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쭈니>
토라.
누군가 속삭였다.
토라.
“토라!”
자인이 소리쳤다. 멀어졌던 소리가 갑자기 줌을 당기듯이 가까워졌다. 토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있는 자인의 가슴께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극도로 예민해진 시야에 피부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기절하면 일이 더 심각해질 것이다. 아예 몸을 통제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자인이 토라의 팔을 꽉 잡았다.
“토라, 내 피를 마셔요.”
“뭐…?”
이번만은, 토라도 황당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
가말은 얼핏 정신을 차렸다. 눈이 따가웠다. 방은 어두웠고, 덮고 있는 이불의 감촉이 달랐다.
순간 얼굴에 발사된 스프레이의 차갑고 따가운 느낌이 떠올랐다. 가말은 흠칫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 누군가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는 어렴풋한 인영이 떠오른 순간 몸 전체가 관통한 것처럼 충격에 사로잡혔다.
가말은 기겁하고 침대 끝으로 물러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쿠…니스.」
쿠니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만 움직여 가말을 찬찬히 살폈다.
「자랐구나. 꽃 때문에.」
영원히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십 대의 가말은 과연 눈부셨다.
쿠니스가 상상해왔던 것보다도 몇 배는, 아니 그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했는지 깨달을 만큼 아름다웠다.
천진난만한 검은 눈동자는 이제 붉게 변했지만 오히려 어린 그녀에게는 없던 깊은 분위기가 있었다.
끽.
쿠니스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가말은 당장 달아날 수 있는 곳을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쿠니스가, 침대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 애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
「넌 란투와 아다위를 죽였어.」
가말은 삼천 년간 가슴에 박혀있던 말을 토해냈다.
「다니엘도…!」
다니엘은 그녀의 친구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쿠니스는 무참히 잘라내 버렸다.
「그땐 뱀파이어가 인간을 죽이는 게 당연한 시대였잖아. 나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쿠니스.」
가말은 울 듯한 표정으로 쿠니스를 불렀다. 쿠니스는 가말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데에 희열이 치솟았다. 꿇은 무릎을 펴고 일어나 한 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가말은 어렸을 때 꿈속에서 본 괴물이 다가오기라도 하는 표정으로 물러나려고 다리를 저었다.
「다가오지 마.」
그럼에도 쿠니스는 멈추지 않고 다가가 침대에 무릎을 짚었다. 그리고 가말의 얼굴을 감싸 안고 속삭였다.
「가말. 보고 싶었어.」
쿠니스는 애끓는 심정을 담아 가말을 와락 끌어안았다.
「용서해줘, 시지.」
가말은 몸이 떨려왔다. 시지, 늘 쿠니스가 그녀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사고였어, 네게 그런 짓을 한 건. 화가 나서 보이는 게 없었어. 미안해. 그땐 너무 어려서 내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몰랐어.」
쿠니스는 진심으로 가말에게 용서를 구했다.
품속에 있는 가말은 희미하게 떨고만 있었다. 쿠니스는 이토록 여린 제 쌍둥이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후회했다.
「그럼 사람들은?」
그런데 가말이 물었다. 쿠니스는 멈칫했다. 천천히 떼어내자 가말은 꼭 눈물처럼 보이지만 결코 눈물은 아닌 안광이 형형한 눈으로 물었다.
「사람들은 왜 죽였어? 네가 한 일들에 대해 들었어.」
쿠니스의 눈가가 조금 움직였다.
「가말, 우리는 뱀파이어야. 애초에 그런 종이라고.」
「그렇지 않은 뱀파이어들도 있어.」
「인정해. 플로스는 편해. 다음날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하지만 이건 간식 같은 거야.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해. 인간을 사냥해야 하는 거야.」
「아니야, 우린…!」
가말이 발작적으로 말하려고 했지만 쿠니스가 선수를 쳤다.
「봐, 가말. 우리에겐 강한 이와 힘이 있어. 그리고 그뿐이라면 동물과 다를 바 없었겠지만 우리는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어. 왜 그렇다고 생각해? 그건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이야. 다른 모든 것을 먹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담담한 어조였다.
「여태까지 인간들은 자기가 최상위 포식자라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이야. 그리고 이게 자연의 이치지. 인간이 돼지와 소를 먹듯이 뱀파이어는 인간을 먹는다, 이 간단한 이치를 왜 그렇게들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물론 이해는 해. 달라진 환경을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 그래서 알려주려는 거야. 이게 마땅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하는 새로운 이치라는 걸.」
「…….」
가말은 고개를 숙인 채 말하지 않았다.
쿠니스는 더 단단해 보였다. 옛날엔 더 화도 잘 내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불을 머금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차분하고 매끄러웠다.
외모는 삼천 년 전과 같았지만 더는 아무도 그를 가말과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가말이 자라지 않았다고 해도.
