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45화 (45/110)

45화<쭈니>

어린 라토와 토라는 그저 서로 꼭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울면 괴물이 소리를 듣고 잡아먹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수풀 너머로 무언가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삶이었지만 ‘그건’ 토라가 그간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쌍둥이는 얼이 빠져 가말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가말도 한동안 덤불 사이에 떨고 있는 쌍둥이를 보더니 처음 한 질문은 이거였다.

「너희, 시지야?」

그때는 ‘시지’라는 고대 사타디어의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아마 직감이었을 것이다. 라토와 토라는 그 말이 쌍둥이라는 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말은 둘을 빤히 보았다.

「오타의 아이들이지?」

토라와 라토는 이 악명 높은 숲속의 여자가 자기들의 어머니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마를…… 알아요?」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말은 모든 부족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부족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 조상까지.

토라와 라토는 오타의 아이들이고, 오타는 시나니의 딸이고, 시나니는 타이의 막내딸이라는 걸 알았다. 늘 멀리서 지켜 봐왔기 때문이다.

「집에 데려다줄게.」

「안 돼요.」

토라와 라토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왜?」

「마마는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돌아가는 거. 우리는…….」

토라는 눈물을 글썽였다.

「쌍둥이니까.」

라토는 애써 의연한 태도로 제 쌍둥이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아이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이 창백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이 섬의 부족은 쌍둥이를 불길하게 여겼다.

부족 내에서 쌍둥이가 배척받는다는 사실은 가말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쌍둥이는 바깥사람과의 혼혈이었다.

그들의 어머니 오타는 섬에 표류한, 신기한 금발 벽안을 지닌 외부인과 사랑에 빠져 하룻밤을 보냈고, 그 사실에 분노한 오타의 아버지는 단칼에 외부인을 죽여버렸다.

지금이야 부족 내에 혼혈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거의 손님이 오지 않는 섬이었기 때문에 혼혈은 또 다른 배척의 대상이었다.

쌍둥이에, 바깥 문명의 핏줄인 혼혈.

부족 사람들은 토라와 라토가 지나가기만 해도 혀를 끌끌 찼다. 두 아이가 부족 내에서 정서적으로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억지로 부족으로 돌아가도, 더 안 좋은 일을 당할지도 몰랐다.

사실 가말은 오타 대신 쌍둥이를 데리고 온 부족 사람이 둘을 숲에 버리고 갈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태풍이 산의 동굴 속에 잠든 가말을 깨운 후로 백여 년,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다.

가말은 손을 뻗으며 물었다.

「나랑 갈래?」

모두가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여자는 어린 쌍둥이의 손을 잡고 그녀가 사는 숲속으로 갔다. 그날부터 그곳이 어린 쌍둥이의 집이었다.

짐승들도 감히 침범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숲속 왕국에서 쌍둥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가말도 육아는 처음이었지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워낙 본 게 많아서 생각보다 육아에 능숙했다.

그리고 어느새 쌍둥이는 넓은 어깨와 튼튼한 다리, 잘생긴 얼굴을 가진 청년들이 되었다.

“니카는 전사의 딸이었어.”

토라는 말했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지. 예전에 마티가 그랬던 거처럼 우리도 부족을 훔쳐보는 걸 즐겨했거든. 이름도 다 알고 있었어. 니카는… 니카는 정말로 예뻤지. 마티 다음으로. 하지만 그땐 마티보다 예뻐 보였어. 마티가 들으면 섭섭해 하려나?”

토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계속 말해줘요.”

자인은 토라의 의식을 붙잡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

토라는 숨을 삼켰다.

“니카도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어. 숲에 사는 괴물 여자와 그 옆을 지키는 쌍둥이 악마. 니카는 기어코 우리를 찾아 숲으로 왔지.”

***

「니카야.」

토라는 풀숲 너머를 보고 중얼거렸다.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옆에서 라토가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부족민들은 이 숲에는 오지 않았다. 숲에 불길한 존재가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절대 숲 밖을 나오지 않는 가말은 고사하고 쌍둥이도 부족 사람들과 만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상대에 대한 무지는 공포를 낳았고, 부족 사람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숲속의 여자와 그 쌍둥이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적어도 쌍둥이는 이 숲에 버려질 때와 똑같이 인간이었지만 이 숲을 맴도는 신화적인 공기가 쌍둥이들도 괴물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둔 후였다.

그런데 니카가 숲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혼자. 잔뜩 겁에 질려있다는 사실이 분명했지만 애써 의연한 얼굴로 계속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토라는 니카를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더 예뻐진 거 같아.」

라토가 옆에서 툭 제 쌍둥이의 머리를 쳤다.

「넌 매일 마티를 보면서도 저게 예쁘단 말이 나와?」

토라는 못마땅한 얼굴로 라토를 돌아보았다.

「마티는 마티잖아. 그리고 마티랑 비교하면 예쁠 여자가 어디 있어?」

그러고는 토라는 라토의 목에 팔을 감고 졸랐다.

「솔직히 말해 봐. 괜히 아닌 척하지 말고. 좀 귀엽다고 생각하지?」

「놔.」

라토가 귀찮아하며 떨쳐내려고 했지만 둘의 힘이 비슷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자 둘이 아옹다옹하는 소리가 니카에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니카는 기겁해서 돌아보고는 두려워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목소리로 크게 물었다.

