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47화 (47/110)

47화<쭈니>

「당신 때문이야!」

니카는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해 외쳤다. 라토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니카를 제치고 밖으로 비척거리며 나갔다.

눈앞이 흐려졌다. 라토는 무릎이 꺾여 바닥에 무릎을 찍으며 넘어졌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급소를 찔리면 방도가 없었다. 니카는 얼결에 찌른 게 아니었다. 정확하게 급소를 노렸다. 정말로 죽이려고.

「라토.」

니카는 떨면서 라토를 불렀다. 하지만 라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토의 몸 아래로 피가 스멀거리며 흘러나와 흙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래서 얼핏 보면 라토는 그냥 엎드려 누워있는 것 같았다.

니카는 자신이 아직 들고 있는 칼을 보았다.

하아, 하아, 하….

숨소리가 떨려왔다.

머릿속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 줌의 이성마저도 끝부터 검게 불타 일그러지며 재가 되어갔다.

칼을 돌려 제게로 향하게 하는 손이 꼭 남의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니카.」

갑자기 라토가 팔을 잡으며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벽에 부딪쳐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러지 마.」

피범벅인 채인 라토는 검은 눈이 꼭 눈물이 어린 것처럼 짙어져서 슬퍼 보였다. 자신을 찌른 사람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니카는 곧 죽을 상황에서도 라토가 그런 얼굴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믿었다.

니카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왜? 마티가 슬퍼할 테니까?」

가말은 홱 돌아보았다.

「피 냄새가 나.」

옆에서 순무를 뽑고 있던 토라는 허리를 펴고 물었다.

「동물들끼리 싸운 거 아냐?」

가말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인간의 피 냄새야.」

토라는 황당했다.

「그런 거까지 구별이 가능해?」

「더 달아.」

그러고는 가말은 무작정 돌아섰다.

「가자.」

「마티, 이거 안 가져가?」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토라는 채소를 수확한 바구니를 들며 속없이 물었다. 그러자 가말이 돌아보고, 살면서 본 적 없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토라, 당장 와.」

둘은 집으로 돌아갔다. 토라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가는 내내 가말이 워낙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슬슬 그도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통나무집 앞 공터에 도착했다.

처음에 토라는 쓰러져 있는 게 누구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라토!」

가말이 비명처럼 내지르며 달려갔다. 토라는 제가 보는 풍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반사적으로 뛰어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파랗게 질린 라토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라토, 무슨 일…!」

다급하게 라토의 상태를 살피는데 옆에 있는 가말이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토라는 가말을 보았다가 가말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어딘가를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문이 열려있는 집 안쪽….

불길한 예감이 축축한 손처럼 기분 나쁘게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토라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피 웅덩이 속에, 처음에는 니카인지도 불분명해 보이는 피투성이 여자가 잠겨있었다. 그 가슴에 단도가 똑바로 꽂혀있었다.

「니카!」

토라는 소리치며 달려갔다.

「니카!」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못하던 라토와 달리 니카는 움찔하며 힘겹게 눈을 떴다. 말 그대로 겨우 숨이 붙어있었다.

「니카.」

토라는 몸이 떨려왔다.

「누가…. 왜, 어째서….」

뭔가 잘못될까 봐 차마 니카의 볼을 쓰다듬지 못하는 손이 허공을 헤매며 덜덜 떨렸다.

니카는 피를 토해냈다.

「토라, 당신은 나만을… 사랑하지?」

「니카.」

그 순간 토라는 무언가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네가 이런 거야?」

니카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토라는 그 손을 맞잡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손이 마치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갈고리처럼 보였다.

니카는 그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이 모든 게 장난이라도 되는 양.

그리고 다친 폐에 공기가 잘못 들어가 평소 그녀 같지 않은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말해줘. 나만을 사랑한, 다고….」

끝까지 제 이야기만을 하고 눈을 감았다. 피가 다 빠져나가 눈가는 파랗고 입술이 보라색이었다. 니카의 손을 잡고 영혼을 끌어내는 사신의 손이 실제로 보일 지경이었다.

열려있는 문 너머로 가말과 시선이 마주쳤다. 가말은 어렸을 때 쌍둥이가 홍역에 걸려서 죽을 뻔했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살릴 수 있어, 내가.」

토라는 바로 깨달았다. 흡혈귀가 되는 것. 하지만 가말이 어렸을 때 그들 형제를 앉혀놓고 했던 말은….

「하지만 거의 죽어. 성공하는 경우는 못 봤어.」

그럼에도 토라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둘을 잃을 순 없었다.

「제발, 마티.」

가말은 주저하지 않았다.

라토 위로 몸을 드리웠다. 가분히 눈을 내려 감는 그녀가 라토를 구하려고 한다기보다 그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눈이 흡사 빛을 뿜는 것처럼 번쩍거렸다. 피 냄새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것 같았다.

토라는 그날 처음으로 ‘흡혈귀’인 가말을 보았다. 라토의 위를 점령한 것이 정말 인간이라기보다, 짐승 같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갈기와 횃불 같은 붉은 눈을 지닌.

