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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53화 (53/110)

53화<쭈니>

병원의 옥상 헬기장에서 도영을 태운 스트레쳐카가 사라지자 남은 의사 한 명이 돌아보고 말했다.

“아시겠지만 감염 대상자를 상대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모든 게 신의 뜻, 혹은 소령님의 의지죠.”

“목이나 어긋나지 않게 잘 붙여주십시오.”

한 중사는 말했다. 도영이 일어날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 투였다.

의사는 피에 젖은 손으로 들고 있는 패드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감염이 시작됐다고 해도 피를 지나치게 많이 흘렸습니다. 거의 몸에 남아있는 게 없을 정도입니다. 수혈이 필요한데 소령님의 프로젝트 도너는….”

카르텔을 확인하던 눈이 멈칫했다.

이내 의사는 고개를 들었다.

“이바노프군요.”

그리고 핏자국이 묻은 가운을 흩날리며 돌아섰다.

“가능한 한 많은 이바노프 클랜원을 부르십시오. 피가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

***

가말은 연하를 보았다.

“그러니까… 도영의 몸에 이미 바이러스가 있었던 거야? 이바노프의?”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는 소령님을 말려보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그런데 소령님이 그러더라.”

“너만 영원히 살려고?”

도영은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연하는 오히려 그 말에 더 기가 막혔다.

“프로젝트가 성공해도 영원히 불구 뱀파이어로 살 수도 있어. 정상적으로 감염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자, 봐. 지금 당장 내가 총을 맞는다면.”

도영은 제 가슴을 가리켰다.

“100% 죽어. 하지만 내 몸에 바이러스가 보균되어있다면 확률은 50%가 되겠지. 감염이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건 기회야.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기회. 근데 이런 기회를 놓치라는 게 말이 돼, 안 돼?”

“안 되는… 거 같네.”

연하는 떨떠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영은 손을 내저었다.

“알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연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소령님은 소령님이었지.”

가말은 한참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가말은 물속에서 눈을 감았다. 연하는 그런 가말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나도 가말이 올라오지 않았다. 욕조 속에 긴 머리카락이 일렁여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연하는 가말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가말, 너무 오래 있지는….”

가말은 눈을 떴다. 수면 너머로 그림자가 비쳤다. 투명한 물 덕분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연하가 보였지만 일순 이미지가 중첩되었다.

온갖 부유물이 떠있는 어두운 늪의 물 너머로 일렁이던 검은 그림자….

그때 거의 숨이 끊긴 가말은 무기력하게 가라앉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면에 흔들리는 달빛이 점차 멀어졌다.

늪 바닥에 갇혀있는 망령들이 발목을 쥐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눈앞이 어두워졌다. 수면 너머의 빛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가말은 흐릿한 눈을 감았다.

영혼이 먼 곳으로 흘러가듯이 모든 것이 흐려졌다.

쿵.

그런데 어느 순간 충격처럼 의식이 돌아왔다. 가말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물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고통스러웠다.

도와줘, 쿠니스.

방금 자신을 죽인 살인자에게 도움을 구하며 팔다리를 내저었다.

쿠니스.

촤악.

갑자기 수면을 뚫고 나온 손이 연하를 잡았다. 엄청난 힘에 연하는 자세를 잡을 새도 없이 끌려갔다.

커다랗게 물보라가 일었다.

“소위님!”

가말이 연하를 공격한다고 생각한 여군은 당장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겨누었다.

“잠깐!”

연하는 날카롭게 외쳤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욕조에 누운 연하는 자신을 올라타고 있는 가말을 올려다보았다.

난리통에 물이 사방으로 넘쳐 욕조에는 거의 물이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조명을 등져 그늘이 드리워진 붉은 눈에 물기인지 윤기인지 알 수 없는 반짝임이 돌았다.

“내가 쿠니스를 늪으로 끌어들였어.”

늪 위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가말은 생존 본능에 사로잡혀 무작정 쿠니스를 잡았다.

놀란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짚어 버텨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되이, 가말이 잡아당기는 힘에 늪으로 끌려 들어왔다.

둘이 같이 늪에 빠지던 그 날카로운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어두운 물속에서 쿠니스를 놓쳤다. 그리고 또 한동안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늪이 그녀를 뱉어낸 것처럼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혼자.

연하를 보며 가말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다 내가 시작했어. 전부 나 때문이야.”

연하는 당장 몸을 일으키며 가말의 팔을 붙잡았다. 살갗을 파고들어오는 힘이 날카로웠다.

“소령님은 목숨을 걸고 널 지켰어. 소령님이 한 일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마.”

가말은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자신에겐 울 자격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물었다.

“그럼 난 뭘 해야 해?”

연하는 조용하고도 강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너지지 않는 거.”

***

“도와드릴까요?”

토라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게 힘들어 보였는지 한 대원이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도움을 받아 토라는 헬기에서 내려 옥상에 발을 디뎠다.

