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40화 (40/110)

40화<쭈니>

「우리 말은 어디서 배웠어?」

토라는 문득 사타디어로 바꿔 물었다. 자인도 제법 자연스러운 사타디어로 대답했다.

「이투하 지원부대에서 오래 근무했던 분께 배웠습니다.」

「아, 그렇군. 열정이 대단하네.」

사실 온갖 기상천외한 능력자들이 모여 있다는 SAU에서도 특별히 감시역으로 보낼 정도면 사타디 부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언어까지 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화자가 얼마 되지 않은 언어라 쓸모라고는 이투하와 대화할 때밖에 없으니까.

토라는 물었다.

「이투하의 어떤 점이 중위의 흥미를 끌었어?」

「인간이면서 그렇게 강할 수 있다는 점이요.」

자인은 머릿속의 명판에 박혀있는 말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어쨌든 한 번 신의를 맺으면 온몸을 투신한다는 점.」

연한 갈색 눈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닮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토라는 말이 없었다. 갑자기 정신이 든 자인은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방에 안 돌아가실 겁니까?”

토라는 묘하게 느리게 턱을 괴었다.

“흡혈도 하지 않는 뱀파이어를 그렇게 경계할 거 있어?”

흡혈하지 않는다고 해서 뱀파이어가 뱀파이어가 아니진 않았다. 위험하기로는 더했다.

“잘 시간이니까요.”

토라는 소파의 팔걸이를 짚고 일어났다.

“알았어. 중위 서슬에 술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문으로 다가갔다. 자인은 문을 잠그기 위해 따라갔다. 그런데 방문 앞에 다다른 토라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

“주무세요.”

자인은 빨리 토라를 내보내고 싶었으므로 그냥 인사했다. 토라는 숨을 길게 내쉬며 웃었다. 꼭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토라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자인은 토라가 남긴 미소의 여운에 한동안 닫힌 문을 짚은 채로 서 있었다. 그러다 흠칫 정신을 차렸다.

‘아냐, 난.’

토라에게 덤벼드는 수많은 여자들을 제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중 하나가 되고 싶지도, 그들을 모두 물리쳐야 하는 입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

“꽤 마음에 드신 거 아닙니까?”

한 이투하가 물었다. 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봤자 날 싫어하는 걸.”

“대장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습니까?”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어.”

“심보 참 희한하시네요, 대장 좋다는 그 많은 여자 다 놔두고 꼭 자기 싫다는 여자들만 좋아하는 건.”

다른 이투하가 옆구리를 찔렀다.

“야.”

토라는 기가 찼다.

“아주 내가 만만해 죽겠지?”

“설마요. 존경하는 대장님이신 걸요.”

토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밤거리에 불을 밝히고 있는 호텔을 돌아보았다.

“가자.”

말하고 돌아섰다. 이투하들은 그 뒤를 따랐다.

“대장님.”

갑자기 한 이투하가 어딘가를 보고 말했다.

“절 안심시킬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자장가를 불러주셨어야죠.”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그대로 멈춰라’ 노래가 나온 것처럼 멈추었다.

어두운 골목 사이에 자인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토라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먹힌 줄 알았는데.”

“연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시더군요.”

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위를 무시한 건 아냐. 인간을 데려갈 곳이 아닐 뿐이야.”

어쨌든 이투하들은 거의 탈인간 취급을 받으니까 열외고.

자인은 팔짱을 풀고 걸어 나왔다.

“맞아요. 전 인간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SAU 대원이 되려면 어디까지 할 줄 알아야 되는지 아세요?”

자인은 토라를 지나쳐 앞서가면서 말했다.

“대답은 하실 필요 없어요. 이해하셨을 테니까요.”

토라는 하늘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하여간 특수부대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 위험한 곳에 자기를 빼고 간다는 걸 견디질 못했다.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자각하는 걸-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무엇보다 끔찍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럼 죽지 마. 중위.”

자인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토라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중위가 죽으면 날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자인은 어느 순간부터 토라가 자신을 계급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그도 이쪽을 안심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친한 척하거나 꼭 유혹하는 것처럼 굴었던 건.

자인은 무표정하게 말하고 먼저 걸어갔다.

“제가 죽는 데 왜 대장님이 책임감을 느끼죠? 이해가 안 되네요.”

뒤에서 이투하들이 중얼거렸다.

“대차게도 까이네.”

토라는 눈을 굴리고 이투하들에게 사나운 눈빛을 쏘았다.

“진짜 혼나기 전에 그만해.”

***

토라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며칠 전에 중위가 자리를 비웠을 때 어떤 사람이 이걸 건넸어.”

비닐 팩 안에 넣어둔, 상아로 깎은 장식이 달린 가죽 목걸이였는데 피에 젖어있었다.

피가 거의 검은색으로 굳어있어서 진흙처럼 보였지만 그게 피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낯익은 물건이었다. 자인은 같은 목걸이가 걸려있는 토라의 목을 보았다.

“라토 대장님 건가요?”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가 깎아준 거야.”

“건넨 사람은 잡았나요?”

“그냥 행인이었어. 전해주기로 한 대신 돈을 받았다더군.”

자인은 어둠에 잠긴 길거리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군요.”

“맞아. 내가 라토를 찾는 걸 알고 있어.”

