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쭈니>
쿠니스는 도영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어떨 거 같아? 과연 돌아올까?」
「쿠니스.」
쿠니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가말은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졌다. 도영은 흘긋 뒤를 보았다.
「그런데 사실 그래.」
쿠니스는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 옆에 서있는 레기온 대원이 들고 있는 도영의 쿠크리를 뽑았다.
스릉.
네팔의 구르카 용병들이 적의 머리를 베어내던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칼날이 드러났다.
「네게 미움받는다고 해도 이 녀석은 예외야. 확실하게 죽이고 싶거든.」
쿠니스는 살기가 선득거리는 눈빛으로 말하고 바로 칼을 치켜들었다.
「쿠니스!」
가말은 엄청난 소리를 냈다. 단전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말 그대로 사자후 같은 소리였다.
그에 쿠크리를 든 쿠니스의 손이 멈추었다. 하지만 가말은 기백을 유지하지 못하고 거의 무너져 애원했다.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만…! 너랑 갈게.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 제발 그러지 마.」
섬에 숨어 살지 않았더라면.
더 강해졌더라면.
이 상황에서 도영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말은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서만은 안 됐다.
도영을, 구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말이야, 가말?」
쿠니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말은 다급하게 그들 쪽으로 뛰어와 쿠크리를 치켜든 손과 도영 사이에 섰다.
“가말.”
도영이 불렀지만 가말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쿠니스만 보고 이야기했다.
「약속할게.」
쿠니스는 의심스러워하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거짓말.」
「아니야. 약속해. 쿠니스, 제발…!」
이 상황에서는 탈출로가 없었다. 가말은 알았다. 레기온 쪽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쿠니스가 자신은 죽이지 않을 테니 차라리 지금은 그와 함께 가는 게 최선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덕분에 정말 달아나는 데는 도가 텄으니,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을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쯤은 도영을 살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말.”
그때 도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위기나 어투로 신기할 만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한테 네가 할 말은 따로 있어.”
잿빛의 푸른 눈이 조용히 빛났다.
“꺼져, 살인자 새끼야.”
쿠니스는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이 녀석은 안 돼.”
그리고 순간 엄청난 힘으로 가말을 밀어내며 칼을 내리쳤다. 가말은 눈을 크게 떴다. 당장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퍽.
총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이 쿠니스의 어깨를 때렸다.
철퇴로 후려진 것 같은 에너지에 쿠니스의 어깨가 뒤로 돌아갔다. 피가 튀고, 칼을 쥔 손의 각도가 틀어졌다.
도영은 흙이 튀어 오를 정도로 세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격수는 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고 도영은 저격수가 총을 쏘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말이 나서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녀의 성격상 탈출하지 않고 근처에 있다면 분명 나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계획에서 틀어진 건 아니었다.
이제 가말을 구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죽을 것이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도영은 어깨로 가말을 밀쳤다.
“……!”
쿵.
몸의 무게를 이용한 힘에 가말은 그대로 나루터에서 떨어졌다.
웅, 우우우우웅.
그 순간을 기다린 듯 곡선을 그리는 강 너머로 검은 고속정이 물살을 가르며 나타났다. 그리고 크게 호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속정 맨 앞에, 아까 헬기를 타고 탈출한 줄 알았던 맥코이 하사가 팔을 벌린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외쳤다.
“가말 씨!”
그가 받아줄 셈이라는 걸 깨달은 가말은 최대한 허리를 틀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맥코이 하사의 품에 떨어졌다.
쿵!
부딪치는 충격에 맥코이 하사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우우웅.
동시에 고속정은 유턴하기 위해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나루터와 일직선이 되어, 나루터 위의 모습이 옆에서 보였다.
가말은 맥코이 하사의 몸 위에서 일어날 틈도 없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져 어지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가말을 어깨로 미느라 한쪽 무릎을 꿇고 넘어져있는 도영이 보였고 그 뒤에 죽음의 신 모트가 웃고 있었다.
가말과 도영의 눈이 마주쳤다.
찰나, 가말이 무사히 고속정에 탄 걸 보고 도영은 안도한 얼굴이었다.
가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상황에.
그리고 모트가 죽음의 낫을 휘둘렀다.
콰직.
쿠크리가 도영의 목에 박혀들었다.
***
가말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칼날은 정확히 도영의 목 가운데를 파고들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이어서 근섬유와 신경들이, 마침내-
우득.
목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잘린 자리에서 폭발하듯이 반원형으로 터져나간 핏줄기가 희열에 찬 쿠니스의 얼굴을 세로로 치고 지나갔다.
모두의 눈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Fuck---!!”
한 중사가 비명에 가까운 욕설을 터뜨렸다.
하지만 총에 맞으면서 어깨가 틀어진 각도 때문에 단번에 목을 잘라내지 못했다. 쿠니스는 쿠크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퍽.
그 순간 다시 총격이 날아왔다.
투두두두.
바로 이어서 사방에서 소총으로 연사하는 총격이 쏟아졌다. 충돌 테스트용 더미처럼 총알 세례를 받은 전신에서 재와 파편이 튀었다. 이런 물리적인 충격이 계속 이어지면 뱀파이어도 무사할 수 없었다.
