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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55화 (55/110)

55화<쭈니>

“아니야.”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야!”

그러면서 갑자기 가말은 눈을 까뒤집으면서 기절했다. 무너지는 몸을 옆에 있는 의사가 다급히 받으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 같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쿵.

가말이 늘어지면서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가말!”

연하가 기절한 가말에게 뛰어갔다. 뒤이어 뛰어온 의사가 가말의 의식을 확인하고 말했다.

“충격으로 기절한 거 같습니다. 언컨셔스입니다.”

“좀 안아 옮겨주시겠습니까?”

가말을 밖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그동안 연하는 도영을 보았다. 꾹 이를 물었다.

“죽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팀원들이 모두 죽었지만 그래도 도영은 믿었다. 정말 지옥의 뱃사공을 엎어 메쳐서라도 돌아올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짜 최악의 거짓말이었네.”

목소리가 떨려왔다.

도영이 잘못돼도 절대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자신은 분명히 말렸으니까.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서는 정말 도영이 잘못될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름 아닌 도영 드페르니까. 어떤 죽을 위기에서도 살아 나와서 ‘와,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 하고 농담할 사람이니까….

연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방이 시끄러웠다.

“멋대로 죽이지 마.”

모두 멈칫했다.

몇몇은 도영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가말 목소리였는데도 저도 모르게 그랬던 이유는, 완벽한 프랑스어였기 때문이다. 약간 몽펠리에 억양이 섞인.

돌아보자, 가말이 눈을 까뒤집고 바닥에 누운 그대로 입만 움직여 말했다.

“내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건 도영의 말투였다. 특정한 단어를 조금 늘여서 이야기하는 것까지.

하지만 이미 숨이 멎은 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하는 불가해한 눈으로 의사를 보았다. 그러자 의사는 당황해 더듬거렸다.

“의식이… 없습니다. 없는데….”

그러면서 가말을 힐끔거렸다. 그때 가말이 다시 입만 움직여 말했다.

“뛰게 하고 싶은데 심장이 너무 무거워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너무 놀라 그랬는지 마냥 침묵이 흘렀다. 가말은 쯧 혀를 찼다.

“망할, 그냥 넋 놓고 있을 겁니까?”

“C… CPR.”

한 의사가 더듬거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도영에게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CPR 들어갑니다!”

이어서 들리는 CPR 소리에 반사적으로 간호사가 건네준 제세동기의 패드를 도영의 가슴에 붙였다.

“목 조심하고! 100J!”

전류가 단숨에 들이쳐 도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200J!”

다시 전류가 도영을 내리쳤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300J!”

그럼에도 심장 박동 측정기의 모니터에는 활력이 살아나지 않았다.

의사는 심장마사지 기계의 패드를 붙이고 작동시켰다. 그러다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도영을 올라타고 옛날처럼 직접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강한 압박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가말이 몸이 꺾이도록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연하는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가말은 순식간에 식은땀 범벅이었다. 겨우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도영을 보았다.

그런데 상황을 지켜보던 한 의사가 벼락같이 외쳤다.

“의사란 작자들이 한 사람 말에 휘둘려서 뭐하는 짓이야! 연기한 거야! 말투를 흉내 낸 거라고! 그것도 몰라!”

그러면서 의사는 도영을 올라타고 있는 의사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소령님의 시신을 걸레짝으로 만들어서 실어 보낼 셈이야? 자기 임무를 다한 군인한테 존경심을 보여!”

하지만 멱살이 잡힌 의사는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건 결국 포기하는 거잖습니까!”

“그럼 가슴이 곤죽이 될 때까지 짓눌러댈 셈이야? 때로는 죽음이란 걸 받아들여야 돼.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라고!”

이곳에 있는 의사들은 모두 새로운 발견을 위해 앞으로는 미지의 황야밖에 없는 현대 의학과 과학기술의 최일선으로 나온 연구자들이었다.

프로젝트의 실패를 누구보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다들 실망감에 더해 감정이 격해졌다.

이반도 이 모든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감염은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일이고 외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멱살을 잡아끌고 나오려고 해도 오로지 감염을 겪는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

잠깐. 멱살?

‘멱살을 잡아끌고 나온다….’

바삭.

갑자기 이반은 카트에서 포장된 주사기를 집었다. 그리고 가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사기의 밀봉을 뜯었다.

“이반?”

가말은 이반이 하는 일이니 저항은 하지 않았지만 의아하게 보았고, 연하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래요?”

연하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이반은 가말의 팔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

그리고 가말의 팔 안쪽을 더듬어 피부 결대로 주사기를 밀어 넣었다. 이어서 주사기의 몸통에 피가 차올랐다.

이반은 주사기를 반도 채우지 않고 일어나 도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도영의 허벅지 대동맥에 주사기를 찔렀다.

“이바노프 씨까지 무슨…!”

의사가 기겁했다. 이반은 그야말로 엉망이 된 도영을 보았다.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도영은 서로 사이가 나아지기 전까지 꽤 적대감을 드러냈기에 이렇게까지 얌전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반은 말했다.

“루아스는 제 영역에 대한 소유욕이 강합니다. 난폭하고 화를 잘 내죠. 바이러스도 마찬가지겠죠. 제 몸에 다른 감염원이 침범하면 화를 낼 겁니다. 아주.”

