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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56화 (56/110)

56화<쭈니>

“가말 씨는 뱀파이어가 돼선 안 됐던 거 같군요.”

자인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토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뱀파이어에겐 본성이란 게 있어. 하지만 마티의 착함은 그 본성도 이겨버린 거야. 만약 섬에서 잠들지 않았다면 마티는 살아남지 못했겠지. 그만큼 모질지 못하니까.”

저런 사람이 그 대공과 쌍둥이라니, 그것도 유전자의 신비였다. 이만하면 쌍둥이의 어머니가 한 배에서 천사와 악마를 낳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토라.”

갑자기 자인이 불러 토라는 돌아보았다.

“라토 대장님, 만나볼래요?”

“하지만 지금 면회는….”

토라는 의아해하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대신 물었다.

“돼?”

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라토가 구금되어있는 동으로 갔다. 당연하지만 앞에는 헌병 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개중 한 헌병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미 말을 해둔 모양이었다.

“무사한 것만 확인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토라는 자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고마워.”

자인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토라는 병실로 들어갔다.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린 라토도 토라가 온다는 기별은 받지 못했는지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환자복 안으로 붕대가 보였고 이마와 입술에 터진 자국도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팔은 수갑으로 침대에 고정되어있었다.

“라토.”

토라는 벅차오르는 음성으로 제 쌍둥이를 불렀다. 라토는 좀 더 차분한, 하지만 역시 똑같이 벅찬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토라.”

두 사람은 팔씨름을 하듯이 손을 잡았다. 혹은 불완전하던 것이 짝을 찾듯이.

토라는 그대로 라토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제 쌍둥이의 어깨를 감싼 채로 말했다.

“걱정했잖아, 이 얼간이야.”

“미안해.”

라토는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토라는 라토를 놓아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이투하는 우리가 같이 만든 거였잖아.”

“마티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

아주 당연한 이치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투였다. 그리고 라토는 물었다.

“소령님은?”

“살았어.”

라토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토라와 똑같은 붉은 눈으로 자인을 보았다. 그러자 토라가 그녀를 소개했다.

“자인 서머 중위야. 널 찾는 걸 도와줬어.”

“반갑습니다.”

라토는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자인은 라토와 가볍게 악수했다가 손을 놓았다.

외모는 거의 똑같았지만 쌍둥이는 눈빛이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한 가지는 분명했는데, 니카가 이미 고인이 된 몸이라 다행이라는 사실이었다.

토라를 가지고도 이쪽을 탐냈다니, 실제로 만났다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은 내면 안 된다고 직접 ‘교훈’을 가르쳐줬을 것이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헌병이 말했다. 이제 막 들어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사한 것만 확인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토라는 라토에게 말했다.

“물으면 묻는 대로 다 대답해주고 쓰라는 대로 다 써줘.”

그러고는 둘은 밖으로 나왔다.

“고마워요.”

갑자기 자인이 말했다. 토라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가?”

“지켜줘서요.”

토라는 실소를 지었다.

“중위가 날 지켜준 거지.”

솔직히 토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인이 뒤따라왔기 때문에 둘 다 무사할 수 있었다고.

사실 혼자 쳐들어갈 당시에는 알아서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지만 일이 잘못됐다면 라토를 구하기는커녕 자신도 붙잡혀서 죽었을 수 있었다. 그에게 플랜B란 없었으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왜 그렇게 무모했나 싶었다. 아마 라토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먼 탓이었을 것이다.

“대장님의 힘이 없었다면 그런 무모한 계획은 실행조차 못했을 거예요.”

자인은 똑바로 그를 보았다.

“대장님이 계속 절 지켜주려고 했던 거 알아요. 그래서 본래대로 싸울 수 없어서 더 많이 다쳤다는 것도… 감사합니다.”

토라는 한동안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고마워.”

이번에는 자인이 물을 차례였다.

“뭐가요?”

“그렇게 말해줘서. 드디어 누군가를 지킬 수 있었구나 싶네.”

토라는 웃었다.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자인은 이제껏 토라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니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라토를 더 사랑했는지, 이런 남자를 두고 살인자가 되는 동시에 자살을 택할 수 있었는지.

토라의 영혼은 맑고 깨끗했다. 꼭 그의 파트로네스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서있었다. 자인이 먼저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자인은 살짝 묵례하고 돌아서서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토라는 무언가 말하려다 그냥 삼켰다.

그는 자인 서머라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건 분명했다.

아마 자인이 자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온갖 수를 써서 그녀를 유혹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하는 짧은 시간을 즐기고 가볍게 가던 길을 마저 갔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그에게도 상도라고 할 만한 것은 있었다. 저렇게 인생을 곧고 바르게, 온 의자와 투지를 다해 살아가는 사람은 방해하는 법이 아니었다.

***

“가말.”

여전히 ICU 앞에 앉아있는 가말에게 군복을 입은 연하가 다가왔다.

“이틀 내내 여기 있었다면서.”

