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쭈니>
퍽 소리가 났다.
인간이었다면 이런 둔기로 맞아도 머리가 날아갔을 강도에 토라는 휘청거리다가 발을 디디고 섰다.
“토라!”
자인이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그리고 몸을 비틀었지만 손이 묶인 상태로 루아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야구 배트를 든 레기온 대원이 토라를 붙잡아 오금을 걷어차서 무릎을 꿇게 만들고 어깨를 붙잡아 일어날 수 없게 했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졌다. 윤기가 나는 검은 하이힐이 눈앞에 와 섰다.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줄까?”
라헬은 토라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3년 전에 말이야. 대공은 붙잡히지 않았어.”
토라는 의아해하는 눈을 들었다.
대공은 분명히 체포되었다. 재판을 받는 자료화면까지 봤는데 무슨 소리를….
라헬은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훗 웃었다. 안 그래도 예전에 도영을 붙잡았을 때 한 번 힌트를 줬었는데 말이다.
불사조라고.
‘직접’ 불을 놓아 자신을 태워 죽이는.
“기다린 거야.”
토라의 귓가에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사악하게 들렸다.
“그 사람이 안심하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그 사람….
토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티.
***
역사학자는 강가에 죽어있었다. 이마 정중앙에 총을 맞아 미처 눈을 감을 새도 없이 죽은 후였다.
“죽은 지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무장을 한 대원이 시신을 확인하고 말했다. 그 옆에 있는 대원이 이어 말했다.
“추적을 불가능하게 하려고 처리하고 간 거 같습니다. 알아보니 네오라이트 계열 학자로 뱀파이어를 추종하는 사이비 단체인 영원교와 관계가 있더군요.”
“사이비 단체?”
난데없는 사이비 단체의 등장에 한 중사가 되물었다.
“네. 그쪽에서는 여성 뱀파이어가 신으로부터 영생의 비밀을 받아온 사도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말 씨를 납치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중사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런 녀석을 왜 애초에 걸러내지 못한 겁니까?”
“성향이라는 건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네오라이트 계열이라고 학자로서 업적이 부족한 건 아닙니다. 사상이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답답한 노릇이죠.”
지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역시 무장을 한 상태인 도영은 말했다.
“가말을 찾아야 합니다.”
대공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가말이 대공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기만 해도 발밑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등골에 섬뜩한 기운이 흘렀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모든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대공의 탈옥, 여성 뱀파이어를 추종하는 사이비 단체의 난입, 가말의 납치….
어쩐지 모두 우연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이길 바라고 싶지만 오히려 그게 안일한 기대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가죠.”
도영은 꾹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눈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
뻑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고정된 쇠사슬로 두 다리와 양손이 묶여있는 토라의 배에 야구 배트가 꽂혔다. 이어서 배트가 얼굴을 후려쳤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이내 야구 배트가 돌아간 얼굴을 원위치 시켰다.
레기온의 인간 대원이 히죽거렸다.
“이렇게 맞아도 얼굴이 거의 변하지 않네. 뱀파이어란 참 편하겠어?”
루아스 테러리스트 그룹이라고 해도 숫자가 적은 루아스 특성상 모든 대원이 루아스일 수는 없었다. 사실 루아스들은 30% 정도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협력하는 인간들이었다. 그게 MCTC 측에서도 루아스와 인간을 섞은 팀을 꾸릴 수 있는 이유였다.
아까 토라를 때렸던 레기온 대원은 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지켜보고 있었고, 대신 인간 대원들이 꼭 맹수라도 잡아놓은 것처럼 빙 둘러서서 돌아가면서 토라를 거의 고문에 가깝게 때리고 있었다.
자인은 팔이 뒤로 묶인 채 좀 떨어진 곳에 방치되어있었다. 감시 인원이 많은 탓인지 인간 여자 따위는 어디에 고정해놓지도 않았다.
아무리 겉보기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아도 토라는 입고 있는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슬슬 여기저기 푸르스름한 멍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꽤 내상을 입은 상태일 것이다. 다이아몬드라도 갈아 넣었는지 특수 제작된 배트 탓도 있고, 건장한 성인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매 타작을 하는 데에는 뱀파이어의 몸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다음 인간 대원이 배트를 넘겨받으면서 루아스에게 물었다.
“뱀파이어는 얼마나 맞으면 죽습니까?”
루아스는 담배 연기를 후 내뱉었다.
“때려죽여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네.”
그러고는 빙긋이 웃었다.
“한 번 해봐.”
그러자 인간 대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제대로 쥐고 온힘을 다해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그만둬.”
인간 대원은 멈칫하고 그렇게 말한 자인을 돌아보았다.
테러리스트의 캠프에 인질로 붙잡힌 상황이고, 그나마 믿을 만한 토라는 영혼이 탈곡될 정도로 얻어맞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자인은 전혀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제 입술을 핥았다. 자인은 오히려 보통 여자들과 달리 탄탄하고 강인해 보이는 느낌이 일그러진 정복욕을 가진 남자들을 자극하는 점이 있었다.
“여자는 쓸데가 있지.”
그러면서 남자는 자인에게로 걸어왔다. 나머지 남자들은 ‘저 녀석 또 시작이군.’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인은 남자가 제 앞에서 바지 버클을 끄르는 모습을 보고 욕을 삼켰다.
토라는 그 모습을 보고 빈정거렸다.
“이게 다야?”
제게 다시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였지만 한 번 다른 데 꽂히자 녀석은 오히려 이쪽엔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기다려. 넌 다음에 처리해줄 테니까.”
