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쭈니>
“괜찮아?”
토라가 옆에 와서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자인은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자인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미행이 붙은 거 같아요.”
“어느 쪽에서?”
“그거야 모르죠.”
말하는데 토라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자인은 당장 손을 잡아 뺐다. 그리고 그리 심각하진 않아도 해프닝이 일어난 제 가게를 보고 인상을 쓰고 있는 주인에게로 갔다.
“미안합니다. 스토커가 나타난 거 같아서요.”
“요즘 스토커들은 단체로 다닌답니까?”
주인도 그다지 변명에 설득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자인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요. 요즘은 역할 분담이라도 하는 모양이네요.”
SAU의 일처리 방식은 이런 식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주인은 다소 회의적이기는 해도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의식은 살아있는지 물었다.
“경찰에 신고해줄까요?”
그러면서 토라를 쳐다보는 게, 저런 덩치가 따라다니는 데 굳이 필요하겠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말하고 자인은 그런 얼굴을 처음 보는 토라로서는 놀랍게도 빙긋이 웃었다.
“직접 죽여 버릴 거거든요.”
왜 등골에 소름이 돋았는지는, 토라는 모를 일이었다.
***
자인과 토라는 호텔에 체크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평소 루틴대로 자인이 먼저 토라가 묵을 방을 확인하고 아무 이상도 없자 말했다.
“그럼 쉬세요.”
토라는 싱긋 웃었다.
“고마워, 서머.”
자인은 성으로 불러달라고 했던 제 입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제가 먼저 그러라했기 때문에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일부러 더 달콤하게 부르는 게 분명했다.
자인은 제 방으로 갔다. 그리고 총을 꺼내 확인하고 다시 제 자리에 넣었다.
끼익.
창문을 열었다. 어두운 골목길이 내려다보이는 아래를 보자 서늘한 밤바람이 얼굴에 훅 끼쳐왔다. 5층이어서 그렇게까지 높진 않아도 인간으로서는 떨어지면 중상을 면할 수 없는 정도는 되었다.
자인은 창틀을 잡아 단단한지 확인하고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신중하게 돌출된 부분을 밟아 옆방의 창문 옆으로 옮겨갔다. 흘긋 창문 안을 들여다보자, 씻으려고 하는지 상의는 탈의하고 바지만 입고 있는 토라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욕실 문이 닫혔다.
자인은 조금 기다렸다가 베란다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창문가에, 주머니에서 스티커 같은 기계를 꺼내 붙였다.
소리를 흡수하거나, 갑자기 데시벨이 높아지는 소리를 일정한 파동으로 유지해주는 소음기였다. 오감이 뛰어난 루아스들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하려다 보니 인류로서는 온갖 기계들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조심히 창문을 열었다. 아까 방을 확인할 때 바깥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내다보고 잠금장치를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열렸다.
솨아아….
욕실 안에서 샤워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자인은 총을 꺼내 쥐고 욕실 문 옆으로 다가갔다. 토라를 제압할 수 있는 기회는 그가 욕실을 나오면서 방심하고 있을 때 한 번뿐이었다. 자인은 물줄기 소리가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아니, 잠깐.’
순간 자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줄기가 서 있는 사람의 몸에 부딪쳐서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일정하게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깨달은 순간 자인은 홱 돌아서며 총을 겨누었다. 토라가 마른 상태로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
하지만 뭔가 더 해보기도 전에 토라가 총을 잡은 팔목을 잡으면서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벽에 부딪치면서 총을 놓치고 말았다.
자인이 다리를 쓰려고 하자 토라는 살짝 물러났다가 그녀를 돌려 뒤에서 몸으로 압박했다. 자인이 몸을 들썩였지만 바위에 깔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 뱀파이어를 상대할 때는 허점을 노려서 단번에 끝내야하는데,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쉬.”
자인이 거칠게 저항하자 토라는 몸을 더 지그시 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해치려는 게 아니야.”
자인은 눈이 찢어질 듯이 뒤에 있는 토라를 노려보았다.
“놔주십시오.”
“설명해줄 테니까 잠깐만 가만히 있어. 중위라면 가만히 있을 거 같지 않아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여전히 자인을 압박한 채로 토라는 현관문을 돌아보고 말했다.
“들어와.”
그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낮에 보았던 남자 둘이었다. 토라는 난감해하는 웃음을 짓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하여간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남자 중 하나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자인은 눈에 힘을 주었다.
“지금 이투하는 움직일 수 없을 텐데요.”
남자들이 ‘이투하’ 소속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MCTC 중앙근위사단 내 제1예거 연대에 소속되어있는 이투하 부대는 현재 전 부대가 행동 금지 조치 상태였다. 기지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남자 중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저희는 이투하가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자인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남자가 덧붙였다.
“이투하 지망생이죠.”
짙은 피부에 검은 눈동자. 남자들의 원주민 같은 생김새는 익숙했다. 그리고 인간이면서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은 더 익숙했다.
쉬라카.
그건 사타디어로 ‘뱀파이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생긴 게 너무 눈에 띈다니까.”
토라가 한숨을 지었다. 자인은 그를 보고 빈정거렸다.
「그럼 지망생들께서 대장님이라도 뵈러오셨나 보죠?」
토라는 흥미롭다는 얼굴이 되었다.
“대단하네. 우리 말까지 할 줄 알다니.”