MCTC에서 구하러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그를 쓰고 버리는 패로 여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모두….

“토라!”

크게 울리는 소리를 따라, 토라는 고개를 돌렸다.

옥상 저 멀리서 자인이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차림 그대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위에 티셔츠를 한 장 입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

막 다가온 자인이 물으려는 순간, 토라가 끌어안았다.

자인은 놀랐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무언가 치받치는 감정을 참는 듯 잠겨있었다.

“무사했어.”

그래서 자인은 꾹 눈을 감았다.

“무사했어요.”

지켜지기보다 지키는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누군가가 이렇게 안위를 걱정해주는 일이 낯설었다. 걱정해주기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약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 진심이 맞닿은 피부에 녹아들어서, 자인은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데에 마음이 편해졌다.

자인은 몸을 떼고 토라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요?”

오면서 응급처치를 받았는지 다행히 칼에 찔린 상처는 처치가 되어있었다.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숨은 붙어있어. 마티는?”

“가말 씨는 무사해요.”

“는?”

토라는 기민하게 그 조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자인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소령님께서….”

토라는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어디야?”

“수술 중이에요.”

“데려다줘.”

자인은 그를 만류하려고 했다.

“토라, 상처가….”

“데려다줘.”

자인은 더 만류할 수 없었다.

그건 한 번도 토라에게서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곧 폭발하려는 화산 같기도 하고 일렁이며 넘쳐흐르려는 잔 같기도 했다.

***

샤워를 끝내고 티셔츠에 청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인 가말은 ‘수술 중’ 패널에 불이 들어와 있는 수술실 앞에 앉아있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마티.”

가말은 천천히 정신이 살아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토라.”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토라 다쳤어.”

토라는 신경 쓰지 않고 수술실 문을 보았다.

“이게 뭐야?”

토라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자식이 한 거지?”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제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 같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했어. 내가 한 거야.”

“이게 왜 마티가 한 거야!”

벼락같은 소리가 사방을 때렸다.

가말은 흠칫했다. 눈에 그렁거리는 눈물이 형광등빛에 반짝거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토라도 제 소중한 파트로네스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마티, 진짜 바보야? 그 자식 탓이라고 악을 써야지!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해야지! 난 정말 마티를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걸 형제라고 할 수 있어?”

토라는 정말 화가 난 얼굴이었다. 가말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런 말하지 못했다. 그때 옆에 있던 연하가 나서서 말했다.

“마음은 알지만 상처부터 치료해요.”

헬기로 오면서 창상은 처치를 받았지만 아직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토라의 상태도 꽤 심각했다.

“그딴 생각하지 마. 호구 같은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가말이 대답하지 않자 토라는 아이를 혼내는 부모처럼 물었다.

“알았어?”

가말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고는 물었다.

“상처 치료하러 같이 가줄까?”

“됐어. 이젠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아프다고 울지 않으니까.”

토라는 다소 냉정하게 들리는 투로 말하고 돌아섰다. 가말이 반사적으로 몇 걸음 따라오자 손을 내저었다.

“있어.”

그러고는 가면서 자인은 물었다.

“아프다고 운 적이 있긴 해요?”

“마티가 그러는 걸 좋아했거든.”

“효자네요.”

토라는 쓰게 웃었다.

“효자 노릇도 힘들어.”

***

“연하야.”

이반이 다가왔다. 연하가 제 남편을 발견하고 물었다.

“소장님은요?”

“정신없겠지.”

어쨌든 레기온이 아지트로 쓰던 섬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반은 상태가 어떠냐고 묻듯이 가말을 고갯짓했다. 가말이 거의 정신이 나가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의외로 가말이 말했다.

“난 괜찮아.”

이쪽을 보는 눈빛이 맑았다. 이반은 안심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신은 차리고 있군.”

“연하 덕분에.”

이반이 제 아내를 보자 연하는 자신은 별일 하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반은 다시 가말을 보았다.

“타실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다며.”

가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좀 더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라틴어로 말했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대단해, 이반. 난 섬에 숨어 지낼 생각밖에 못했는데 꽃으로 그런 걸 만들 생각을 하다니. 더구나 바이러스를 보균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난 아이디어를 던질 뿐이야. 그걸 현실로 만들어내는 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가말은 수술실의 문을 보았다.

「도영은 생각했던 거겠지?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자신이 죽는 것.

아마 도영은 생각했을 것이다. 제 몸속에는 루아스 바이러스가 있다. 비록 한 번도 발현에 성공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있다.

그 상황은 돌파구가 없었다, 누군가가 희생하는 수밖에는. 그리고 도영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 당연한 듯이.

이반도 잘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었고 소령은 그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야.」

「응. 도영이라면 그랬겠지.」

가말은 역시 생각보다 담담한 투로 중얼거렸다.

징.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수술복 차림을 한 간호사가 나왔다.

가말은 벌떡 일어났다. 간호사는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바노프 클랜원 계십니까? 피가 더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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