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57화 (57/110)

57화<쭈니>

‘이건 나야.’

도영은 깨달았다.

제 입술 한쪽을 들춰보았다. 송곳니가 날카로웠다. 눈은 원래 색이었지만 동공 안쪽에 본 적 없는 일렁임이 있었다.

“루아스….”

도영은 중얼거렸다. 이 변화는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는 루아스가 된 것이다.

그때 목에 둘러진 붕대가 눈에 띄었다. 의사가 그 타이밍을 기다린 듯이 물었다.

“좀 봐도 되겠습니까?”

도영은 순순히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의사는 가운 주머니에서 라이트를 꺼내 그의 눈에 비춰보고 목에 감겨있는 붕대를 풀었다. 그러고는 목의 흉터를 확인했다.

“흉터는 사라질 거 같지 않군요.”

거울을 돌아보자 제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도영은 날카로운 송곳니나 묘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봤을 때보다 더 자신이 루아스가 됐음을 실감했다.

목 가운데를 목걸이처럼 보이는 흉터가 휘감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흉터였다.

그의 목에 영원히 남을 생과 사의 경계.

하지만 흉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도영이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지잉.

그때 자동문이 열리면서 연하가 들어왔다.

“소령님.”

그러고는 침대에 앉아있는 도영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보았다.

“정말 루아스가 됐구나.”

그런데 연하 뒤에 들어오는 정장을 입은 여자가 낯익었다. 타실 프로젝트에 대한 1차 브리핑 때부터 얼굴을 봐왔던, 타실 프로젝트의 ISLE 측 담당자였다.

그녀가 도영을 찾아왔다는 의미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타실 프로젝트의 담당자도 도영을 보더니 거의 감격한 듯이 중얼거렸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요. 타실이 성공했다는 게.”

사실 가말은 도영을 감염시키기에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고, 그가 루아스로서 되살아났다는 건 타실 프로젝트가 성공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도영은 제게 연결되어있던 링거를 쳐다보았다.

혈액 팩에 쓰여 있는 이름이었다.

이바노프 형.

뱀파이어는 거의 클랜마다 혈액형이 다르기 때문에 혈통 이름이 곧 혈액형의 이름이었다.

갓 감염을 이기고 일어나면 사람 하나 정도는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허기에 시달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다. 아마 계속 수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하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 우리 클랜원이 된 걸.”

도영은 연하의 손을 보다가 맞잡았다. 그리고 도영이 손을 놓으려는 순간에 꽉 잡아 끌어당겼다.

“타실은 거의 실패한 프로젝트였어.”

화가 난 목소리였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야?”

도영은 물끄러미 연하를 보았다.

“내 간절함이 통할 거라고 믿었어.”

“소령님이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누가 그래? 내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네가 알아?”

연하는 기가 막혔다. 패기 하나로 다른 장교들과 멱살 잡고 싸우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징그러워. 손 놔.”

그러면서 도영은 연하의 손을 털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뜨자마자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가말은 어디 있어?”

“기지에 있어.”

연하는 제 옆을 지나가는 도영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도영이 옷장을 여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유니폼은 새로 준비해뒀어. 옛날 옷은 모두 맞지 않을 거야.”

확실히 옷장에 준비된 옷들은 예전보다 한 사이즈 컸다. 도영은 아무 옷이나 집어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내가 그렇게 되고 어떻게 됐어?”

거울에 옷을 갈아입는 도영의 뒷모습이 비쳤다.

“팀은 거의 죽은 소령님을 데리고 현장을 벗어났어.”

연하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도영은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티셔츠도 입다 만 채로 양팔에 걸고 있는 상태였다.

연하는 도영을 보았다.

“누가 소령님을 살렸느냐고 한다면 가말이라고 해야 할 거 같아. 아니면 뇌사에 빠진 채로….”

도영은 더 들을 것도 없이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급히 복도를 걸어갔다. 바쁘게 구는 그를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보았다.

