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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49화 (49/110)

49화<쭈니>

토라는 자인에게 키스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더 격렬하게 동조했다.

토라의 눈을 들여다본 순간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가 태어난 목적인 것처럼, 드디어 그 목적을 발견한 듯이 환희에 찼다.

까랑.

둘이 격하게 얽히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쳤는지 금속성이 울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충분했다. 둘은 불에 덴 듯 몸을 뗐다.

토라도 자인 못지않게 제 행동에 놀란 얼굴이었다. 잠깐 그러고 있더니 중얼거렸다.

“미안해.”

그게 피를 더 마신 데 대한 사과인지 키스를 한 데에 대한 사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인은 묻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들어도 동요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죠. 갈 수 있다면요.”

자인이 일어나고 토라도 몸을 일으켰다.

“열 수 있겠어요?”

토라는 철창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마시기 전에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급한 불이라도 끈 이상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말대로 토라는 감옥 문을 박살내서 열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주변을 세심하게 살핀 후에야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내려가면서 토라가 말했다.

“중위는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드네.”

“그러기는 힘든 일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아 쳐다보자 자인은 덧붙였다.

“힘든 일일수록 이룰 가치가 있잖아요.”

“사람이 참 삐뚤어진 구석이 없어. 그러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자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토라를 훑었다.

“비꼬는 겁니까?”

“설마. 니카가 중위 같은 성격이었다면 라토와 내가 뱀파이어가 되는 일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어쨌든 살아서 좋은 날도 보고 나쁠 거 없지 않습니까?”

토라가 겪은 비극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다.

“내가 알던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야. 인간은 관성의 동물이니까.”

그래서 토라는 더 섬에 머물렀다. 그곳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말하려던 자인은 갑자기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을 만큼 어지러웠다.

토라가 팔을 잡아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미안해. 괜찮아?”

이건 확실히 과하게 피를 빤 데에 대한 사과였다.

자인은 토라를 보았다.

굳이 위대하진 않아도 이 인생이 의미 있다고 할 만한 일을 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고작 한다는 생각이 이 남자의 먹이가 되고 싶다는 거라니,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했을 때 오히려 기뻤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자인은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내보이고 제대로 섰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면서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만 그럴 듯했지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얻어맞고 자라면서 힘이 셌으면 해서 남자가 되고 싶었어요.”

얼마 전에 그 정신 나간 여자를 다루는 방법을 자인은 ‘몸으로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토라는 어느 정도 그녀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했다는 것도, 보통 환경에서 자란 소녀였다면 실행하기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군인이 되면서 지켜주고 싶었던 건 어린 자신이었을 것이다. 혹은 어린 자신 같은 아이들이나.

자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허무하죠. 차라리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라면 슈퍼맨이라도 되고 싶다고 생각할걸.”

하지만 토라는 자인을 동정하지 않았다. 튼튼한 다리로 스스로 악몽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사람을 누가 동정할 자격이 있겠는가?

자인은 돌아보았다.

“토라, 당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슈퍼맨이 된 거나 다름없잖아요.”

토라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튼튼한 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아뇨. 그런 마음가짐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거죠.”

토라는 눈을 흘기면서 중얼거렸다.

“우와,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네.”

자인은 눈을 굴렸다. 피가 모자라서 헐떡거릴 때는 청초한 맛이라도 있었지, 다시 피를 토해내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좋을 대로 말해요.”

둘은 아무도 없는 걸 살피고 바깥으로 나갔다. 벽에 몸을 붙이고 자인은 진지하게 전방을 살폈다. 엄폐물이 없는 벌판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숲이 보였다. 벌판만 잘 지나면 숲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라는 그 모습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중위, 우리 친구 할까?”

자인은 돌아보고, 토라가 갑자기 외계어라도 한 것 같이 위아래로 훑었다. 토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 일이 좋은 유일한 점은 중위를 만난 거 같아.”

“그래요.”

생각해보니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차라리 친구라는 선이 그어지면 선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선을 지키는 거라면 군인이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니까.

그런데 토라는 표정이 묘해졌다.

“생각보다 선뜻 받아들이니까 이상하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자인은 고개를 돌렸다.

“맞아요. 생각해보니까 싫네요.”

그러자 토라가 얼른 그녀의 소매 끝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냐. 무르기 없기.”

무르기 없기라니…. 자인은 기가 찼다. 이 집채만 한 뱀파이어가 뭐라는 거야? 왜 귀여워?

게다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싱글거리는 얼굴도 귀여….

생각할 뻔했던 자인은 정신을 차렸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여간 이 남자하고 있으면 정상적인 사고가 되질 않았다.

“움직이죠.”

자인은 말하고 앞서 갔다. 둘은 최대한 엄폐물을 찾아 이동했다.

그때였다.

수많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토라는 홱 돌아보았다. 평야에서 진군하는 군대처럼 레기온 부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 자인.”

토라는 자인을 밀면서 손을 놓았다.

“토….”

자인은 발작적으로 뒤돌아보았다. 토라는 웃었다.

