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39화 (39/110)

39화<쭈니>

“여덟 명.”

토라는 뜬금없이 말했다.

“라토와 함께 레기온으로 들어간 이투하의 숫자야. 전원 살아 돌아왔어. 그게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해?”

뒤에 서 있는 이투하들은 거의 숙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멍청한 자식이 또 혼자 멋있는 척은 다 했겠지.”

토라는 거칠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라토가 그랬지.”

“곧 마티는 자유로워질 거야.”

“난 그게 평소에도 자주 말했듯이 그냥 그럴 거라고 희망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바보가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거야.”

“…….”

자인이 아무 말 없자 토라가 생각해 보란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난 그렇게 생각해. MCTC가 정말 몰랐을까? 라토와 레기온이 접선하는 걸. 오히려 라토를 미끼로 뭔가 알아내려고 했던 건 아닐까? 이투하의 대장이라면 꽤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토라는 만약 진짜로 그렇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다는 투였다.

그리고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은, 이투하의 대장은 두 명이었다. 즉, MCTC 입장에서는 한 명 정도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도 큰 손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토라는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듯 눈빛이 차가웠다.

“사실 이투하는 용병이니까 쓰고 버리기 좋은 패지.”

자인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여태까지 모습은 연기였군요.”

“그건 아닐걸요.”

한 이투하가 잽싸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투하도 질세라 거들었다.

“절대 아니지.”

“행여 그럴라고.”

“닥쳐.”

토라는 말하더니 자인을 보고 한 걸음 내디뎠다.

“미안하지만 몸을 수색하겠어.”

뒤에서 이투하들이 중얼거렸다.

“굳이 대장이 수색할 필요는 없는데.”

“이런 일엔 꼭 솔선수범이죠.”

토라는 눈을 굴렸다. 그리고 자인에게 물었다.

“다른 녀석이 하게 해?”

자인은 꾹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계속하세요.”

토라는 자인의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허리로 내려가는데 자인이 몸을 틀었다.

“잠깐, 간지러워요.”

뻣뻣하기로는 자작나무가 울고 갈 여자가 몸을 꼬면서 내는 소리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토라는 알고 있었다, 이게 작전이라는 걸.

그러니까 작전이라는 걸 알았지만 손안에 쏙 들어오는 허리에서 손을 떼지 못했고, 자인이 갑자기 색을 바꾸는 문어처럼 눈빛이 변하더니 목을 팔로 휘감을 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

뒤에서 자인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토라의 목덜미에 꽂아 넣은 주사기를 누르려는 손짓을 했다.

“대장님, 알고 있었죠?”

이투하들은 세상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저건 분명히 알고도 당했다는 얼굴인데.”

토라는 목이 옆으로 꺾인 그대로 말했다.

“저기, 미안하지만 힘으로 밀어낼 수 있거든.”

“그럼 어디 해보시죠.”

힘으로 제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러면 자인이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신뢰하진 않을 테지만 아마 더.

“중위,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토라는 말했다.

“난 정부와 계약을 깰 생각 따위 없어. 정부는 우리가 레기온으로 넘어갈까 봐 적잖이 경계하는 거 같지만 내가 나쁜 놈들 편을 들면 마티한테 종아리 맞을걸.”

자인은 오히려 지네를 본 것 같은 표정으로 토라를 보았다.

“마마한테 혼날 거 같다는 게 이유입니까?”

“난 라토를 찾고 싶을 뿐이야.”

진지한 목소리였다.

자인이 움직이지 않자 토라는 회의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만약 이러다 라토가 죽으면 정부와 계약을 깰 온갖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

마침내 자인은 주사기를 거두었다. 토라는 목을 주무르며 몸을 돌렸다. 자인은 피를 닦으라고 대충 근처에 있는 수건을 던져주면서 말했다.

“제 독단으로 결정할 순 없습니다.”

“알아. 중위 상사와 이야기하게 해줘.”

이투하들이 작게 말했다.

“대장한테도 카리스마라고 할 만한 게 있었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본다.”

자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투하는 개그맨 집단이었습니까?”

처음 들어보는 소리는 아닌지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 근데 이것도 좀 분대 특성이야. 라토의 분대에는 다 진지 열매를 처먹은 녀석들밖에 없거든.”

“왜 놀랍지 않을까요?”

자인은 대차게 빈정거렸다.

***

화면 너머에 있는 SAU의 책임자는 말이 없었다.

[…….]

토라는 빙긋이 웃었다.

“그럼, 협의가 된 겁니까?”

SAU의 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군을 대표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오로지 안전과 보안을 위해 최대한의 조치를 취해야했기 때문에….]

토라는 손을 들었다.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닙니다. 일단 손을 잡은 이상 좀 더 신뢰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토라는 똑바로 소장을 보고 말했다.

“이투하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투하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건 이 바닥에 유명한 구절이었다. 용병이지만 이투하는 한 번 손 잡은 이상 결코 동료를 버리고 등을 돌리거나 달아나지 않았다. 제 목숨을 버려서도 신의를 지켰다.

그래서 용병이면서도 이투하가 높게 평가받은 것이었다.

“일단 이쪽은 파트로네스의 신변을 군에 맡긴 상태입니다. 인질로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러면 정말 화낼 거니까, 그 정도로 이쪽이 믿음을 보였으면 그쪽도 일말의 신뢰는 돌려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뭔가 중간에 무시할 수 없는 말이 지나갔는데 토라가 워낙 웃는 얼굴이어서 헷갈렸고, 소장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조치하겠습니다. 그럼 서머 중위는 귀환….]

“중위는 절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요.”

토라는 말을 잘랐다.

“SAU의 대원이라면 제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군요.”

그러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여차할 때 절 죽이는 임무를 맡을 정도의 대원이라면 도움이 되고도 남겠죠.”

