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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41화 (41/110)

41화<쭈니>

“돈 때문이… 아냐.”

여자는 처음으로 쉰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테….”

그러고는 여자가 기절하려고 하자 자인은 머리를 잡아 고개를 다시 젖혔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물 줘요.”

자인의 말에 이투하 하나가 얼른 물을 떠서 건네주었다. 자인은 가차 없이 여자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테 뭐라고?”

여자는 젖혀졌던 눈알을 다시 제대로 갖고 왔다. 그리고 천장에 시선을 맞추고 자인은커녕 현실을 보고 있지도 않은 것 같은, 이상한 열기에 젖은 눈으로 속삭였다.

“테렌티, 아세 수에이 에우스타키스….”

자인은 토라를 보았다.

“정신 나간 여자인 건 알았어요?”

“멀쩡해 보였는데.”

토라는 중얼거렸다.

“들어본 적 없는 언어 같지만 혹시 나오나 찾아봐.”

그리고 이투하들에게 말하고 여자에게 다가서서 물었다.

“이봐. 누가 라토를 데려갔어?”

여자는 천장의 한 지점에 시선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토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티를 닮아서 마음이 편하질 않아.”

“당신들이 이럴 줄 아니까 이 여자를 쓴 거죠.”

자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때 검색을 해본 이투하들이 말했다.

“안 나오는군요. 언어 DB(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있는 언어도 아니에요. 헛소리한 거 같은데요.”

자인은 다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제대로 말해. 라토 대장님이 만났다던 남자들이 누구야?”

여자가 갑자기 눈을 퍼뜩 내려 자인을 보았다. 엑소시스트가 필요한 것 같은 느낌에 순간 자인도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

“레기온.”

눈빛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독기가 펄펄 끓었다.

“라토 대장이 먼저 레기온을 찾아온 거야.”

“라토가 그럴 리 없어.”

토라는 단박에 반박했다.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사서함 WZ-2153에 있는 파일을 들어봐. 비밀번호는 0813야.”

토라는 사서함에 들어있는 파일을 찾아 재생했다.

[도와주는 조건은 우리 섬이야.]

그리고 흘러나오는 건 라토의 목소리였다.

[태평양 연합은 우리 섬이 자기들 영토라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어. 우리 사타디 부족이 자기들 국민이라는 거지. 이투하는 자기들 군대고.]

자인이 쳐다보자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그 일 때문에 토라와 라토는 다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확실히 이투하는 어느 정부나 탐낼 만한 전력이었고, 아슬아슬하게 사타디 섬 근처까지의 바다를 소유한 태평양 연합도 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투항하지 않으면 무력 진압하겠다고 했어. MCTC가 중재에 나섰지만 연합이 MCTC에 내는 분담금을 생각하면 섣불리 나설 수 없을 테지. MCTC의 전쟁에서 내 형제들이 죽어 나갔어. 근데 MCTC가 하는 꼴을 봐.]

라토는 나직한 분을 토했다.

[애초에 문명 세계의 인간들 따위, 믿는 게 아니었어.]

“웃기지 마!”

토라가 내리치는 주먹에 와르르 책상이 부서졌다.

“이게 라토 목소리라고 어떻게 믿지?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여자는 기분 나쁘도록 빙글거렸다.

“그렇게 의심이 된다면 본인 눈으로 확인해봐.”

갑자기 이투하들이 홱 돌아보았다.

“대장님.”

이어서 기척이 났다. 일부러 내는 기척이었다. 이쪽에서 눈치채도록.

그리고 검은 물이 밀려들 듯이 남자들이 나타났다.

“토라 대장님.”

선두에 있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정확하게 토라를 보면서 말했다. 누가 이투하의 대장인지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남자는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 손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모시겠습니다.”

자인은 기가 막혔다. 누가 이런 노골적인 초대에….

생각하는데, 남자를 쳐다보던 토라가 앞으로 나섰다. 따라나서려는 듯이. 자인이 놀라서 토라의 팔을 잡았다.

“함정일 수도 있어요.”

아니, 분명히 함정이었다.

하지만 라토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라토를 찾아야 돼.”

“MCTC에 정식으로 구출 작전을 요청해요. 어쨌든 라토 대장님이 레기온과 접촉하면서 알아냈을 정보의 가치만 해도 상부를 설득할 수 있는….”

“지금 당장 뛰어가도 부족할 판에 그 지리멸렬한 프로세스를 다 거치란 말이야?”

토라가 겪어보지 못했다면 오히려 설득됐겠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잘 알기 때문에 역시 그걸 잘 아는 자인이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왜 문명 세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알아?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야.”

토라답지 않게 거친 어조였다. 자인은 눈가가 움찔했다. 사실 ‘토라답다’라는 것도 그녀가 만들어낸 편견이겠지만 어쨌든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확률을 따지는 거예요.”

하지만 토라는 전에 본 적 없이 차갑고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필요 없어. 특히 여자는.”

토라도 어쩔 수 없는 뱀파이어였다. 자인은 깨달았다.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이투하 덕분에 MCTC가 질 뻔했던 전투에서도 승리해왔던 전적을 고려하면 토라로서는 과신하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뱀파이어들의 기본 성향은 일단 제 강한 힘에 지나친 자신감이 있는 편이었다.

자인이 더 할 말이 없어 보이자 토라는 돌아섰다. 그리고 이투하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남아.”

“대장님.”

이투하들이 반발했다. 하지만 토라는 단호했다.