「누구야? 누가 있어?」

토라와 라토는 멈칫했다.

「들키겠다. 가자.」

둘은 조용히 이동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니카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꿀꺽 침을 삼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숲에 왔는지 몰라도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숲을 제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는 토라와 라토는 숨어서 니카를 따라갔다.

그런데 토라는 좀 다른 부분을 보고 있었다.

「가슴이 크네.」

먼저 가고 있는 라토가 돌아보고 코웃음을 쳤다.

「동정 티 내긴.」

「자기는 아닌 거처럼 말하고 있네.」

숲속에 동떨어져 사는 그들이 여자를 만날 일이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라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티 내는 동정은 아니지.」

「와, 멋지네.」

토라는 전혀 굴곡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깨닫고 라토를 보았다.

「그런데 너 아까부터 왜 이렇게 삐딱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왜 갑자기 숲으로 왔는지가 신경 쓰일 뿐이야.」

그건 토라도 그랬지만 니카가 저 가녀린 팔로 뭘 할 수 있을지가 더 궁금했다.

그때 니카가 낭떠러지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풀이 너무 울창해서 낭떠러지라는 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저쪽은….」

바로 토라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다른 쪽으로 던져서 기척을 냈다. 니카는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보았다.

「누가… 있지?」

다행히 니카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전에 멈췄지만 거의 끝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어제 비가 내리면서 물러진 땅이 무너졌다.

니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토라가 뛰어나가 팔을 잡았다. 니카는 화등잔만 해진 놀란 눈으로 토라를 보았다.

뚝.

그런데 토라가 붙잡고 있는 가지마저 부러져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토라도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지형을 잘 알고 신체 능력 또한 좋은 토라는 몸을 돌려서 니카를 제 몸으로 받으면서 더 튼튼한 가지를 붙잡고 멈추었다.

니카는 놀란 탓에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라토가 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니카는 똑같은 얼굴이 나타나자 놀라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라토가 덩굴을 붙잡고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토라는 그 손을 잡아 위로 올라가면서 니카를 먼저 끌어올려 주었다.

땅에 올라온 니카는 둘을 돌아보았다.

「너흰….」

라토가 토라에게 말했다.

「가자.」

어쨌든 부족민을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토라는 별 말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니카가 다급하게 잡았다.

「나, 난 괴물의 머리카락을 가져가야 해.」

부족민들이 가말을 괴물 취급하는 거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그렇게 부르는 걸 듣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막 라토가 화내려는 걸 일단 토라가 막고서 물었다.

「머리카락은 왜?」

크게 악의는 없어 보이는데 머리카락을 원하는 연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니카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우단만큼 용감하다는 걸 증명할 거야.」

우단은 니카의 남동생이었다. 아주 건방진 꼬맹이라서 아마 누나의 자존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럼 습격해서 얻어내야 하는 거 아냐?」

라토는 대차게 비꼬았다. 토라는 제 쌍둥이가 일부러 니카를 화나게 하려고 이러는 걸 눈치챘다. 이렇게까지 재수 없는 녀석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니카는 짐짓 고개를 저었다.

「원래 부탁할 생각이었어. 나, 싸움은 못 하니까.」

「괴물한테 부탁을 한다고?」

라토는 더 기가 찬 얼굴이었다. 니카는 스스로 생각해도 좀 그랬는지 어물거렸다.

「그래도 먼저 습격하는 일은 없다고 들어서…. 어쩌면 하고…?」

라토와 토라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런 성격이었구나 생각하면서.

「네가 찾는 괴물이야.」

토라가 말했다. 통나무집 앞 평상에 앉아있는 가말을 가리키며.

가말은 멀뚱히 니카를 보았고, 니카는 혼란스러워하며 토라를 보았다. 가말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니카가 왜 여기 있어?」

「날… 알아?」

니카는 놀란 눈치였다. 그런데 말이 짧기에 토라가 말했다.

「마티는 너보다 나이가 많아. 훨씬.」

「하지만….」

니카는 토라를 돌아보면서 주저했다.

「괴물이니까.」

라토가 비꼬는 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니카는 가말에게 정신이 팔려서 라토가 그런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흉악한 마법을 쓸 수 있어? 소문대로?」

「그건 못해.」

가말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니카는 오히려 당황해 물었다.

「그럼 뭘 할 수 있는데?」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고 가말은 자신이 엮고 있던 나무 바구니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바구니 땋기?」

니카는 반쯤 완성된 바구니를 보고는 예상치 못하게 퀼리티가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그러게. 잘 만들었다. 우리 할머니보다 실력이 좋은 거 같아.」

「내가 더 오래 만들었어.」

토라와 라토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생각한 그림은 아니었다.

니카는 가말을 면밀히 뜯어보았다. 중간중간 가말의 미모에 감탄도 하면서. 그리고 물었다.

「정말 사람이 아니야?」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럼 뭐야?」

「흡혈귀.」

가말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니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부족의 신화에도 흡혈귀와 비슷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니카도 흡혈귀가 뭔지는 알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