험을 보고 장교가 됐어요. 그래서 나이에 비해서 군에서 구른 짬이 좀 있어요. 델타포스를 거쳐서 현재…….”

아니, 이름이 엠마였던 것 같았다. 엠마는 말을 끌다가 패드를 내리고 말했다.

“그 악명 높은 정보활동국 신하 SAU(특수활동팀, Special Activity Unit) 소속의 공작원이에요.”

“역시 일반 군인은 아니었군.”

토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파 등받이에 뒷목을 기댔다.

그에게 일반 군인을 붙여 보내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레기온 간부의 비밀스러운 취향까지 알아 내온다는 정보활동국의 공작원이라니.

MCTC가 그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가?

엠마는,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엘마였다. 어차피 그쪽도 본명은 아닐 테니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엘마는 패드를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서 이런 언니한테 걸릴까봐 무서울 정도예요. 사하라와 예멘에 2년씩 파병도 다녀왔더군요. 최전방에 있었어요. 자원해서.”

토라는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시 몸을 제대로 일으키고 엘마를 보았다.

“그래서 정보를 가져다준 대가는?”

엘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토라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리고 만만치 않게 악명 높은 뒷동네 정보 거래상답지 않게 매력적으로 웃었다.

“당신이요.”

토라는 빙긋이 웃었다.

“싸게 먹히네.”

엘마는 코웃음을 쳤다.

“비싸게 먹히는 거죠. 정보활동국의 뒤를 파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그러면서 토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의 끝을 물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소문대로 뻑 가게 해줘요, 토라 사타디.”

그때 주문을 끝낸 자인이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토라는 물었다.

“군인이 된 이유가 있어?”

자인은 웬 갑작스러운 질문인가 싶었지만 그냥 대답했다.

“군인이 된 데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그래도 그런 결심을 하기에 열일곱은 좀 이르지 않아?”

자인은 토라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 싶어 눈을 치켜들었다. 토라는 턱을 괴고 있는 그대로 어깨를 으쓱였다.

“타오 대위가 말해줬어.”

타오 대위도 말해준 적 있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인은 별 기색 없이 눈을 내리며 말했다.

“어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기도 하니까요.”

“자인도 그렇고?”

자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이라 계급으로 부를 수 없다면 최소한 성으로 불러주십시오.”

얼마나 봤다고 친한 척 이름을 불러대는 게 마뜩잖았다.

하지만 자인은 그 말을 하기 전에 제 성이 뭔지 더 깊이 생각해보거나 토라 사타디라는 남자를 더 알았어야 했다.

“서머.”

토라의 눈가에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 꼭 여름의 향기가 나는 싱그러운.

“계속 생각했는데 엄청 화사한 이름이야. 부를 때마다 설렐 거 같아.”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토라는 난감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건 무슨 반응인지 자인은 메두사의 눈을 본 양 굳어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라는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가?”

자인은 흘긋 돌아보고는 말했다.

“화장실이요.”

“이 타이밍에?”

“마려운 타이밍이 따로 있어요?”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어서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목석하고 부딪치면 목석이 아프다고 울 여자였다.

토라는 아무 의미 없는 곳에 시선을 맞추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배신하는 법은 모르겠지.’

반면 자인은 화장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까운 한 테이블 옆을 지나갔다. 순간 한 남자를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엎는 동시에 총으로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너흰 뭐야? 왜 우릴 따라다니는 거지?”

계속 미행하는 남자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너 지금 제압당한 거야?」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다른 남자가 황당하게 물었다. 자인이 아니라 제 일행에게. 그러자 탁자에 엎어진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덤빌 줄 누가 알았겠어?」

「이 여자는 쉬라카도 아니잖아!」

「거의 쉬라카 같았다고!」

자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는 남자의 뒷목을 붙잡아 세워 옆벽으로 밀어붙이면서 남자의 미간 정중앙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게 장난감으로 보여?”

그제야 남자는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자인은 남자를 제대로 보았다. 정확하게는 남자의 생김새를.

“당신들….”

말하는데 갑자기 와장창 소리가 났다. 자인은 움찔하고 흘긋 시선만 돌려보았다.

“어머! 죄송해요!”

토라 곁을 지나가던 웨이트리스가 실수로 음료수를 쏟은 모양이었다. 사실 자기 혼자 발이 걸려 휘청거리다가 쏟은 듯 거의 바닥에 쏟아서 토라에게는 묻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 열심히 사과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토라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웨이트리스를 달랬다.

어쨌든 이쪽은 이쪽의 일을 하려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의 팔꿈치에 목이 눌려서 벗어날 수 없던 남자가 일어나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에 누워있었다.

아니, 동체 시력 하나는 남달랐기에 자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히 보았다. 남자가 자인을 붙잡아 옆으로 넘기는 동시에 뱀처럼 미끄러져 빠져나오면서 그녀를 의자에 내던진 것이었다.

이래봬도 이쪽은 훈련받은 특수부대원이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적어도 루아스는 아닌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상대로 그런 탈인간적인 움직임을 보인 주제에 남자들은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너무 급하게 도망치느라 한 번 미끄러지기까지 하고.

자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의자에 누운 그대로, 남자들이 바닥에 미끄러진 동료를 얼른 일으켜 사라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토라가 옆에 와서 손을 내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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