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46화 (46/110)

46화<쭈니>

「정말 사람이 아니야?」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럼 뭐야?」

「흡혈귀.」

가말은 솔직하게 대답했고 니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부족의 신화에도 흡혈귀와 비슷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니카도 흡혈귀가 뭔지는 알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따라 웃지 않자 천천히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야?」

토라와 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말은 쌍둥이가 좀 더 자라자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둘은 신기하리만치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이를 먹지 않는 그들의 마티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그 사실이 중요할 리 없었다.

가말이 둘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자기 방어력이 없었던 어린 둘은 동물에게 잡아먹혔을 테니까.

「그럼 둘의 피를…?」

니카는 토라와 라토를 번갈아 가리키며 중얼거리다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를 냈다.

「그, 그러면 안 돼!」

토라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았다.

「진정해. 마티는 꽃을 먹어. 이거.」

그리고 마침 평상에 올려져 있던 꽃을 들어 보였다.

「이걸 먹으면 피를 안 마셔도 괜찮다나 봐.」

「꽃을…?」

니카는 꽃을 받아 바라보았다.

「이런 건 본 적 없어.」

「산의 반대편에서만 자라니까.」

숲이 있는 섬의 반대편 쪽은 어둠의 신이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해서 부족민들은 배척하고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니카는 그 어둠의 신, 가말을 보았다. 꽃을 먹고 산다는 게 너무 잘 어울리는 모습에, 행여 두 남자의 피를 빨고 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저절로 녹아 사라졌다.

가말은 물었다.

「근데 니카 길을 잃었어? 왜 여기 있어?」

「괴물의 머리카락을 얻으러 왔대. 자기의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라토가 말하자 가말은 자신을 가리켰다.

「괴물이면 나 말이야?」

가말도 자신이 괴물 취급을 당하는 거야 잘 알았다. 사실 스스로 그런 취급을 받도록 방치하기도 했고.

그래야 부족민들이 이 숲에 오지 않고, 자신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 혹시라도 쿠니스에게 죽을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쌍둥이여서 불길하다는 인식이 있는 토라와 라토가 안전할 수 있었다.

가말이 니카를 보자 니카는 당황하는 얼굴이 되었다.

「미안,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예상외로 가말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서 건넸다. 니카는 얼결에 머리카락을 받았다.

「주는… 거야?」

가말은 웃었다.

「니카는 착한 아이야. 토라와 라토를 걱정해줬어.」

전혀 사심이 없어 보이는 미소에 니카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고마워.」

그러고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또… 와도 돼?」

토라는 웃었다.

「물론이야.」

그러다가 가말과 라토를 돌아보고 물었다.

「물론, 맞지?」

라토는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내젓고 걸어갔다. 니카는 그 뒷모습을 흘긋 훔쳐보았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니카와 결혼했어.”

토라는 말했다.

“네?”

그런데 자인은 뭔가 그냥 지나가선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요?”

토라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땀에 젖은 얼굴을 젖혔다.

“예전에 우리 부족은 유난히 남자가 많아서 형제는 한 여자랑 결혼하는 게 전통이었거든.”

자인은 순간 심연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지만 다른 문화권이니까 이해해야 한다고 애써 생각했다.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은 환경에서 같은 유전자 풀을 한 여자에게 몰아준 건 나름 합리적인 선택….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 전통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랬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한 여자가 이렇게 생긴 두 남자를 독식했다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독과점이 있단 말인가?

자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토라는 계속해 이야기했다.

“숲에 온 이후로 니카는 어느새 자기도 마티를 마티라고 부를 만큼 우리와 친해졌지. 부족에게 우리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어. 거의 매일 같이 숲과 마을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전하고 우리는 마을에 가보자고 설득했지.”

결국 둘은 그 성화에 못 이겨서 마을로 갔고….

“우리와 결혼하겠다는 말에 반대하는 부족 어른들 앞에서 니카는 거의 드러누웠어. 그때 알았어. 니카의 고집을 이긴 사람은 없었다는 걸.”

그때 니카는 빛이었다. 그들을 어두운 숲속에서 끌어내 주는 빛.

그들의 헌신적인 마티가 있었기에 숲도 살 만한 곳이었지만 아무런 사회적 교류가 없는 조용한 숲은 외딴곳에 있는 양로원 같은 느낌이었다.

활력이 넘치는 젊은 청년 둘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가말도 쌍둥이가 마을로 돌아가길 바랐다. 둘은 자주 숲에 오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기에 가말과 부족민들도 서서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가말은 부족의 축제에도 참여할 정도로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때는 우주처럼 넓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리 크지 않은 섬 안에서 끊겨있던 선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섬은 여러 개로 나눠진 각자만의 우주에서 하나의 우주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

당연했다. 인생의 모든 일에는 꼭 문제가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라토가 사랑한 건 니카가 아니었어.”

자인의 얼굴을 보니 진짜 라토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도 눈치챈 것 같았다.