“젠장.”
쿠니스는 쿠크리를 집어 던지고 나무 뒤로 달려갔다.
갑자기 숲 너머에서 중무장한 MCTC 대원들이 나타났다. 소규모 팀이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한 것 같은 규모였다.
여기저기서 총격이 울려 퍼졌다. 이런 대규모 총격전에 대비하지 못한 레기온 대원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원들 중 일사불란하게 달려온 구출 팀이 도영을 챙겨서 강가에 도착한 고속정에 실었다. 그 시간이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속정은 당장 강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말을 잡아!”
쿠니스가 소리쳤다. 그러자 홍해에서 유대인들을 쫓는 파라오의 군대처럼 레기온 대원들이 강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멀어지는 고속정을 잡기엔 뱀파이어들도 역부족이었다.
반면 고속정 위는 아수라장이었다. 대원들이 저마다 목청껏 소리쳤다.
“소령님!”
“쿠크리를 뽑아!”
“하지만 그러면 출혈이…!”
쿠크리가 목 가운데 박혀있는 도영은 피로 젖은 머리카락이 흩어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이미 숨을 쉬지 않았다.
“이 상황에 출혈이 문제야?! 이미 목이…!”
그렇게 외치면서 루아스인 휴 대위가 쿠크리를 잡아 뽑아냈다.
그 순간에 모두 덤벼들어 가능한 한 모든 천을 모아 지혈하기 시작했다. 핏줄기가 그야말로 분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사방으로 솟구쳤다.
팀원들은 모두 금세 도영의 피로 흠뻑 젖었고, 고속정은 핏물을 양동이로 부어놓은 것처럼 온통 피로 미끈거렸다.
“눌러!”
“여기! 더!”
“지혈할 거 더 없어?!”
이 광경이 믿기지 않기는, 지혈하는 손을 멈추지 않는 한 중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고속정이 물살을 가르는 소리 사이로 괴성을 내질렀다.
“진짜냐고! 소령님 진짜 죽은 거냔 말입니다!!”
사방에 울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가말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도영의 피로 젖은 쿠크리를 보았다. 그리고 비호같이 쿠크리를 집어 들었다.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제 손목을 향해 내려쳤다.
찰나적으로 휴 대위가 그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기겁하고 당장 손을 뻗어 옆에 굴러다니는 소총을 잡았다.
콰직.
쿠크리는 휴 대위가 당장 집어 들어 끼워 넣은 소총에 박혔다. 소총이 거의 잘릴 정도의 파워였지만 다행히 그가 루아스였기에 각도를 틀어서 막아낼 수 있었다.
휴 대위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가말은 그가 이 상황에 자신을 막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이를 드러내고 외쳤다.
“무슨 짓이야! 치워! 당장 감염시켜야…!”
휴 대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 태도가 몹시도 단호해 어떤 의심도 가질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 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옆으로 피범벅이 된 대원들에게 둘러싸인 도영은 목에는 이미 핏물이 떨어질 정도로 새빨갛게 젖은 천 뭉치들이 뭉쳐져있고, 피가 묻은 얼굴에는 아예 핏기가 없었다.
배에 올려져있던 도영의 손이 툭 떨어졌다.
***
“엘리오.”
단정한 원피스를 갖춰 입은 사랑이 문가에 나타나 물었다.
“준비 다 됐어?”
“응.”
역시 단정한 차림을 한 엘리오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밖으로 나가 사랑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오는 능숙하게 차에 올랐다. 그러자 사랑은 휠체어를 접어 차 트렁크에 싣고 조수석에 올랐다.
차가 도로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았다.
“차가 좀 막히네.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까?”
“괜찮을 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엘리오가 피식 웃었다.
“왜 혼자 웃어?”
그 모습을 보고 사랑이 물었다.
“갑자기 도영이하고 가말이 생각나서.”
“두 사람이 왜?”
“가말은 도영이를 졸졸 쫓아다니고 도영이는 질색하고. 그러다가 가말이 한눈을 팔면 도영이는 또 그게 싫어서 투덜거리고.”
사랑도 그 모습이 생각나 웃어버렸다.
“그러게. 보고 있으면 뭐하나 싶다니까, 녀석들.”
***
옥상 헬기장에 헬기가 폭풍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철컹.
헬기의 문이 열리자마자 도영을 실은 스트레쳐카를 내리고, 대기하고 있던 의사 부대가 달려왔다.
“숨이 끊긴 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징후가 있습니까?”
“다른 손상은…!”
군인들과 의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섞여 아수라장이었다.
뒤이어 헬기에서 내린 가말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스트레쳐카가 핏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피로 흥건했다.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가는 흰 의사 가운들 사이로 누워있는, 피에 푹 젖은 군복을 입은 몸이 보였다. 그게 도영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피 칠갑이 된 팔에 찬 팔찌로 도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의사들이 소리치며 스트레쳐카를 끌고 달려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피로 물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가말은 도영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넋이 나간 채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성당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잦아들었다. 엘리오와 사랑을 포함해 사람들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제단 앞에 서있는, 평범한 일상을 상징하는 녹색 제의를 입은 신부가 경건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주님께 기도합시다. 오늘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무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