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쭈니>
루아스는 프로의 자세로 훅을 날렸다. 하지만 토라는 너무나 쉽게 그 주먹을 잡았다.
루아스가 바로 다른 손을 날렸지만 토라가 그대로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루아스는 거인의 주먹에 얻어맞은 양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벽이 쩍 갈라지면서 루아스는 거의 벽 속에 파묻혔다.
쿨 타임도 주지 않고 어느새 옆에 나타난 토라가 그의 목을 잡아서 들어올렸다. 루아스는 토라 못지않은 몸집이었지만 발이 허공에 떴다.
틈을 노려 발차기를 날렸지만 토라가 허공에서 잡아 그대로 옆으로 꺾어버렸다.
“크읏…!”
루아스는 극심한 고통에 미처 비명을 다 토해내지도 못했다.
자인은 왜 토라가 여기까지 혼자 찾아올 생각을 했는지 100% 납득했다. 일단 기본 파워 자체가 그녀가 봤던 어떤 뱀파이어도 비교되지 않았다.
그때 인간 남자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군을 부르기 위해 무전을 치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야, 이거? 왜 먹통이야?”
이어서 몇 남자들이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자인은 얼른 의자를 쥐고 몸을 돌려 회전하면서 그 힘으로 의자를 집어던졌다. 남자들은 갑자기 날아오는 의자를 피하느라 각자 혼비백산했다.
“뭐야, 씨발!”
남자들이 덤벼들었다. 자인은 한 남자가 덤비는 타이밍에 복부를 걷어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벽을 차고 거의 날아올라서 다른 남자를 후려쳤다.
다른 남자가 다급하게 총을 꺼내 쏘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인이 재빨라서 제 편을 쏘았다. 총을 맞은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갔다.
어쨌든 운 좋게 무전이 먹통 같으니 이 방을 벗어나게 할 순 없었다.
“잡아!”
남자들이 점차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는지 자인을 제압하기 위해 단번에 덤비기 시작했다. 손만 안 묶여있어도 더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금세 한 남자가 뒤에서 자인을 끌어안아 잡았다.
반면 토라에게 잡혀있는 루아스는 손가락이 목의 살갗을 파고 들기 시작하자 실소를 터뜨렸다.
“설마, 이, 대로 내 목을 꺾겠다고….”
“아까 물었지?”
토라는 슥 눈을 들었다.
“이름 있는 혈통의 자신감이냐고?”
그 눈에 붉은 빛이 폭발했다.
“알면 조심했어야지.”
루아스는 제 실수를 통감했지만 이미 늦었다.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자인도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같은 사이즈의 강철보다 강한 강도를 지녔다는 루아스의 목을 어떻게 손의 악력으로만….
남자들도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토라는 축 늘어진 몸을 집어던졌다. 무거운 몸이 굴러가면서 바위가 굴러가듯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토라는 자인, 정확히는 그녀를 잡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눈에 띄게 흠칫했다.
사람이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히면 달아나는 일도 잊어버리기 마련이었다.
다른 남자들도 바로 문 앞에 서 있으면서도 미처 그 문을 열고 뛰쳐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토라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배트를 잡았다.
“자인 말이 맞아.”
까라랑….
배트가 바닥에 끌려 금속성을 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별로 달라질 건 없어.”
토라는 턱을 꺾었다. 그리고 가볍게 뜨는 붉은 눈에, 거의 귀기가 넘실거렸다.
“네 녀석들이 전부 뒤진다는 사실은.”
***
토라가 수갑을 잡아 뜯어 끊어주었다. 자인은 아까 그가 묶여있던 자리에 버려져있는 사슬을 보았다.
“저 사슬 풀 수 있는 거였어요?”
“시간이 좀 필요했어.”
그러더니 토라가 일어나려다가 신음하며 가슴을 감쌌다.
“괜찮아요?”
자인은 얼른 물었다. 배트를 휘두를 때는 다친 곳이라고는 없어보였지만 얼굴이 아까보다 더 얼룩덜룩했다.
“숨도 못 쉬겠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맞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있긴 있습니까?”
토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티가 처음부터 신으로 숭배받았던 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
토라는 바로 다른 말을 했다.
“중위도 대단하던데.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었는데 포기하지 않더라고.”
“죽을 땐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비참하게 만들어줘야죠.”
정말 자인답다 싶어서 토라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가죠.”
자인은 토라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했다. 토라는 겨우 제대로 서면서 사과했다.
“미안. 힘이 안 들어가서.”
“괜찮아요. 하지만 제가 대장님을 끌고 갈 순 없으니까 힘내주세요.”
그 말에 토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자인은 바닥에 떨어진 배트를 주웠다.
피범벅이어서 별로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죽은 테러리스트 녀석들이 토라한테 기겁해서 마구잡이로 총을 쏴댄 탓에 총은 탄환이 다 떨어졌다. 그래서 무기로 쓸 만한 게 이것뿐이었다.
둘은 방을 나서서 복도를 내려갔다. 뭐로 쓰는 건물인지 교도소 같지는 않은데 감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쾅!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토라가 돌아서서 한 거구의 흡혈귀가 날린 공격을 막고 있었다.
“자인!”
토라가 외쳤다. 그게 뛰라는 말이라는 걸 바로 알아들은 자인은 지체하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인이 달려가는 다른 방향에서도 적들이 나타났다.
자인은 당장 배트를 휘둘렀다. 한 녀석이 어깨를 맞고 옆으로 넘어졌다. 두 번째 적에게는 배트를 검처럼 찔러 넣었다가 얼굴을 후려쳤다. 뒤이어 나타나는 적은 검도하듯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콰직!