“아직 훈련 중인 너희들이 갈 곳이 아니야. 차라리 나 혼자가 나아.”

라토의 전례를 생각하면 더욱.

“하지만….”

이투하들이 다시 반박하려고 했지만 토라는 더 말을 듣지 많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남자들이 따랐다.

자인은 눈에 꾹 힘을 주고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식당 내부가 식사하는 재소자들로 웅성거렸다.

가장 사소한 죄목이 2급 살인일 정도로 흉악범들만 모여 있는 곳도 점심시간만은 평화로웠다.

어느 순간 한 재소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식사를 하려다가 작게 기침을 했다. 식판에 무언가가 튀었다.

“에이….”

옆에서 밥을 먹던 재소자가 욕을 하며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쾅.

기침을 한 재소자가 식판에 얼굴부터 거꾸러지며 쓰러졌다. 다들 혼비백산했다.

“뭐야? 왜 저래?”

“전부 움직이지 마!”

식당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교도관들이 외쳤다. 그리고 황급히 응급상황 무전을 넣었다.

“저 녀석 어디 아픈….”

말을 하던 다른 재소자가 갑자기 입을 막았다. 무언가 치받혀 올라 컥 소리를 낸 순간 눈, 코, 입 전부에서 피가 터졌다. 그리고 식판을 엎으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와장창. 우당탕.

그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재소자들이 온몸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었다.

바닥에 엎어져 나뒹구는 식판과 음식물 사이로 핏물이 넘실거리며 번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봐, 왜 그…! 헉! 주, 죽… 죽었어!”

“잠깐, 몸이 이상….”

“여기 뭔가 이상해! 나가게 해줘!”

재소자들이 우르르 식당 문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멈춰!”

교도관들이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재소자들이 멈추지 않자 총을 발포했다. 식당은 금세 총성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럼에도 흥분한 재소자들이 밀려드는 걸 멈추지 않자 교도관들은 황급히 식당 밖으로 나가 문을 잠갔다.

쾅! 쾅쾅쾅!

재소자들이 철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살려줘! 살, 살려…!”

교도관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개중 한 사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온몸에서 피를 뿜어냈다.

놀라고 있을 새도 없었다. 다른 교도관들도 목을 붙잡고 파랗게 질리더니 피를 토하며 쓰러졌기 때문이다.

멀리 독방에 앉아있는 쿠니스는 조용히 눈을 떴다. 진압 부대가 신속하게 이동하는 소리가 문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쾅!

폭발음이 작렬했다.

순간 철문 틈새로 훅 열기와 짙은 먼지가 밀려들 정도였다.

이어서 좀 더 작은 폭발음이 나고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새까만 연기 사이로 지옥의 군대처럼 나타나는….

야간투시경과 방독면 때문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검은 무장을 한 사람들.

“늦었군.”

쿠니스는 일어났다. 그리고 재소자용 실내화를 신은 발로 남자들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쿠니스는 소란이 이는 복도를 한 번 돌아보고, 의족을 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장을 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내일부터 감방이 남아 돌겠군요.”

인류의 악몽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대공은 탈출하기 위해서 재소자들을 전부 죽이는 방법도 불사했다. 아니, 오히려 그러는 데 기꺼워 보였다.

쿠니스는 똑바로 걸어가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저 녀석들한테 당한 피해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는 되겠지.”

어차피 살 자격조차 없는 흉악범들만 모여 있는 곳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교도관들은 무슨 죄였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

도영은 사랑을 포옹했다가 놓았다. 이어서 사랑은 가말을 안아주었다.

“또 오렴.”

“또 올 거야. 엘리오, 사랑 좋아.”

가말이 막아도 올 거란 투로 말하자 사랑은 피식 웃어버렸다. 엘리오는 도영에게 말했다.

“다녀와라.”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지금 도영처럼 젊은 시절 엘리오는 자주 집을 비웠고 어린 도영은 어머니 사랑의 손을 잡고 늘 아버지를 배웅했다.

그 시절 도영은 몰랐지만, 가족이 집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동안 아버지는 항상 사지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한때 그걸 겪었던 사람으로서 잘 알 것이다. 아들이 또 사지로 나간다는 걸.

그럼에도 엘리오는 웃으며 배웅했다. 특히 이번에는 더 진심으로. 가말이 도영 곁에 있다는 게 이상하게 안심되었기 때문이다.

도영과 가말은 돌아서서 게이트를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가말이 돌아보고 활짝 웃었다.

***

도영은 안전벨트를 풀고 스포츠 백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가말은 EOD(폭탄제거반) 대원이 폭탄해제키트를 들 듯이 소중하게 대용량 젤리 박스의 손잡이를 들고 기지로 들어온 수송기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나와 있는 타오 대위가 알은체했다. 그리고 바로 가말에게 말했다.

“가시죠.”

돌아오자마자 면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가말을 돌아보았다.

“갔다 와.”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도영도 같이 가자고 떼를 썼을 법도 한데 마음이 통한 탓인지 떨어지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도영은 젤리 박스의 손잡이를 쥐고 가져가며 말했다.

“그건 이리 주고.”

“아, 응. 다녀올게.”

“저녁에 봐.”

가말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은 그녀를 지긋이 보았다. 순간 둘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확연하게 달콤한 기류가 흐르자 타오 대위가 어리둥절해하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뭔가를 더 알기 전에 가말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타오 대위는 어쩔 수 없이 가말을 따라갔다.

그때 도영의 뒤에서 한 중사가 물었다.

“두 분 어쩐지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이는 건 제 착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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