그게 무언의 압력이라는 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는 날 인질로 잡겠다는 셈이군.’

자인은 생각했다.

토라는 소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말했다.

“중위는 그런 연기 따윈 못 할 줄 알았더니 꽤 자연스럽던데.”

“임무라고 생각하면 꽤 많은 걸 할 수 있죠.”

“어디까지?”

토라는 그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인은 가슴 속의 성벽을 더 높이 쌓았다. 일적인 면에서의 오해는 풀렸지만 이 남자에게 여자를 유혹하는 건 숨쉬기 같은 일이고, 재밌는 게임이었다.

자인은 일부러 눈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누군가에게 아주 큰 고통을 줄 수도 있죠.”

토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인은 물었다.

“이젠 뭐죠?”

“뭐가 뭐야?”

“그래서 라토 대장님은 어떻게 찾을 생각입니까?”

토라와 이투하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

겨우 난리가 정리되고 제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한 자인은 젖은 머리를 털면서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검색창을 켰다.

<이투하, SN 위성 근거지 격퇴…. 인질 1,285명 구출.>

<자유의 전사들.>

<눈부신 전공.>

이투하에 관한 수많은 기사가 떴다.

이투하는 철저하게 군 관련 작전에만 나서기 때문에 민간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명예나 세상의 인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에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고향 사타디 섬이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이슬람 테러단체 IS를 격퇴하는 데 힘을 보탰던 페쉬메르가(쿠르드 자치구의 군사기관)와 비슷한 점이 있었는데 이투하의 목표는 독립이 아니라 오로지 대공의 제거라는 점에 있어서 달랐다.

사실 이투하의 근거지인 사타디 섬의 인구는 한 구 단위도 되지 않는 데다가 계속해서 하락세였다. 폐쇄된 환경 특성상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래서 정부는 꽤 오래전부터 사타디 섬을 개방할 것을 제안해왔다. 하지만 사타디 부족은 완고하게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이투하라는, 무력 면에서나 영향력 면에서나 무시할 수 없는 군사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도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진 단순히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가 삶의 방식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보다 가말을 감추려던 의도가 더 크지 않았나 싶었다.

이투하는 MCTC에도 가말이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꽁꽁 숨겼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MCTC가 바깥 세계로부터의 울타리가 돼줬기 때문에 가말은 지금까지 숨어 살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사타디 섬은 애저녁에 누군가에게 발견돼도 발견됐을 것이다. 현재 지구에 진정한 오지란 남아있지 않고, 도리어 그런 곳이 있다면 인간은 더 탐험하지 못해 안달하니까.

화면에서 시선을 뗀 자인은 제 총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긴 하루였기 때문인지 피곤함이 밀려왔다.

총을 쥔 채로 잠깐 잠들었던 모양이다.

기척.

자인은 홱 총을 겨누었다. 총구 끝에 토라가 한쪽 눈썹을 추켜들고 있었다.

“잠든 거 같아서 옮겨주려고.”

안도한 자인은 총을 쥔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분명히 문을 잠갔을 텐데요.”

“그거 여는 게 뭐 어렵나.”

자인은 기가 막혀서 그냥 쳐다보았다. 그러자 토라는 그녀에게로 숙였던 허리를 펴면서 일어나 다른 쪽으로 갔다.

“대답이 없어서.”

자인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벨을 눌렀으면 제가 안 깼을 리가 없는데요.”

“당연히 안 눌렀지. 침입자가 있으면 어떡해.”

황당해서 보다가 자인은 더 황당해서 물었다.

“잠깐, 술은 왜 따는 겁니까?”

“왜긴. 마시려고 따지. 중위도 한잔해.”

바에서 술을 따온 토라는 제 방인 양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자인은 인상을 썼다.

“죄송하지만 전 임무 수행 중입니다.”

“그래. 나도 별로 기대하진 않았어.”

그러면서 토라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약간 센티한 기분이 드는 사람 같은 얼굴로 말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중위가 진심으로 날 지켜주려고 하는 걸 보면.”

“제가 그러는 게 가소로워 보이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임무를 다할 뿐입니다.”

토라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꼬였어? 내 말은….”

토라는 말하려다가 한쪽 어깨를 으쓱이고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말이 맞긴 하네. 가소롭다는 게 아니고, 스펙으로만 보면 날 보호해준다는 게 말도 안 되는데 이상하게 중위는 날 보호해줄 거 같아서. 그게 더 이상해.”

“전 군인이니까요. 민병대 대장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시민이죠.”

“얼마나 많은 이투하들이 MCTC와의 작전 중에 죽은 줄 알아?”

“그건….”

자인은 순순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이투하의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토라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자인은 에두르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걸 모르는 성격이었다.

토라는 말했다.

“대개 이투하들은 태어날 때부터 봐왔던 친구들이야. 사실 처음에는 라토와 나 둘이서 대공을 죽이려고 했어.”

“단둘이서요?”

“그 미저리 녀석 때문에 섬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마티를 위해서 뭔가 결단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호기로운 녀석들 몇이 같이 하겠다고 덤볐고… 그게 어느새 떼가 됐어.”

토라와 라토는 고향 사타디 섬이 어떤 분쟁도 없는 곳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 섬에 있는 모든 부족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둘은 패배를 모르는 전쟁의 신이자 부족의 수호신으로 등극해버렸고, 부족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을 우상처럼 따랐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다. 불사하는 수호신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는, 거의 맹신에 가까운 믿음.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전장에서 겁을 먹거나 물러설 리가 없었다.

이투하의 전설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자인도 숙연한 정적 속에서 같이 그 사실을 곱씹었다.

「우리 말은 어디서 배웠어?」

토라는 문득 사타디어로 바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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