하지만 다음 순간 적이 배트를 손으로 막았다. 루아스였다.
루아스가 총을 들었다. 총구가 정확하게 자인을 향했다.
‘망할.’
맞는다.
자인은 깨달았다.
탕!
“토라!”
자인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어느새 나타난 토라가 대신 몸으로 막고 있었다.
타랑!
“괜찮아.”
토라는 말하고 주먹으로 루아스를 그대로 후려쳤다. 루아스는 거의 공처럼 굴러갔다.
이어서 토라의 몸에서 찌그러진 탄환이 떨어졌다. 다행히 강한 혈통의 피부는 총알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들 바로 뒤, 토라 뒤쪽에 거구의 흡혈귀가 나타났다. 유난한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도 전혀 소리가 없이.
인간 중에서도 상위에 드는 동체 시력으로 흡혈귀가 나타나는 걸 본 자인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고작 보는 게 전부였다.
토라는 자인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푹.
토라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 피부의 결을 읽었는지 결을 따라 칼이 옆구리를 쑥 찔러 들어왔다.
그대로 거구의 흡혈귀는 토라를 밀쳤다. 엄청난 힘에 밀려 둘은 동시에 감방으로 밀려들어가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각자 바닥에 쓰러졌다. 각자 나뒹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차르르르. 쿵!
동시에 옆벽에서 밀려나온 철창이 닫혔다.
자인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아직 쓰러져있는 토라에게 달려갔다.
“토라!”
“뱀파이어와 인간이 같이 산다는 건 허상이야.”
철창 밖에서 거구의 흡혈귀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건 인간을 위해 하는 이야기야. 늑대와 토끼가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 결과야 하나뿐이니까.”
어지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토라의 눈에 번뜩임이 지나갔다. 자인은 본능적으로 흠칫했다. 그사이에 거구의 흡혈귀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가버렸다.
다음 순간 토라는 혀를 내차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방심했어.”
말은 그렇게 해도 자인은 토라가 방심했다기보다 자신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확실히, 그녀가 없었다면 토라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상처 좀 봐요.”
토라가 힘겹게 돌아누웠다. 그러자 옆구리에 거의 칼날이 보이지 않도록 깊숙이 박혀있어 손잡이가 우뚝 서 있는 모양새인 칼이 보였다.
자인은 진지한 눈으로 상처를 확인했다. 토라는 숨을 몰아쉬며 기다렸다.
상처를 보고 울고불고할 것 같진 않았지만 자인이 워낙 침착해서 덩달아 이 상황이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자인은 토라가 제대로 앉도록 도와주고 말했다.
“그럴 필요 없었어요.”
“그럴 필요?”
“절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거요.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었어요.”
“알아.”
토라는 그렇게 말하고 말뿐이었다. 거들먹거리거나 여자를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지만 자인은 알만해서 상처를 살피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투하에는 여자가 없으니까요.”
“인간 여자는 뱀파이어와 싸울 수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개죽음을 만들 수는 없어.”
조금 거친 어조였다. 보아하니 이투하가 되고 싶어 했던 여자 부족민들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 토론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자인은 재킷을 벗고 제 티셔츠를 양쪽으로 잡아 벗어 올렸다. 그리고 티셔츠를 이로 끊어 죽죽 찢어냈다. 몇 번이나 해봤는지 능숙한 모습이었다.
토라는 슬슬 핏기가 사라지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자인은 칼자루를 잡고 말했다.
“뽑을게요.”
토라는 벽에 튀어나와 있는 쇠 지지대를 꽉 쥐었다.
“그래.”
“배에 힘주지 마세요. 루아스가 그러면 진짜 안 뽑히니까.”
그러고는 자인은 하루에도 창상 환자를 백 명씩은 보는 의사처럼 아주 무감각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칼을 쑥 뽑았다. 이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압박해 묶었다.
작업을 끝내고 나자 배와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스포츠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가슴께도 피범벅이었다.
자인은 매듭을 묶으며 말했다.
“루아스한테는 항생제가 필요 없어서 천만다행이네요.”
지구상의 모든 병원균에 면역이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꽤 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토라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다른 뱀파이어의 감염원에는 취약하잖아. 사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외계에서 왔다는 X 바이러스는 사실 너무 약해서 도망친 게 아닐까? 다행히 목적지를 잘 골라서 이 행성에는 자기들을 죽일 수 있는 균이 없었지만….”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자인은 말을 끊고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있어.”
토라는 일어나서 철창을 쥐고 뜯어내려는 듯 힘을 주었다. 자인이 만류했다.
“토라, 피가 나잖아요.”
“빌어먹을.”
토라는 욕설을 내뱉고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웃었다. 자인은 기가 찼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요?”
토라는 돌아앉았다.
“숲에 사는 괴물이라고 했지, 마티더러.”
순간 자인은 토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토라는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마티가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서 낯을 심하게 가렸거든. 숲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부족과 교류도 하지 않았지. 마티는 안 그래도 인간 같진 않잖아. 그런데 그렇게 내외하니까 사람들은 마티한테 숲에 사는,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했어.”
그제야 옛날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토와 날 낳은 마티는 숲에 우리를 버렸어. 괴물에게 바치는 제물로. 우리는 다섯 살쯤이었던 거 같아. 그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어두운 숲, 새가 우는 소리, 축축한 냄새….”
어린 라토와 토라는 그저 서로 꼭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울면 괴물이 소리를 듣고 잡아먹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수풀 너머로 무언가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삶이었지만 ‘그건’ 토라가 그간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