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42화 (42/110)

42화<쭈니>

도영의 뒤에서 한 중사가 물었다.

“두 분 어쩐지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이는 건 제 착각인가요?”

“네, 착각입니다.”

도영은 걸어가면서 시미치를 뚝 뗐다. 하지만 한 중사는 능글맞게 웃었다.

“누가 모른다고.”

한편 가말은 방으로 들어갔다. 일반 사무실 같은 방에는 몇 번 면담을 한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교수가 웃으며 물었다.

“휴가를 다녀오셨다고요?”

“응. 프랑스 다녀왔어. 몽펠리에 알아?”

“알죠.”

교수는 가말을 살피더니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가말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사람이 이런 얼굴을 하는 이유는 보통 몇 가지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교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그런 거야?”

가말은 도리어 물었다.

“도영은 내 남자친구야?”

교수는 허허 웃었다.

“사귀는 사이라면 그렇지 않을까요?”

“사귀는 사이….”

가말은 그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그녀에게 남편은 둘이나-비록 부부였던 날은 하룻밤씩이었어도- 있었었지만, 남자친구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도영은 그녀의 첫 남자친구였다.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교수는 가방을 테이블에 올렸다.

“아무튼 시작해볼까요?”

“응.”

가말은 돌아보았다.

칙.

그때 교수가 얼굴에 스프레이를 쐈다. 가말은 순간 자신이 뭘 맞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행복한 기분에 젖어 방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교수가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교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기절할 뿐입니다.”

***

갑자기 방 안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밖을 지키고 있던 군인은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

가말이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교수가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는 군인을 보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기절하셨습니다.”

군인은 급히 가말에게 다가가 살폈다. 가말은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군인은 밖을 보고 외쳤다.

“긴급 상황!”

그러자 금세 다른 군인들이 들어와 상황을 확인했다.

교수는 가방에서 소음기가 달린 총을 발사했다. 몇몇 군인이 재빨리 반응해 총을 꺼냈지만, 그 옆에 있는 군인들이 더 먼저 총을 쐈다.

교수는 고갯짓했다. 그러자 남아있는 군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말을 안아 올렸다. 가말은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휴게실에 들어오자 한 중사가 젤리 박스를 보고 물었다.

“근데 이건 웬 겁니까?”

물으면서 이미 자연스럽게 박스를 열어 젤리를 꺼냈다. 도영은 말했다.

“먹지 마세요. 가말 겁니다.”

한 중사는 젤리를 먹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고는 젤리를 다시 박스에 넣었다.

다다다!

그때 갑자기 복도에서 사람들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영과 한 중사는 의아한 얼굴로 바깥쪽을 보았다.

쾅!

이어서 자동문이 거세게 열렸다. 즉, 누군가가 자동문이 열릴 새도 기다리지 못하고 힘으로 열어젖힌 것이다.

다른 팀의 루아스인 휴 대위였다. 늘 차분한 편인 그가 웬일로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탈옥했답니다.”

“누가요?”

한 중사가 물었다. 사실 묻긴 하지만 그때까지도 큰 위기감은 느끼지 못하는 투였다.

다음 말을 하기 직전 휴 대위의 얼굴이 무어라 형용하기 힘들게 변했다.

“대공이.”

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휴 대위 뒤에 헐레벌떡 타오 대위가 나타났다.

“소령님! 가말 씨가…!”

***

배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다.

차를 타고 부둣가로 온 남자들은 거기서 다시 토라를 요트에 태웠다.

‘아무래도 근해에 있는 섬을 기지로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군.’

토라는 생각했다.

이 근방은 부자들이 별장으로 이용하는 사유지 섬이 많은 곳이었다. 그들 사이에 뱀파이어 테러단체의 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뒤로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숨겨야할 것이 많은 부자들이 자기들 머리 위로 감시 드론이라도 날아다닌다면 전방위적으로 압력을 넣을 테니 어떻게 보면 숨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특히 소규모 기지라면 눈에 띄지 않고 중요한 인질을 숨기기 좋았다.

마침내 배는 간이 항구에 멈추었다.

“내리시죠.”

양복을 입은 레기온 대원이 말하고 먼저 내렸다. 따라서 토라는 섬에 발을 디뎠다. 얼핏 보기엔 무인도 같아 사방이 어둡고 기척이 없었다.

거기서 다시 차를 타고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성한 나무 사이로 웬 부호의 저택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토라는 흘긋 옆을 보았다.

“요즘 테러리스트들은 취향이 고상하군.”

“저희라고 꼭 땅굴에서 흙 파먹고 살아야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레기온 대원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왜 라토를 찾을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외관이 이렇게 평범해 보이니 어쩌다 감시 드론이 훑고 갔어도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어떤 부호의 집으로만 보였겠지.

그리고 서류상으로도 평범한 부호의 집으로만 등록되어있을 거라는 데 꽤 많은 돈을 걸 수 있었다.

“어쨌든 부럽군요.”

레기온 대원이 갑자기 말했다.

“이래봬도 이쪽의 아지트인데 혈혈단신으로 올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만용인 거 같진 않고….”

그러면서 토라를 쭉 훑어 내렸다.

“이름이 있는 혈통의 자신감인가요?”

모든 혈통은 어디선가 시작되지만 감염이 반복될수록 피는 옅어지는 법이었다. 따라서 세대교체가 자주 일어나는 혈통은 점차 옅어지고 시작된 수원지도 흐릿해졌다.