밥은 이 자리에 앉아서 먹었고 볼일이 급할 때만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후다닥 갔다가 후다닥 돌아왔다.

정말 식음을 전폐하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문 앞에 앉아 기다리는 강아지 같더라고, 그녀를 경호하고 있는 군인이 말해주었다.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조직이 거의 끝났대. 곧 도영 볼 수 있어. 자리 비우면 안 돼.”

연하는 옆자리에 앉았다.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연하는 가말과 같이 유리창을 보며 희망을 담아 중얼거렸다.

“소령님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곧 깨어나.”

누가 그럴 거라고 알려주기라도 한 듯이 확신하는 투였다. 연하는 피식 웃었다.

“소령님 깨어나면 가장 먼저 뭐라고 할까?”

“욕.”

가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해 연하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소령님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무섭네.”

“도영을 계속 지켜봐서 잘 알아.”

가말은 똑바로 앞을 보았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연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랑이구나.”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가말은 벌떡 일어났다.

“들어오십시오.”

정말 도영을 볼 순간이 되자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가말은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말은 천천히 ICU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생긴 기계가 많은 희고 깨끗한 공간에, 도영은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예전보다 작은 목 보호대를 하고 있었고 여전히 온갖 선이 연결된 채였다.

하지만 일전의 격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상처는 모두 잘 치료되어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낯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남자는 도영이었지만 도영이 아니었다. 가말로서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이 그냥 그렇다고만 느꼈다.

“도영…이야?”

가말은 확신할 수 없어 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의사가 옆에서 대답했다.

“몸이 재조직됐죠. 루아스가 되신 겁니다.”

의사도 도영을 보았다.

“소령님처럼 몸이 완성된 사람은 별로 달라질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섣부른 이야기였던 거 같군요.”

가말은 평온해 보이는 도영을 보다가, 침대에 기어 올라갔다. 의사가 말리려고 했다.

“잠깐, 아직 건드리지….”

“그냥 두세요.”

연하가 말해 의사는 손을 내리고, 가말은 도영 옆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도영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낮고 부드러운 숨소리였다.

살며시 도영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단단한 근육 너머로 크고 힘찬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소리를 음미하며 가말은 눈을 감았다.

‘도영은 살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

도영은 눈을 떴다.

사방은 빛 한 점 없이 깜깜했다. 관 속처럼 어둡고 답답한 느낌이었다. 한동안은 자신이 깨어났는지 아직 자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웅….

천장에서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방은 온도와 습도가 딱 맞게 쾌적했다.

“Putain….”

도영은 나직이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락.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이 흩어져 내렸다.

이불이 흩어진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침대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목을 짚었다.

‘목이….’

다행히 목이 제대로 붙어있고 붕대가 감겨있었다. 유난히 직물이 짜인 모양이 세세하게 느껴지고, 손끝에 쓸리는 느낌이 까슬까슬하고 건조했다.

제 목에 칼이 와 박히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건 정말…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고통이라고는 느낄 새도 없이 말 그대로 칼로 갈라내듯 모든 게 단절되는 느낌이었는데 그 전원이 꺼지는 것 같은 감각 자체가 싫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믿지 못하는 듯 커지는 가말의 눈이었다. 그 뒤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슴에 심장 박동 측정기의 무선 패드가 붙어있고 팔에는 링거 바늘이 연결되어있었다.

어둠에 눈이 적응돼서 대충 방 안 풍경이 보였다. 기지 안에 있는 방 같았다.

띠.

옆에 있는 기계가 작게 울었다. 그러자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문이 열리면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문가에 한 인영이 어른거렸다.

“소령님.”

이어서 방 전체에 불이 켜졌다. 눈 속에 때려 넣듯 한꺼번에 쏟아지는 빛에 도영은 눈을 찡그렸다. 유난히 눈이 부셨다.

들어온 사람은 의사 가운을 입은 젊은 흑인 남자였다.

“깨어나셨군요.”

본 적 없는 사람이었고 의사 가운에 이름표도 붙어있지 않았지만 한눈에 남자가 군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도영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는 대답했다.

“이스트워터 기지입니다.”

마치 그 말 하나로 도영이 전부 이해할 거라고 알듯이.

왜냐하면 이스트워터 기지는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기지였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가 기밀 프로젝트 관련자들에게만 공개된.

도영은 물었다.

“거울을, 좀 볼 수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제 목소리가 좀 더 낮았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와 심장 박동 측정기 패드와 링거 바늘을 제거해주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도영은 이불을 걷고 바닥에 맨발을 디뎠다.

끽.

그가 일어나는 힘에 눌려 침대가 작게 울었다.

벽에 달려있는 전신 거울로 다가섰다. 거울에 무늬가 없는 흰 환자복을, 상의는 반쯤 풀어 헐렁한 상태로 입고 있는 남자가 비쳤다.

도영 자신은 아니었다. 닮긴 했으니 아마 그에게 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보여서가 아니라, 더 성장한 느낌이.

그런데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거울을 더 자세히 보았다. 도영이 움직이는 대로.

‘이건 나야.’

도영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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