가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하지만 넌 이미 인간이었을 때 사람을 죽였잖아.」
쿠니스는 뭘 모르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말, 아직도 모르겠어?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도 자연의 이치라는 걸. 우리는 쌍둥이로 태어났어. 그리고 그 이기기 어렵다는 감염을 이기고 뱀파이어가 되었지, 둘 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야.」
그러면서 가말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우리 둘을 갈라놓으려는 것들을 참을 수 없었어. 하지만 그때 난 너무 충동적이고 무지했어. 지금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란투와 아다위에게도 사과할 수 있다면 사과하고 싶어.」
「사과…?」
가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천천히 물었지만 쿠니스는 그녀가 그렇게 되묻는 이유조차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그 녀석들은 네 얼굴에 홀린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예쁜 여자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으니까. 제 분수를 몰랐다는 게 잘못이었지만, 맞아. 그게 죽을죄까진 아니었지.」
「쿠니스!」
가말은 더 들을 수 없어 외쳤다. 침묵이 감돌았다. 쿠니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막 깨어나서 정신이 없을 텐데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네.」
가말은 슬픈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자신이 사라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쿠니스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넌 다정한 사람이었어. 대체 왜….」
「네가 그런 날 좋아했으니까.」
쿠니스는 똑똑히 들으란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어.」
「쿠니스, 제발….」
그런데 순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갑자기 쿠니스의 기색이 바뀌었다.
「그 인간 녀석 때문이야?」
목소리가 난폭했다.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라는 단어가 만족스러웠는지 쿠니스는 다시 기색이 달라졌다.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한 투로 말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쉬어. 쉬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쿠니스는 밖으로 나섰다. 거의 삼천사백 년을 기다린 순간인데 조금 더 기다린다고 그가 더 늙진 않을 테니까.
탁. 지잉.
문이 닫히면서 잠기는 소리가 났다.
가말은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평생 이 순간을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쿠니스가, 자신의 쌍둥이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을.
여태까지 가말은 이 순간에서 도망쳐왔던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서.
자신이 오래전에 쿠니스를 죽였다면 여태 쿠니스가 직간접적으로 죽인 수많은 사람은 살았을 것이다. 적어도 세월이 그들을 데려가기 전까지는.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토라, 내 피를 마셔요.”
“뭐…?”
이번만은 토라도 황당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인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적당한 양만요.”
토라가 뭐라고 하려고 하자 자인은 바로 덧붙였다.
“이렇게 있으면 둘 다 죽어요. 특히 전 그쪽 손에요.”
그 말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토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중간에 그만둘 자신 없어.”
“그래도 해네요.”
“뱀파이어가 피 마시는 걸 인간들이 밥 먹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
사실 자인도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 방법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토라의 눈은 이미 뱀처럼 동공이 가늘어져 살기가 뭉쳐진 덩어리 같았다.
땀에 젖은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녀를 보자 소름이 전신에 넘실거렸다.
강렬한 살의를 느끼지만 어떻게든 이성의 깃대를 놓지 않으려는 모순적인 눈이었다.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렸다.
인간은 어째서 위험에 매혹되어버리는지, 자인은 그 어리석음에 절로 혀를 내찰 수밖에 없었다.
“그럼요?”
그럼에도 묻는 어조는 단호했다.
“당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가말 씨가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마티한테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토라는 그 순간 정말로 허기를 느꼈다.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두려워하지 않는 눈에.
자인 말대로 가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손을 짚으며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듯이 사라졌다.
땀이 배어 척척한 피부가 입술에 닿았다.
토라는 입을 벌렸다. 짐승의 이빨 끝에 파란 살기가 맴돌았다.
사실 그도 루아스가 되자마자 가말을 따라 꽃을 먹고 살았지만 흡혈이 처음은 아니었다.
흡혈은 뱀파이어의 본능,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는 게 더 무리였다. 그래서 가끔 같이 밤을 보내는 여자들의 동의를 얻어 흡혈을 해본 적 있었다. 적어도 토라에게는 대체로 여자들이 신기할 만큼 선뜻 동의해주고는 했다.
결론적으로, 흡혈은 제법 중독성이 있는 행위였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기대를 충족시키진 않았다. 차라리 여자와 밤을 보내는 것만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토라는 그게 자신이 덜 허기졌었기 때문이라고 깨달았다.
“토라.”
자인은 숨을 가쁘게 쉬며 토라를 불렀다. 그의 목을 타고 제 피가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슬슬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토라는 그만두려는 기색이 없었다.
자인은 급한 대로 후려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데 토라가 덥석 손목을 잡았다. 전혀 움직이는 기색을 읽지 못했는데.
엄청난 악력이었다. 팔을 뺄 수 없었다. 자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피는 계속해서 빠져나갔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강물에 잠겨 죽어가는 오필리어처럼 몸이 차가운 물 속에 깊이 침잠하는 느낌이었다.
점차 손끝, 발끝에 감각이 사라지고 몸이 계속해 가라앉아갔다.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밤하늘을 비춘 강물 속에 잠긴 듯이 눈앞이 반짝거렸다.
하아….
내쉬는 자신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가깝게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토라가 멈칫했다. 그리고 아무 일은 없었지만, 불현듯 정신이 돌아왔는지 입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색도 창백하게 질릴 수 있다면 창백하게 질려있던 눈에 생기가 번지는 모습이…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여태 이런 광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게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토라는 자인에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