남자는 자인 위로 제 몸을 던졌다. 자인은 확 인상을 쓸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게 의외였던 모양이다.
“저항 안 해?”
토라도 자인이 게거품을 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살짝 인상을 쓰긴 했지만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그래봤자 별로 달라질 일은 없을 거 같아서.”
남자는 징그럽게 웃었다.
“상황판단이 빠르네.”
토라는 기가 차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남다를 필요 있어?”
하지만 녀석은 지방방송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지 제 할 일을 했다. 남자들은 대신 일을 끝내려는지 다시 토라에게로 모여들었다.
남자 밑에 깔려있는 자인은 전에 없이 연약해보였다.
토라는 꾹 이를 물었다.
꼴이 좋다 싶었다. 자만한 결과로 이런 상황이라니.
“야.”
그 목소리가 얼마나 음산했던지, 욕정에 눈이 먼 남자도 멈칫했다. 토라는 조금 고개를 들었다.
“당장 일어나. 산채로 허리를 꺾어서 죽여 버리기 전에.”
붉은 눈에 살의가 넘실거렸다.
남자는 섬뜩해진 얼굴이었지만 루아스를 흘긋 보았다. 그게 믿는 구석인 모양이었다.
루아스는 반쯤 피운 담배를 털어버리고 일어났다.
“이런 것도 이름이 있는 혈통의 자신감인지 말이야….”
구둣발로 뚜벅뚜벅 다가가 발로 가차 없이 토라를 걷어찼다. 확실히 인간이 때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울렸다. 토라도 순간 훅 몸이 굽었다.
그럼에도 눈을 들며 이죽거렸다.
“이름 있는 혈통에 콤플렉스라도 있어?”
루아스는 무릎을 꿇고 있는 토라의 다리를 밟고 코웃음을 쳤다.
“기껏 그 고통을 이기고 뱀파이어가 됐는데 이젠 다들 이름 타령이잖아. 인간들이 집안이니 돈이니 하는 거처럼. 계급을 나누려는 그 천박한 근성은 어떻게 극복이 불가능한가봐.”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도 이루려고 테러단체에 투신하셨어?”
루아스는 토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열 받게 하는 편이라는 이야기 많이 듣지?”
토라는 싱긋 웃었다.
“다들 아픈 구석을 찔리면 화를 내더라고.”
루아스 너머로, 인간 녀석이 자인의 다리 사이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토라는 어떻게든 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토라는 똑똑히 보았다. 불쾌한 듯 찡그리고 있던 자인이 시선을 드는 순간, 정말로 눈에서 파란 살기가 이는 걸.
그 눈빛이 이쪽을 향했다면 놀라서 딸꾹질이라도 했을 것이다.
갑자기 자인은 두 다리로 남자를 얽어서 뒤집으며 묶인 팔을 최대한 뒤로 빼서 그 공간 사이에 남자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휘릭 다시 몸을 굴리면서 몸이 내려앉는 힘을 이용해 목을 졸랐다.
그나마 목이 안 부러진 게 다행이지만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루아스는 놀라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와우!”
그러고는 제 편이 당하는 데도 박수를 쳤다. 그러자 나머지 인간 대원들은 이걸 말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얼굴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크ㅎ…. 헉….”
그러는 사이에 남자가 눈을 까뒤집으며 자인의 팔을 긁었다. 하지만 자인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팔에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힘을 주었다.
결국 남자는 눈알이 넘어가며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자 자인은 남자의 머리에서 팔을 빼내 더러운 것을 집어던지듯이 내팽개쳤다.
“몇 번이든 덤벼. 어차피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편견에 사로잡히는 일이 이렇게 위험했다. 특수부대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는 여자’라는 편견에 눈이 어두워 덤빈 결과를 제 목숨으로 치른 것이다.
자인은 바로 일어섰다. 그제야 남자들은 그녀를 잡기 위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자인은 사방을 경계하며 바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뒷머리가 뽑혀나갈 뻔했을 정도로 홱 몸이 뒤로 딸려갔다.
“큭!”
어느 순간 뒤에 나타난 루아스가 자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었다.
“잘 봤어. 차라리 이투하보다 나은 거 같은데?”
자인은 머리 가죽이 뜯길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흘긋 뒤를 보았다.
“이젠 여자들끼리 싸울 때도 머리채는 안 잡아, 병신아.”
자인은 평소 거의 험한 말을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토라는 그게 상당히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둘이 쌍으로 입이 맵네.”
루아스의 눈에 웃음기를 가장한 살의가 어렸다.
“겁 없는 주둥아리가 어떤 꼴이 나는지 알려줘야 정신을 차리겠지.”
훅-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나며 손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맞으면 인간으로서는 얼굴이 날아가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 순간 루아스는 뒷골이 오싹했다.
황급히 돌아보았다.
하지만 토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묶여있었다. 루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그대로 있는데 왜…. 게다가 저 사슬을 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강한 뱀파이어라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차르르르-
갑자기 토라를 묶고 있는 사슬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쿵!
바닥에 떨어져 철근이 내리꽂히는 소리가 울렸다. 루아스는 눈을 크게 떴다.
“잡…!”
하지만 이미 토라는 그 자리에 없었다. 루아스는 홱 다시 정면을 보았다. 토라가 서 있었다. 루아스는 거의 본능적으로 가드를 올렸다.
쿠와앙.
동시에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천둥 같았다.
카드드드득!
바닥에 신발이 마찰하며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둘은 겨우 멈춰서 대치하고 있었다.
루아스는 프로의 자세로 훅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