말하며 피스톤을 꾹 눌렀다. 주사기 안에서 가말의 피가 소용돌이치며 도영의 허벅지 안으로 쭉 밀려들어갔다.

“특히 숙주도 그다지 성격이 좋진 않으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반을 보았다.

“백신의 개념을 생각하셨다는 거 알지만… 루아스 바이러스는 조금 다릅니다.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염원끼리 부딪쳐 결국은 공멸할 뿐입니다.”

“박사님.”

이반은 갑자기 말했다.

“저희는 이바노프입니다.”

“네, 그렇…죠?”

의사는 왜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반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바노프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모니터에 빛이 퍼졌다. 들불이 번지듯이.

모니터가 불빛으로 번쩍거렸다. 그건 노기가 번득이는 눈빛 같기도 하고, 수많은 별들의 명멸 같기도 했다. 번쩍거리며 잦아들었다가 다시 불길이 타오르듯이 번쩍거렸다.

의사는 놀란 눈으로 모니터를 보았다.

“활성화가 시작됐습니다.”

정말 꼭 화를 내는 것처럼 활성화가 급격히 시작된 것이다.

쿵.

그리고 천둥처럼 박동이 울렸다.

모두 도영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의식이라고는 없는 상태였지만 격전의 현장처럼 엉망으로 부서진 갈비뼈 안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 세찬 박동이 모두의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장이 피를 뿜어내며 물줄기가 끊긴 강처럼 잔잔해졌던 전신의 혈관에 피가 몰아쳤다.

콰아아….

순간 혈관이 팽창할 정도로 세차게 들이쳤다.

이어서 도영의 전신에 꼭 비늘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윤기가 차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그건 인간에게는 없는 피부의 ‘결’이 생긴다는 것, 즉 몸의 재조직이 시작되는 증거였다.

“감염이….”

한 의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감염을 이겼습니다.”

감염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처음 목격했는지 경이에 찬 목소리였다.

“말했잖아.”

가말은 아직 의식이 없는 도영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도영은 포기하지 않아.”

***

가말은 유리 앞을 알짱거렸다. 의사들이 도영을 수습해서 다른 방으로 데려가나 싶더니 유리가 벽처럼 불투명하게 변해버렸다.

그때 연하가 다가왔다.

“재조직 과정에 들어간 거야. 재조직이 끝나기 전까지는 볼 수 없을 거야.”

가말은 돌아보고 물었다.

“재조직이 뭐야?”

“루아스로 육체가 바뀌는 걸 말해. 너도 겪지 않았어?”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일어나니까 이렇게 돼있었어.”

“키가 커지고 몸집이 더 불어나긴 하지만 미묘한 차이야. 게다가 소령님처럼 이미 몸이 완성된 사람은 차이가 더 두드러지지 않을걸.”

그건 아무래도 좋아서 물었다.

“도영은 살아?”

그러자 연하는 가말을 마주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함까지 느끼는, 조용하게 벅찬 얼굴로 말했다.

“살았어.”

가말은 유리를 보았다. 뭐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너머에 있는 도영을 느낄 수 있었다.

연하는 잠깐 같이 있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넌지시 물었다.

“근데 정말 연기했던 거야? 아까.”

“응.”

가말은 바로 대답했다.

“진짜?”

연하는 오히려 의외여서 되물었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이고 담담히 말했다.

“흉내 낸 거야, 말투를.”

“그럼 의식을 잃었던 것도…?”

“아니었어.”

“굉장하네.”

연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말은 불투명한 유리창을 보며 말했다.

“도영이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포기할 수 없었어.”

연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럼 프랑스어는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거 아냐?”

“도영 말투는 흉내 낼 수 있어.”

그러더니 가말이 도영과 똑같은 말투로 이러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겠냐?”

연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진짜 소령님인 줄 알겠다.”

“하지만 내가 도영 말투로 말하면 웃기잖아.”

“그러네.”

그러고는 연하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가말을 보았다.

“고마워.”

“마티.”

그때 토라가 다가왔다. 자인은 그 옆에 있었다.

“토라. 괜찮아?”

가말이 물었다. 토라는 유리 쪽으로 고갯짓하고 말했다.

“냉동 생선만큼 의식이 없는 타와보다는.”

그리고 불투명한 유리를 보고 토라는 중얼거렸다.

“가끔 마티가 이해되지 않아. 누군가가 살아서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 이 짓을 어떻게 또 하고 또 하는지.”

자인은 라토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죽인 니카….

그래도 이 두 사람은 니카가 살아 돌아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랬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뭘 하더라도 그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하길 원했을 터였다.

“희망이니까.”

가말은 불투명한 유리를 보며 말했다.

“희망이 버티게 해줘. 언젠가 나도 포기하려고 했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토라에겐 그녀를 비난할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라토와 니카의 사이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은 것, 그래서 결국 라토가 죽고 뱀파이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토라까지 뱀파이어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그런데 토라 네가 눈을 뜨고 말했어.”

“고마워, 마티.”

감염을 이기고 깨어난 토라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상처 입었지만 결국 사람의 아들이 그녀를 구원했다.

가말은 토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어. 희망이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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