혈통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름이 있는 혈통’이란 곧 강하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토라는 대놓고 레기온 대원의 말을 무시했다. 그럼에도 레기온 대원은 웃는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

이내 차가 멈추고 토라는 차에서 내렸다. 사방으로 울창한 숲에서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원시 섬에서 살아온 그에게 이런 환경은 제 집에 다름없었지만 이곳에는 왠지 모르게 음산한 공기가 맴돌았다. 아마 공기에서 유난히 습한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토라라고 아무 대책 없이 이곳까지 제 발로 온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겐 늘 확실한 계획이 있었다.

탕.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 켜졌다. 그리고 그를 무대에 서 있는 배우인 양 비추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해?”

이어서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중저음의 나직한….

“아예 적진에 파고 들어가 인질을 구하기만 하면 그 잘난 몸뚱어리로 돌파해 나올 수 있다고.”

저택 문이 열리고 하이힐 소리와 함께 라헬이 나타났다.

라헬.

레기온의 모집책이자, 도영을 붙잡았다가 사타디 섬 근처에 떨어뜨린-비록 실수였지만- 장본인이었다.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짙은 남색의 벨벳 정장 원피스가 목까지 올라와서 제법 차분한 스타일이었지만 어쩐지 벌거벗은 것보다 야한 느낌을 주었다. 몸의 곡선을 전부 내보이기 때문이었다.

라헬은 토라를 보더니 눈매를 휘며 웃었다.

“이건 또….”

색이 짙은 붉은 눈이 흡사 손으로 훑듯이 그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동족은 별로 취향이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라토는?”

토라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그러자 라헬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진득하게 웃었다.

“정의와 자유의 투사, 이투하. 소위 정의롭다고 하는 너희들의 약점이 뭔지 알아?”

그녀 뒤로 문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 같은 악당들이 어디서 뒤통수를 칠지 상상을 못 한다는 점이야.”

그리고 문 너머에서 두 남자가 자인을 끌고 나왔다. 토라의 미간이 움찔했다. 라헬은 훗 웃었다.

“혼자 떨어진 인간 여자를 붙잡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말하고는 자인을 보고 덧붙였다.

“뜨거운 죽 먹기 정도는 됐군. 그래도 SAU라는 거겠지.”

그리고 혼자 연극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인정해. 인간들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어. 어떤 천재적인 운동선수가 나타나서 절대 넘지 못하던 마의 점수를 넘고 나면 갑자기 다른 선수들도 그 점수를 넘게 되는 것처럼 평균 한계치가 높아지는 거지.”

“그 여자는 MCTC에서 붙인 감시역이야.”

토라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라헬은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럼 필요 없겠네.”

그러자마자 자인의 목을 향해 손을 날렸다. 자인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느새 나타난 토라가 라헬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라헬은 토라의 가슴을 짚으며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무른 남자는 티가 나.”

토라는 그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단단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걸.”

이런 때에까지. 자인은 눈을 굴렸다. 토라가 성적인 농담을 한다는 걸 깨달은 라헬은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네.”

그사이에 토라는 자인을 보고 물었다.

“그 녀석들은 어디 가고 혼자 붙잡혀 온 거야?”

사실 토라는 이투하들을 일부로 두고 온 거였다. 자인을 지키라고. 자인이 혼자 떨어지면 노릴지도 모른다는 건 나쁜 놈의 머리가 아니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자인만 끌려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따돌렸어요.”

“어떻게….”

아니,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직 지망생들인데 죽게 할 순 없잖아요.”

자인의 말에 토라는 정말로 기가 찼다.

“그 녀석들이 진짜 지망생이었겠어?”

오히려 일군 중의 일군이었다.

모든 이투하가 MCTC에서 일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라고 바보가 아닌데 모든 전력을 MCTC에 묶어놨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자인은 오히려 기가 차단 얼굴이 되었다.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요?”

“그걸 꼭 말해야 알아?”

한 번이라도 합을 나눠보면 딱 감이 오지 않느냐는 말이다.

자인은 인상을 썼다.

“지금 누구한테 짜증을 내는 거예요? 숨긴 건 그쪽이면서?”

토라는 참을 인을 삼켰다.

“중위한테 짜증내는 거 아냐. 그 녀석들한테 화난 거지. 이투하에서 내쫓아버릴 거야.”

괜히 일군을 시켜준 게 아닌데 가장 중요한 때에 제 역할을 못했으니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둘이 사귀어?”

둘을 지켜보던 라헬이 흥미롭다는 어조로 물었다.

“미쳤어?”

자인은 거의 혐오하는 표정을 지었다. 토라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미쳤을 거까진 뭐야?”

그냥 너무 썩은 표정을 짓기에 한 말이었을 뿐인데 라헬은 그의 반응을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축하해. 지금 자기 가치가 좀 더 올라갔어.”

그러면서 훗 웃었다.

“난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둔 남자를 범하는 게 좋거든.”

토라는 인상을 썼다. 그는 세상 모든 여자가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이건 뭐….

“진짜 변태야? 그리고 난 이쪽을 좋아하는 게….”

갑자기 기척이 느껴져서 홱 돌아보는데 가죽 장갑을 낀 아까 그 레기온 대원이 그를 향해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마 재질은 일반 야구용이 아닐.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라헬이 말했다.

“피하지 마.”

순간적으로 자인의 목을 붙잡고 있는 남자가 손에 힘을 주는 모습이 보였다. 토라는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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