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쭈니>
수술실 문이 열리고 수술복 차림을 한 간호사가 나왔다.
가말은 벌떡 일어났다. 간호사는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바노프 클랜원 계십니까? 피가 더 필요합니다.”
연하가 나서려고 하자 이반이 막고 말했다.
“제가 가죠.”
그리고 간호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도 가말은 서있다가 겨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왔다 가고, 피가 더 필요해 이바노프 클랜원들이 채혈실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와중에도 가말은 오로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수술 중’ 패널에 불이 꺼졌다.
가말은 다시 얼른 일어났다. 곧 문이 열리고 그대로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
현대 의학 기술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오랜 수술을 끝내고 의사는 꼭 그쪽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처럼 눈가가 까맣게 푹 패고 초췌해 보였다.
“따라오시죠.”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 걸어갔다. 몇 번의 유리문을 넘어간 곳은 ICU(집중치료실, Intensive Care Unit)의 밖이었다.
침대 채로 수술실에서 바로 이송된 도영은 유리벽 너머에 잠들어있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의사는 클랜의 수장인 이반을 보고 말했다.
“하지만 감염이 활성화 2단계에서 넘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가말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통유리 너머를 보았다. 도영은 선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목에는 갑옷 같아 보이는 커다란 목 보호대를 두르고 있었고 투명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주변에는 뭐에 어떻게 쓰는지도 알 수 없는 각종 기계들이 계속 작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영 주변에 모여든 짐승들처럼.
가말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저 기계들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건 좋은 거라는 걸 알았다.
옆에서 의사가 이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는 활성화 3단계가 시작되면 거의 감염이 성공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비는 2단계죠. 거기서 F-93 인자와 결합이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반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어쨌든 수술이 성공했다는 건 좋은 징조군요.”
“그렇습니다.”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조용해졌지만 가말은 계속 그대로 서서 도영을 바라보았다. 몇몇 사람은 가말이 눈은 깜빡이는지 쳐다보고 갈 정도였다.
‘도영, 일어나.’
가말은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나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
“마티. 좀 앉아.”
토라가 말했지만 가말은 서서 유리 너머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도영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 듯.
“마티.”
다가온 토라가 어깨에 손을 얹어 가말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토라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돌아보고 물었다.
“라토는? 여전히 못 만나?”
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참고인으로 조사한다나. 작전이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어.”
레기온과 접선한 것도, 태평양 연합이 사타디 섬을 무력 진압하겠다고 한 데에 화를 낸 것도 레기온이 이쪽을 믿게 하기 위한 연기였다.
라토는 최대한 대공 곁으로 가서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MCTC는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쪽은 용병이니까 정말 100% 확신이 들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거야 이해했다. 그래도 여태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섭섭해질 지경이었다.
“그 꼴이 돼서 돌아온 거 보면 몰라?”
토라는 거칠게 말했다. 동선이 엇갈려서 토라도 라토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몰골이 엉망이었다.’는 말 정도는 전해 들었기 때문에 알았다.
“미….”
가말이 또 미안하다고 하려는 기색이기에 토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러자 가말은 말을 삼키고 재빨리 눈을 굴리더니 대신 말했다.
“미쳤네.”
토라는 피식 웃고 제 귀여운 마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치료는 잘 받고 있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고는 당부했다.
“잘 지켜봐.”
“걱정 마, 그건.”
그때였다.
삐이. 삐이. 삐이.
갑자기 경고음이 울렸다. 가말은 흠칫했다. 유리 너머로 도영에게 연결된 기계 하나가 거칠게 울고 있었다.
[ICU 코드 블루. ICU 코드 블루.]
그리고 천장에서 방송이 나오기 무섭게 뱀파이어로서도 기척을 읽기 힘들 만큼 어디선가 의사들이 떼로 나타났다. 그러고는 치료실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외쳤다.
“Arrest(심장마비)! CPR!”
워낙 부착된 선이 많아 이미 상의 따위 입지 않은 도영의 가슴에 제세동기의 패드를 붙이고 소리쳤다.
당장 유리 앞으로 간 가말은 유리에 대고 있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계속 심정지 상태가 이어졌다. 의사들은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도영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내부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반대쪽은 이토록 조용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느새 가말 옆으로 사람들이 와있었다. 이반, 연하, 토라, 자인, 수혈해주기 위해 온 이바노프 클랜원들 모두.
토라는 중얼거렸다.
“일어날 거야. 바이러스를 엎어 메쳐서라도. 생긴 건 기생오라비 같아도 람보도 찜 쪄 먹을 만큼 터프하니까.”