어린 인간 둘을 키우면서 가말이 얼마나 참았을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가말은 이를 드러냈다. 그건, 고대에 멸종한 맹수의 송곳니처럼 길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모두가 결과를 알듯이 감염을 이긴 건 라토뿐이었다.

니카는 몇 번 발작을 일으키더니 숨을 거두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해보자면, 니카는 자살한 시점에서 이미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라는 니카의 시신을 안고 마을로 갔다. 마을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너희 쌍둥이 때문이야!」

니카의 어머니는 딸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며 소리쳤다.

「불길한 쌍둥이랑 결혼했기 때문에 니카가 죽은 거야! 오타가 너희를 버렸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토라를 마을에서 내쫓으라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걱정 마. 다신 오지 않을 테니까.」

토라는 담담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니카는 스스로를 죽인 거야.」

갑자기 가말이 나섰다.

「불길한 사람은 없어! 불길한 건 너희의 마음이야!」

우레와 같은 노호에 부족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토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말은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적어도 그들 쌍둥이가 위험한 짓을 할 때를 빼고는.

「오타는 자기 아이들을 버렸어. 그건 잘못된 일이야. 사과해야할 일!」

실제로 맹수가 울부짖는 소리 같았기에 부족 사람들은 거의 혼비백산했다.

「이 자리에.」

가말은 갑자기 차분해져 부족을 쭉 둘러보았다.

「니카가 스스로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 있어?」

부족은 말이 없었다. 니카가 라토에게 집착하는 건 이미 모든 부족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말은 부부의 일에 간섭한 적 없었다. 어떤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그저 슬픈 얼굴을 하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간섭하기 시작하면 더 일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말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니카는 바보야. 모든 걸 가지고 있으면서 고작 날 질투했어.」

그녀를 위해 울어주는 다정한 가족,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을 가지고도….

누군가가 멋대로 품에 떠안긴 영원한 삶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 가련한 여자 따위를.

「라토 매형에 관련된 일이라면 누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누군가가 말했다.

우단이었다.

니카의 남동생이자 그녀가 숲으로 오는 계기가 됐던 우단은 이제 제법 번듯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도 알고 있잖아요.」

우단은 물기가 베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세요. 지금 어머니는 슬픔에 빠져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뿐이에요.」

니카의 어머니는 오열하며 무너졌다. 딸을 잃은 슬픔과 누구라도 탓하고 싶은 마음, 절망과 허무감이 모두 녹아 흘렀다.

우단은 눈물을 삼키고 의연하게 토라를 보았다.

「부족을 떠나지 마세요.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아마 그때 우단이 없었다면 토라는 부족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이투하까지 이어지는 불꽃은 그곳에 있었다.

***

토라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항상 비슷한 풍경이었다.

바다에 부드러운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불을 놓은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옆에 한참 말없이 있던 가말이 돌아보고 물었다.

「토라, 흡혈귀가 될래?」

가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감염되기를 제안한 순간이었다.

「응, 마티.」

토라는 아침을 먹겠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가말의 눈에 눈물 같은 연한 빛이 돌았다.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니카처럼.

토라는 이글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깨달았다. 니카는 빛이라기보다 불이었다. 니카 안에서 뿜어져 나와 그들을 숲 밖으로 이끌었던 강렬한 빛은 언젠가 그녀 스스로조차 불살라버릴 씨앗이었던 것이다.

토라는 담담히 말했다.

「라토를 혼자 둘 수 없으니까.」

감염은 이겼지만 아직 라토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깨어나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니카가 자신을 죽였다는 것에,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자신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곁에, 있어줘야 했다.

가말은 손을 뻗어 토라를 끌어안았다. 토라는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항상 올려다보았던 그의 마티가 언제 이렇게 작아졌는지, 새삼스러웠다.

가말은 물기가 배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토를 놓지 마. 너의 시지를.」

토라는 꾹 눈을 감았다.

「놓지 않아, 마티.」

송곳니가 파고드는 순간 여전히 바다는 타오르고 있었다.

***

자인은 말을 잃고 토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토라는 자인을 보았다.

“니카는 임신 중이었어. 그때 상황으로 봐서는 내 아이가 분명했지.”

자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차마 아무 말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다. 토라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니카는 몰랐을 거야. 그랬을 거라고 믿어, 최소한.”

“유감…이에요.”

자인은 그 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토라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정말 유감인 일이지.”

“아뇨, 전….”

“괜찮아. 나도 유감이라고 생각하니까.”

“토라, 이제 그만 말해요.”

자인은 토라를 만류했다. 그는 매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말을 그만두면….”

토라는 그 혼자만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의식을 잃을 거 같아.”

그의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자인은 등골에 소름이 흘렀다.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강심장이 본능적인 위험 앞에서 자꾸만 신호를 보냈다.

토라는 천천히,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향기로운 냄새….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누가 향수를 통째로 부어놓은 것 같았다.

토라.

누군가 속삭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