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쭈니>
쿠니스는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했다.
현장은 탱크라도 지나간 것 같았다. 남자들이 방과 복도에 널브러져 있고 벽과 바닥이 해머로 후려친 듯이 패이고 깨져있었다. 이게 가말의 솜씨라니, 믿기지 않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엄청나군요.”
뒤에서 간부 하나가 감탄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역시 총수님의 혈육이군요.”
총수와 똑같이 생긴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초식동물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대체 이런 여자를 왜 삼천 년이나 잡지 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잡아 와.”
쿠니스가 대수롭잖게 말하자 간부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널브러진 남자들을 가리켰다.
“이렇게 만든 사람을요?”
쿠니스는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도 가말은 가말이거든.”
절대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
“경비가 삼엄하군요.”
한 중사가 전방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거야 당연히 예상한 바고, 도영은 물었다.
“루아스 비율은요?”
맥코이 하사가 유심히 살피더니 대답했다.
“멀어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루아스는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질이 붙잡혀있는 걸로 파악된 건물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연락을 받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팀원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앞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맥코이 하사가 중얼거렸다.
“함정이 아닐까요?”
도영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다른 팀에서 무전이 들려왔다.
[카나리아(인질) 하나가 스스로 탈출한 거 같습니다.]
도영은 멈칫했다. 카나리아 하나, 가말이었다.
“스스로요?”
[네. 한 녀석을 족쳐보니 달아났다고 하는군요. 레기온 쪽에서도 찾고 있는 중이랍니다.]
가말로서는 언제, 어디서 MCTC에서 구출하러 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 행동한 것이리라.
일이 복잡해지게 되긴 했지만 가말에게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찾는 대로 연락해 주십시오.”
도영이 무전을 끝내자 한 중사가 물었다.
“그럼 이쪽에 잡혀있는 건…?”
“다른 카나리아겠죠.”
도영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브리처(통로개척 대원)가 나서서 산탄총으로 문을 쏘아 브리칭(진입을 위한 통로개척 행위)했다.
쾅!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두운 방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토라!”
도영은 외쳤다. 토라가 묶여있었다. 벽의 사슬에 양 손목이 묶여서 축 늘어져 있었지만 한눈에 토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토라….”
그 이름에 반응한 것처럼 남자가 꿈틀거렸다.
토라가 아니다.
도영은 깨달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라토?”
남자는 힘겹게 눈을 들고 도영을 보았다. 토라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붉은 눈동자. 하지만 그 눈빛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라토는 토라와 미세하게 다른 목소리로 물었다. 같은 중저음이어도 성격을 반영하듯이 토라는 좀 더 경쾌한 느낌이라면 이쪽은 더 낮았다.
도영은 정신을 차리고 무전을 쳤다.
“카나리아(인질) 둘 확보.”
도영이 손짓하자 팀원들이 다가와 라토를 묶고 있는 사슬을 절단기로 끊어냈다. 맥코이 하사가 받쳐줬지만 라토는 힘없이 무너졌다.
대원 여럿이 라토를 부축했다. 그때 라토가 생각보다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드페르… 소령님이죠.”
계속 붙잡혀있어서 소식에 어두울 사람이 정확하게 정체를 알고 있어서 팀이 움찔했다. 라토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계속 말했다.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드페르가… 섬에서 마티를 데리고 나왔다고…. 마티… 마티는 무사합니까?”
“무사합니다.”
도영은 대답했다.
“쌍둥이가…. 로열….”
라토는 웅얼거리다가 의식을 잃었다. 도영은 의아했다.
‘로열?’
한 팀원이 혀를 내차고 말했다.
“정말 딱 숨만 붙여놓았군요.”
동행했던 이투하 대원 여덟을 모두 탈출시켰었다고 하니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도 있겠지만 팔목을 묶고 있던 수갑이 피부에 파고들어 피딱지가 엉망으로 고여 있었다. 상처가 잘 낫는 뱀파이어임을 생각하면 상처가 낫기 무섭게 상처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가말이 토라를 생각하는 만큼 이 나머지 쌍둥이도 아낀다면 이 모습을 보기만 해도 비명을 지를 것이다.
도영은 말했다.
“이동합니다.”
팀이 빠져나가고 도영은 가장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다.
당장 스스로 달려가 가말을 찾고 싶었지만 다른 인질을 찾아낸 이상 이쪽은 이쪽의 일이 있었다. 라토를 탈출시키는 일이 먼저였다.
다행히 헬기까지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 착륙해있는 헬기가 보였다.
그때였다.
[탱고(테러리스트) 투 다운.]
저격수에게서 숨어있는 테러리스트 둘을 처치했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동시에 RPG(휴대용 대전차 유탄 발사기)의 탄두가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헬기를 스쳐 땅에 부딪쳐 폭발했다.
쾅! 쿠궁!
저격수가 막 RPG를 쏘는 테러리스트를 먼저 처리하지 않았다면 헬기에 맞았을 것이다.
“Go, Go!”
도영은 크게 손짓했다. 팀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엄호!”
도영을 포함한 대원 몇이 엄호하고 라토를 부축한 팀원들이 헬기에 올랐다.
“일곱!”
헬기에 탄 한 중사가 도영을 불렀다. 하지만 헬기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도영을 태우고 가려고 한다면 붙잡힐 것이다.
“가세요!”
도영은 외치고 헬기로 뛰던 방향을 틀어 뛰기 시작했다. 역시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같이 남은 대원 둘도 도영을 따라왔다.
상황 판단이 끝난 나머지 대원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헬기가 떠올랐다.