“네가 여자나 인간이라서가 아냐. 그냥 여기선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은 거뿐이야.”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그녀는 인간일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뱀파이어 동료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결코 좁힐 수 없는 틈을 보며 절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고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할 일은 달리는 것이다.

자인은 뛰기 시작했다. 그 뒤, 토라는 달려오는 레기온 대원들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이 뒤로는 못 가.”

자인은 숲으로 몸을 던졌다.

팍. 사사삭. 삭. 삭.

뒤에서 폭탄이 터지고 있을 때보다도 더 빠르게 달렸다. 폐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기척이 느껴졌다.

철컥, 철컥. 철컥!

자인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멈추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위장복을 입은 한 부대가 일제히 총구를 그녀에게 겨누고 있었다.

“소속을 밝혀.”

개중 한 남자가 말했다.

자인의 옆얼굴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MCTC나 또 다른 아군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레기온의 인간 부대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MCTC에는 어떤 작전도 승인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토라가 독단적으로 행동에 나선 상황에 구출을 하러 왔을 리도 없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당신들, 지망생 아니죠?”

토라가 가버리고 자인은 이투하들을 보고 물었다.

“네? 아니….”

이투하들이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자 자인은 손을 들어 막았다.

“통하지 않는 변명은 하지 말아요.”

그런 건 듣기도 귀찮다는 투로 말하면서 이투하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단순한 지망생이 아니라는 건 걸음걸이만 봐도 아니까.”

이투하들은 이투하 내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인 그들이 인간 여자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인은 쯧 혀를 찼다.

“아마 날 지키라고 두고 간 거겠죠.”

‘보통 다른 여자들은 그런 데 감동받지 않나.’

이투하들은 생각했지만 자인의 눈빛이 매우 못마땅해보였으므로 현명하게 아무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무튼 이렇게 하죠.”

자인은 돌아보고 말했다.

“당신들 대장, 튼튼한 몸 믿고 저러는 모양인데 난 인생에는 계획이란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난 붙잡힐 거예요, 숨어서 내가 혼자가 되는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한테.”

이투하들은 이 여자가 얼마나 자기들의 대장을 닮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탱크에 비유되는 질긴 피부를 가진 토라와 달리 이쪽은 고작 인간의 몸이었다.

그러나 역시 말릴 새도 없이 자인은 임무를 배분하는 지휘관인 양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사진을 찍는 거예요.”

“사진이요?”

황당했다. 세계 각국 정상들이 한 사람이라도 거액을 주고 경호원으로 사려고 하는 이투하들에게 고작 사진이나 찍으라니.

자인은 그 생각도 읽은 양 말했다.

“당신들 정도 되는 민첩성이 없으면 사진을 찍기 전에 잡혀 죽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손목 밴드를 두드려서 연락처 하나를 전송했다.

“그리고 사진을 이쪽으로 보내요.”

그러면서 자인은 안주머니에서 알약 같은 걸 꺼내 물도 없이 꿀꺽 삼켰다. 이투하는 자인이 제 몸으로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인상을 쓰고 물었다.

“그건 뭡니까?”

“걱정 마요. 단순한 GPS예요.”

몸 밖에 지니고 있으면 당연히 몸수색을 할 때 발견될 테니까.

자인은 마지막으로 이투하들을 보았다.

“레기온에서 누가 토라를 반겨줄진 모르겠지만 이투하의 대장을 상대로 그물 드리우기도 아까운 피라미가 오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기왕 찍는 거 올해의 포토제닉상을 노려볼 만하게 잘 찍어 봐요. 최대한 얼굴까지 잘 보이게.”

그리고 자인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MCTC가 작전 승인을 내리기까지의 프로세스가 지난하다면, 바로 움직일 수밖에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레기온의 악명 높은 모집책 라헬은 엉덩이 무거운 상부가 불 방석 위에 앉은 양 펄쩍 뛰어오를 만한 상대였다.

자인은 폐가 타는 아픔을 억누르고 말했다.

“자인 서머 중위입니다. 정보활동국 SAU 소속, 식별코드는 TAG092352입니다.”

***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다가왔다. 가말은 양어깨를 감싼 채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침대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드십시오.”

팩에 담긴 플로스였다.

그제야 가말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배식을 나온 남자는 잠깐 말문이 막혀 쳐다보았다.

총수가 어지간한 여자보다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진짜 그 얼굴을 가진 여자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총수와는 다르게 한없이 청초하고 가녀린 느낌이….

가말은 중얼거렸다.

“미안해.”

“뭐가….”

남자는 뭔가 얼굴에 다가온다고 느꼈다.

뻑!

하지만 다음 순간 느껴지는 건 없었다. 가말이 올려친 주먹에 맞고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순간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플 거라서.”

가말은 침대 아래 발을 디뎠다. 바깥에서 소리를 들었는지 뛰어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쿠니스는 아직도 그녀가 막 감염됐을 때 그대로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래봬도 그녀는 삼천 년을 살아남은 뱀파이어였다.

비록 그 시간 대부분을 숨고 피해 다니는 데 썼다고 해도 숨어서 울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문가에 경비원들이 나타났다. 가말은 손을 털며 걸음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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