이투하의 두 설립자 중 하나이자 제 2분대의 대장, 토라 사타디.
토라를 만나는 순간부터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자인이 상부로부터 전달받은 사항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 믿을 수 없이 가벼운 남자가 MCTC의 정예부대인 제1예거 연대 내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평가받는 용병부대의 대장이었다.
“안 놔주실 겁니까?”
자인이 노려보며 묻자 그제야 토라는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요?”
“중위가 가슴에 소중하게 품고 다니는 거.”
자인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자 토라가 선수를 쳤다.
“알고 있으니까 줘.”
정적이 흘렀다. 자인은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찾는다고 하더라도 상부의 명령 없이 토라의 곁을 떠날 수 없었고 지금 토라와 척을 지는 게 해답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자인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얇은 케이스를 꺼내 건넸다. 토라는 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보완재 가운데 들어있는 철제 주사기를 꺼내 들어 올렸다.
그걸 보는 이투하들의-지망생- 표정이 심각했다.
“대장님, 이거 혹시….”
“드디어 우리를 죽일 수 있는 물질을 만들어냈군.”
토라는 주사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러는 토라는 다른 사람 같았다. 토라가 이투하의 대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껄렁거리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는데.
토라는 심각한 눈으로 자인을 보고 물었다.
“이거 성분이 뭐라고 했어?”
자인이 말하려고 하자 토라가 또 말을 가로챘다.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다는 거 아니까.”
“모릅니다.”
자인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가 직접 알아낼 수밖에 없지. 이거 가져가서….”
그러면서 토라가 한 이투하에게 주사기를 건네려고 해서 자인은 발작적으로 말했다.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 사항입니다.”
그러자 토라는 주사기로 자인을 가리켰다.
“그럼 뒤에서 이런 걸 만드는 MCTC는? 이게 레기온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리고 이런 걸 쥐여서 SAU 소속의 특수부대원을 내게 붙여 보낸 심중은 뭘까? 여차할 땐 날 죽일 셈이었겠지.”
자인은 멈칫했다. 토라는 기다린 듯이 말했다.
“그래, 알아. 네가 SAU라는 거.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러 인간 대원을 붙였겠지.”
자인은 한숨을 내쉬고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사진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게 이유입니다. 라토 대장님은 레기온과 접선했습니다.”
사진에는 라토가 어떤 낯선 남자들과 만난 모습이 담겨있었다. 일전에 라토와 잤다는 여자가 말해준 인상착의 그대로인.
“저희 측에 알리지 않고요.”
자인은 덧붙였다.
“이런 행동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죠.”
라토는 자인을 보고, 사진들을 단번에 찢어버렸다. 자인은 별로 놀라지 않은 투로 물었다.
“원본은 따로 있는 거 아시죠?”
“알아. 그냥 퍼포먼스야. 상징적인 거지.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라토는 마티를 배신하지 않아.”
그건 하늘이 푸르다거나 지구가 둥글다거나 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은 투였다.
“그럼 ‘마티’의 의도는 뭐죠?”
자인은 눈에 힘을 주고 물었다.
“그딴 거 없어.”
토라는 거의 욕설을 내뱉듯이 말했다.
“마티는 그 끔찍한 미저리 대공 녀석한테서 도망 다녔을 뿐이야. 하지만 언제까지고 도망만 다녀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했지. 그래서 라토와 내가 이투하를 만든 거야. 대공 녀석을 제거하기 위해서.”
처음에 이투하는 게릴라처럼 정체를 밝히지 않고 소규모로 치고 빠지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이 분명해 보이는 자들의 기묘하게 강한 육체 능력이 MCTC의 시선을 끌었다.
그 당시 레기온의 전신인 SN은 점차 중화기로 무장하며 진짜 테러단체처럼 기세를 불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민병대로는 상대하기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이투하에게도, 정부에게도 탈출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부에겐 민병대의 민첩함과 은밀함이, 이투하에겐 정부의 정규 병력과 무기가 필요했다.
토라는 걸어가서 소파 위에 걸쳐져있는 티셔츠를 집으며 말했다.
“MCTC는 우리에게 함께 대공을 없애자고 했지. 우리는 그걸로 충분했어. 그 자식만 없으면 마티가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
그러고는 성난 듯이 티셔츠를 입었다.
“하지만 MCTC는 대공을 교도소에 가뒀어. 죽이지 않고.”
“법대로 심판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은 보석과 감형 없는 780년형을 받았습니다. 그건 실제로 사형이나 다름없는….”
“스토킹 당해본 적 있어?”
토라는 말을 끊고 말했다.
“1년만 당해도 피해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근데 심지어 가해자가 가족이야. 상대를 죽이면 가족을 죽였다는 오명과 죄책감을 뒤집어쓰게 되지. 그게 얼마나 미쳐버릴 거 같은 상황인지 아느냐고.”
자인은 잠깐 침묵을 지켰지만 결국 별로 변하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정해진 규율이 있고 합의가 있습니다.”
토라는 제 기준에는 융통성 없는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 듯 위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군인들이란.”
이 주제에 관해서는 군인들과 토론해봤자 해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젓고 화제를 돌렸다.
“라토는 어떻게든 끝을 내려고 한 거야.”
“그 결과 인질이 되셨죠.”
“여덟 명.”
토라는 뜬금없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