도영과 대원 둘은 강가로 달려갔다. 금세 적군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결국 밀리고 밀려서, 도영과 대원 둘은 강가에 임시로 만들어져있는 나루터 끝까지 밀려갔다.
나루터 끝에 닿자 더는 갈 곳이 없었다. 도영은 외쳤다.
“뛰어요!”
대원 둘은 다급하게 무거운 조끼를 벗어 던지고 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동안 도영은 엄호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숫자가 많은 적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위에서 보면 먹잇감 하나를 향해 몰려드는 좀비 떼가 따로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멈추었다. 강을 헤엄쳐 건너가고 있는 대원 둘은 관심 밖이라는 듯 도영을 둘러싼 학익진 형태로.
이때 도영은 이미 기분이 나빠졌는데, 꼭 그를 노린 듯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한 테러리스트가 다가와 도영의 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몸을 더듬어 무기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모두 뺏어갔다. 그러고는 도영의 다리를 걷어차서 무릎을 꿇리고 도축하기 직전의 개 다루듯이 목덜미를 붙잡아 고정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잔뜩 포진해있어서 검은 바다처럼 보이는 루아스들 사이에서 쿠니스는 마치 파도에서 떠오르는 바다의 왕처럼 떠올랐다. 제법 장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쿠니스는 도영의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영 드페르. 예전에 강연하와 함께 서울 지부에 있었지. 이래저래 인연이군.”
3년 전 도영은 대공을 붙잡은 현장에는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제 가족들 얼굴만큼이나 많이 봤지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정말 가말의 열여덟 살 때 같은 꼭 닮은 얼굴이 굉장히… 한 대 때리고 싶은 느낌이었다.
가말의 얼굴로 그런 재수 없는 표정을 짓지 말라고.
“처남이라고 불러야 하나?”
도영은 웃으며 빈정거렸다. 쿠니스는 미간이 꿈틀거렸다.
“미쳤군. 인간 주제에.”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나 코웃음을 쳤다.
“하긴, 이바노프 클랜과 관련된 건 심지어 그 집 개도 나완 안 맞으니 별로 놀랍진 않네.”
그러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 녀석, 라토 사타디. 가말의 클리엔테스지?”
도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쿠니스도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커다란 사내 녀석한테서 가말의 냄새가 나더군. 눈빛이나 하는 행동, 말하는 데서. 게다가 지나치게 날 미워하는 것도 이상했고.”
“…….”
“딱히 녀석한테 미움 살 짓은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얼마나 날 미워하던지 이투하라는 조직까지 만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덤비잖아?”
쿠니스는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 얼굴이었다.
“정말 이투하 등쌀에 못 살겠더라고. 붙잡아서 썩혀놓으면 뭐라도 나올 거 같았지. 그리고… Voilà.(봐.)”
쿠니스는 프랑스인인 도영을 조롱하듯이 손을 펼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픽 웃었다.
“하나가 더 있을 줄은 몰랐지만. 클리엔테스마저 쌍둥이라니 참 가말답지.”
도영은 말했다.
“현대엔 근친상간이 터부야. 알고는 있지?”
“유전적으로 열등한 아이를 낳는다고? 그런 건 몸의 이야기일 뿐이야. 가말과 난 한 영혼이야.”
“부탁이다, 제발. 토 나올 거 같으니까. 난 네 영혼 같은 거랑 키스하고 싶지 않거든.”
쿠니스는 눈 밑이 꿈틀거렸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열 받게 하는 녀석이군.”
“왜, 내가 키스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상처받았어?”
“상종하고 싶지 않군.”
쿠니스는 돌아보더니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가말-!”
그 목소리가 남긴 잔영이 공기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나와. 아니면 이 인간 녀석은 죽은 목숨이니까.”
사방은 한동안 조용했다.
“라토는 미끼였군.”
도영의 말에 쿠니스는 흘긋 그를 보았다.
“그 녀석은 가말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쓸모는 다했지. 이번에는 널 잡으려고 했지.”
그러더니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말이 워낙 달아나는 데 도가 터서.”
도영은 쿠니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냥 가, 가말. 난 괜찮으니까.”
쿠니스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꼭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듯이.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발소리가 울렸다. 가말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벗으면서 앞으로 나왔다.
「도영을 놔줘.」
도영은 눈을 굴렸다.
“내 말을 듣는 날이 있긴 있냐?”
도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쿠니스는 가말을 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어지간히 소중한가보구나.」
「도영은 우리 일에 관계 없잖아.」
「정말 없다고 할 수 있어?」
「없어.」
가말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쿠니스는 도영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가말, 봐.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는 너와 관계된 녀석을 죽인 적은 없어. 그러면 네가 정말 날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다니엘을 감염시켰잖아.」
쿠니스는 다니엘을 그냥 죽이지 않았다. 감염시켰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물어서.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감염을 이기지 못했고, 실패한 감염의 증거로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죽었다.
그 착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보는 게 그저 유일한 꿈이었던 그녀의 다정하고 여린 친구가.
쿠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려고 했던 거야.」
알고 있을 것이다. 감염을 이기고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감염시켰다는 건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하지만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어. 정말 돌아오면 조금은 인정해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다니엘은 친구였어.」
몇 번이나 말했지만 쿠니스는 믿지 않았다.
도영의 뒤에 선 쿠니스는 훗 웃었다.
「그럼 이 녀석은?」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쿠니스는 도영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어떨 거 같아? 과연 돌아올까?」
「쿠니스.」
쿠니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가말은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