토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티는 어느새 우리보다 어려졌으니까. 우리가 커버린 거지만…. 그래도 라토는 마티에 대한 마음을 거두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마티를 마티로 받아들이려고 했지.”

토라는 잠깐 감옥 바닥의 무늬를 쳐다보았다.

“그 당시엔 거의 쌍둥이를 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어. 우리는 그렇게 달랐는데 말이야. 니카도 그걸 느꼈을 거야.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인지 라토를 더 사랑했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어.”

“…….”

“그냥 그랬어. 뱀파이어를 포함해서 많은 남자들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마티가 고작 인간 남자에 불과한 소령님한테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마음의 작용은 알 수 없는 거였어.”

토라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자는 예리하니까. 라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금세 알아챘지. 니카는 불같이 화를 냈어.”

사실 남편이 딴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거니까 이해는 되지만 니카가 그럴수록 라토의 마음은 더 멀어졌다.

“니카는 거의 매일 밤 화를 내고 울며 내게 안겨 잠들었어. 난….”

그때 생각을 하듯이 말을 잠깐 끌었다.

“그 상황이 나쁘지 않았어. 라토가 멀어질수록 니카는 내게 가까워졌으니까. 모두 내게 이야기했고, 내게 토라는 그러지 않을 거지 하면서 애교를 피웠어.”

토라는 자인을 한 번 보고 웃었다.

“알아. 최악이란 거.”

자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다 싶어서요. 고등학교에 가면 여자애들끼리 많이 그래요.”

토라는 웃었다.

“그때 우리는 정말 요즘 고등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거야, 정신이나 마음이나. 결국 니카와 라토의 사이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나빠졌어.”

토라는 실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땐 정말 니카가 나만의 것 같았어.”

웃은 게 언제였냐는 듯 토라의 눈에 짙은 고통이 어렸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순간에 만족하는 오만, 그게 내 하마르티아(비극적 결함)였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쓰는 게 이상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돌이켜보면 모든 것들이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이 딱 맞게 돌아갔던 거 같아.”

그날 가말과 토라는 둘이서 밭으로 나갔다. 그사이에 라토와 니카는 또 싸우고 말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

「왜 자꾸 여기 오는 거야? 당신 집은 여기가 아냐.」

니카는 히스테릭한 어조로 따졌다. 라토는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마티는 혼자 있잖아.」

이미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였다.

「마티는 어차피 늘 혼자였잖아!」

라토는 날카롭게 니카를 보았다. 니카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질 수 없어 말했다.

「당신의 아내는 나야.」

「누가 그걸 몰라?」

「근데 왜 당신만 그걸 모르는 거 같을까?」

「니카.」

몇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에 라토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오해하지 말라고 달래도 봤고 다정하게 대해주려고 노력도 해봤고 화도 내봤지만 니카는 마이동풍이었다.

아예 그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 같았다. 라토가 자신이 아닌 가말을 사랑한다고 결론을 내놓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 만한 일이 있으면 불같이 따지고 들었다.

라토도 자신의 마음이 토라가 가말을 생각하는 마음과 조금 결이 다르다는 건 스스로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서서히 옛날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티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녀가 웃는 얼굴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엉뚱하고 귀여운 매력을 지닌 니카가 좋았고 니카라면 가말보다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니카는 이상하게 변해갔다.

라토는 그게 니카가 그를 너무 사랑하게 된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라토는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대체 내가 뭘 어떡해줬으면 좋겠어?」

니카는 꾹 이를 깨물었다.

「여기 오지 마.」

라토는 입을 다물었다. 수없이 말씨름하면서도 처음 보이는 반응이었기에 니카는 희망에 찼다. 그런데 라토는 말했다.

「우리가 늙어 죽으면 마티는 또 혼자가 돼. 그런데 그새를 못 참아서 마티를 미리 혼자로 만들겠다는 거야?」

니카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드디어 말이 좀 통하는 것 같아 라토는 안도했다. 하지만 니카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라토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니카는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그렇지. 마티는 늙지 않아.」

자신이 늙어서 볼품없이 쪼글쪼글해져도 가말은 지금 그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누구보다 젊고 싱그럽고 아름다운 그 얼굴로 라토를 볼 것이다.

「그만해.」

라토는 정말 기가 질려 말하고 돌아섰다. 더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뒤에 남겨진 니카는 희미하게 떨었다.

악마가 산다는 숲에 혼자 올 정도로 용감하고 엉뚱한 면모까지 있는 니카는 심지가 굳고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내부에 잘못된 씨앗이 자리하자 그것은 고집스럽게 뿌리를 내렸다.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는 망상과 의심, 질투심을 일으켰다.

「라토!」

갑자기 니카가 안겨들었다. 라토는 한숨을 쉬고 니카를 안아주었다.

「니카, 난….」

푹 소리가 났다.

라토는 믿기지 않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칼이, 옆구리에 꽂혀있었다.

「니카.」

니카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파랗게 질려서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당신 때문이야.」

그리고 오히려 그쪽이 찔린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괴성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는 몰랐지만 전형적인 히스테리 반응이었다.

「당신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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