자인은 다시 토라를 보았다.

“그래서요? 이걸로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나요?”

“단서를 아는 녀석을 알 수 있지.”

“대장님.”

토라가 그 말을 한 타이밍에 한 이투하가 불렀다.

“가시죠.”

그러면서 쇠사슬로 묶어둔 창고의 문을 열었다.

끽. 덜컹.

“들어와.”

토라는 자인에게 고갯짓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자인은 따랐다.

워낙 외진 곳인 데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어서 내부는 빛 한 점 없이 깜깜했다.

자인은 야간투시경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있어서 인간치고 밤눈이 밝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어둠 속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 손이 다가왔다.

“보여?”

토라의 목소리였다.

자인은 손목 밴드를 눌러 플래시를 켰다.

“이제 보이는군요.”

토라는 앞서 가는 자인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철벽이 형님하자고 할 여자였다. 진짜 나중에 한 번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을 정도였다.

자인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버려진 창고는 반쯤은 비어있고 반쯤은 덩달아 버려진 물품들이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의자에 앉은 채 기둥에 묶여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인이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라토와 잤다는 여자였다, 그 묘하게 가말을 닮은.

기가 막혀 토라를 보자 자인이 할 말을 예상했는지 그가 먼저 말했다.

“그때 찾아갔을 때 날 보자마자 내 목걸이를 보더라고. 마치 ‘네가 왜 거기 있냐.’ 싶은 눈이었지. 금방 쌍둥이가 있다고 떠올랐는지 표정을 수습하긴 했지만.”

“고작 그걸로요?”

“이런 종류의 감은 별로 틀리지 않아.”

그러고 토라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라토가 사라지기 전 모든 연쇄의 고리는 이 여자한테서 시작했어. 논리적으로도 이 여자가 제일 수상하지 않아?”

“하지만 근거가 부족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박히면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니까. 가령 이 여자는 ‘라토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상대’라거나 ‘아무것도 모른다’거나. 그 점을 이용한 거겠지.”

토라는 주머니에서 낯선 총을 꺼내 그걸로 여자를 가리켰다.

“정체가 들킬 거 같으니까 이걸 막 갈기더라고.”

자인은 여자를 보았다.

“근데 꼴은 왜이래요?”

여자는 이미 제법 얻어맞은 몰골이었다.

“손봐줬지. 이투하는 신사지만 테러리스트에겐 자비가 없거든.”

자인은 사타디 부족엔 서양과 같은 레이디 존중 문화가 없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가말이나 자신을 대할 때 군인으로서 대해주길 바랐던 자인으로서는 기분 나쁠 정도로 매너가 있었던 걸 반추해보면 이 여자는 여성이기 전에 제대로 테러리스트 대접을 해준 데 가까워 보였다.

토라는 말했다.

“그날 라토에게 약을 먹였다더군.”

“라토 대장님은 속아서 드셨고요?”

“이 여자가 마티를 닮았잖아. 나보다 마티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라토거든. 그 녀석은 마티의 사진도 밟지 않을 거야.”

“예수입니까?”

자인이 황당해서 말하자 토라는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 정도 급.”

자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설마하며 물었다.

“그럼 잤다는 건…?”

“안 잤어. 잤다고 한 거지. 라토한테 많은 재주가 있긴 하지만 늘씬하게 뻗은 상태로 거길 세울 정도로 재주가 좋진 않아. 물론 그 녀석이 한때 마티를 좋아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질풍노도의 시기에….”

토라는 말하다가 헛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거 이야기했다고 라토한텐 이야기하지 마. 화낼 테니까.”

아무튼 토라는 붙잡혀있는 여자를 보고 골치 아파하며 말했다.

“하지만 꽤 질겨. 역시 훈련받은….”

그때 자인이 토라 앞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거의 볼이 터지는 소리가 나서 토라와 이투하들도 놀랐다. 이어서 자인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거의 잡아 뽑듯이 고개를 일으켰다. 그리고 여자의 볼에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만 물을게. 기억해. 딱 한 번이야. 라토 대장님은 어디 있어?”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인은 바로 여자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여자는 몸을 들썩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토라는 망연히 말했다.

“이거 불법인 거 알지?”

이쪽도 몇 대 때리긴 했지만-물론 뱀파이어인 토라가 때리면 과실 치사가 될 수 있으니까 이투하들이- 고문까진 아니었다.

자인은 고개만 돌려 서늘하게 말했다.

“신고하시려고요?”

“그건 아니지만.”

토라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자인은 몸을 일으키고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라토 대장님을 찾고 싶으신 거라면 토 달지 마세요.”

뒤에서 이투하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실 그들은 이래저래 법 따지고 인권 따지는 문명 세계가 쓸데없이 까다롭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동안 심약한 사람에겐 별로 좋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동안 토라와 이투하들은 거의 관중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그들마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토라는 넌지시 물었다.

“SAU에서는 이런 것도 가르쳐?”

자인은 몸을 들었다.

“가르치긴 하지만 이건 제 몸으로 배웠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더 물어보기 전에 자인은 다시 여자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땀이 흘러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무튼 자인도 여자가 끈질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돈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진짜 멍청한 거야. 어차피 쓸 수도 없을 텐데.”

“돈 때문이… 아냐.”

여자는 처음으로 쉰 목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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