오랫동안 심장마사지가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심장마사지 기계를 조작하던 의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다른 의료진들이 구석에 서있는 다른 기계를 끌고 왔다.
그동안 한 의사가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반에게 말했다.
“순환 장치를 연결해야 할 거 같습니다.”
가말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기계가 더 필요하다는 말은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리고 그 불안한 마음에 쐐기를 박듯 의사는 침통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뇌사상태에 빠지셨습니다. 바이러스도 활성화 2단계에서 수면 상태에 돌입했고요.”
가말은 믿기지 않아 다시 유리 너머 도영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의사가 계속 말했다.
“이번에도 프로젝트는 실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이반은 말을 잘랐다.
도영은 프로젝트 동의서에 서명하면서 이런 상황이 있을 거라는 걸 모두 예상했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프로젝트 참가자로서 자신의 죽음이 한 사람의 죽음보다 실험의 결과로 받아들여지리란 것도.
그렇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었다.
의사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활성화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소령님을 깨울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수도….”
그때였다. 갑자기 가말이 휙 옆을 지나갔다.
“마티….”
가말은 막 그녀를 부르려는 토라도 지나갔다. 그리고 자동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막 도영의 어깨에 순환장치의 관을 삽관하고 있던 의료진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지금 들어오면….”
누군가가 말리려고 했지만 가말은 성큼성큼 걸어가 의료진 사이를 밀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한 의사가 끝을 잡고 있는 관을 잡아 뽑아버렸다.
우당탕탕.
가말의 힘에 기계들이 앞으로 쓰러지며 박살났다. 의료진은 부서진 기계에서 날아오르는 파편들을 피하느라 펄쩍 뛰어 물러나며 기겁했다.
“무슨 짓을…!”
삐-
심정지를 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연결해! 당장!”
의사들은 도영을 처치하기 위해 달려갔다.
“내버려둬!”
하지만 공기가 우짖는 것 같은 고함에 움찔하며 멈추었다.
가말은 똑바로 서서 도영을 응시했다.
“도영은 포기하지 않아. 일어날 거야.”
도영은 잠든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다. 가말은 아래로 드리워진 속눈썹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영은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그녀를 볼 것 같았다.
삐-
심정지 소리가 이어졌다. 의사들은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외쳤다.
“지금 연결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그럼에도 가말은 아무 반응이 없는 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영은 포기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럴 거라는 완고한 그러나 허무한 믿음을 붙들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의사가 참다못해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가말을 밀치고-밀쳐지진 않았지만-마구 선을 끌어 모아 일어났다.
그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의사, 간호사 몇이 같이 뛰어나가 부서진 기계와 파편들을 치우고 도영에게로 갔다. 그리고 다시 관을 삽관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두가 멈칫했다.
삐- -- -
심정지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두 이미 너무 늦어버렸음을 깨달은 얼굴이었다.
옆에 서있는 다른 의사가 가말을 노려보았다.
“뇌사상태로도 살아있다면 몇 년 뒤에는 소령님을 깨울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 기회를 빼앗은 겁니다.”
의사는 천천히 도영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잠자듯 숨이 끊긴 도영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이내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영웅이 갔군요.”
의사는 간호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정신을 차린 듯이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중한 손길로 이불을 올려 덮었다.
하얀 천 아래로 도영이 사라졌다.
의사는 벽에 홀로그램으로 떠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사망선고를 내렸다.
“19시 02분 13초 사망하셨습니다.”
그는 천에서 손을 떼고 내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말을 지나쳐갔다.
그래도 가말이 도영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주려는 거였다.
가말은 꼼짝도 않고 서있을 뿐이었다. 모두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어쨌든 도영을 살리려고 했던 누구보다 애절한 마음은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최선의 의도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 리어왕이나 그녀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도 섣불리 가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주변을 비우면서 그녀에게 공간을 내주었다.
가말은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도영을 덮은 흰 천을 쥐고, 그저 쥐고 있을 뿐이었다. 벗기지도 덮지도 못하고.
도영은 죽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래서 믿었다. ‘이 사람이라면-’ 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또 이렇게 자신 때문에 죽어나간 사람의 리스트에 올라갈 리가… 그럴 리가….
“아니야.”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야!”
그건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 소리에 어떤 간호사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순간 가말은 눈을 까뒤집으면서 기절했다.
펄럭-
그녀가 붙잡고 있는 천이 같이 끌려 내려가면서 허공에 흩날렸다. 마치 손짓하듯이….
“가말!”
연하가 소리치며 뛰어갔다.
쿵.
가말이 쓰러지면서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