도영은 식당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니까 식당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식당은 북적북적했다. 사람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팀원들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던 팀원들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누가 자신들을 쳐다보는지 깨닫지 못하는 얼굴이더니 하나둘 깨닫기 시작했다.

“소령님!”

마침내 도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팀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깨어나셨군요!”

팀원들은 당장 수저를 집어던지고 달려와 도영을 에워쌌다. 그 사이로 사방을 둘러봤지만 가말은 보이지 않았다.

“가말은 어디 있습니까?”

도영은 질문해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탁탁탁탁.

식당 밖에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구에 가말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하지만 미처 도영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섰다. 얼굴이 창백했다.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기도 했지만 며칠간 잠이나 식사나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가말.”

도영은 성큼 가말 앞으로 다가섰다. 그럼에도 가말은 차마 무언가를 하지 못하고 도영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도영은 한품에 가말을 끌어안았다. 가말은 숨을 멈추었다. 몸이 속절없이 떨려왔다.

결국 가말은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도영이 죽었어.”

도영은 가말의 뒷머리를 감싸 얼굴을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속삭였다.

“안 죽었어. 그리고 너 때문이 아니야. 그 자식 때문이지.”

가말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울며 말을 토했다.

“나 때문에 쿠니스가 도영을….”

도영은 가말의 얼굴을 감싸 쥐고 떼어내, 키스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도….”

가말이 말하려 했지만 도영은 각도를 틀며 더 깊이 키스했다.

도영은 가말을 깊이 끌어안았다. 제 팔로 이 몸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도영… 숨이… 숨이 막혀.”

가말이 숨을 몰아쉬며 더듬거렸다. 아무리 강하게 끌어안아도 가말이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어서 도영은 의아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힘이 강해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팔에 힘을 풀고 싶지 않았다. 가말을 더 느끼고 싶었다.

도영은 가말을 놓아주자마자 그녀의 손목을 쥐고 홱 끌었다. 뒤에서 오오오 함성이 터지고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가 따라왔다.

“남자다!”

“멋지다!”

대원들은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가말은 도영에게 끌려가며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도영을 보았다. 그리고 깨닫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문이 열리고 도영이 가말을 밀치다시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가말이 돌아보려는 순간에 끌어당겨 키스했다.

“도… 응….”

도영은 가말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 입술을 겹치며 한 걸음씩 뒤로 밀었다. 가말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리가 침대에 닿은 순간 가말은 손바닥으로 도영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도영… 더 쉬어야….”

도영은 가말의 얼굴을 감싸 쥔 그대로 말했다.

“내가 지금 쉬어야 할 사람으로 보여?”

눈이 열기에 젖어있었다.

가말이 말문이 막혀 쳐다보고 있는 사이 도영은 다시 입술을 겹쳤다.

가말이 헐떡이는 숨소리, 심장이 뜨거운 피를 뿜어내며 뛰는 소리, 서로의 살갗이 스치는 느낌….

모든 감각을 증폭시켜놓은 느낌이었다. 이건 꼭 현미경으로 확대된 것 같은 세상이었다.

혀의 돌기가 스치는 느낌까지도 인간이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가말은 제 얼굴을 감싼 도영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다소 강하게 도영을 밀쳐 침대에 앉게 했다.

“도영은 막 일어났어. 쉬어야 돼.”

도영은 그에게서 손을 떼려는 가말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키스하며 가말을 끌어당겨 제 위로 올라가게 했다. 가말은 반사적으로 손과 무릎을 침대에 짚고 엎드렸다.

이렇게 가말이 민감하게 느껴지는데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도영, 쉬어….”

가말은 움찔했다. 큰 손이 허벅지를 쓸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영은 몸을 돌려 가말을 아래로 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제 티셔츠를 잡았다.

“내가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루아스가 된 걸 깨닫는 순간 처음 한 생각은.”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너와 할 수 있겠다는 거였어.”

욕망으로 거의 날카롭게 빛나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가말은 움찔했다. 도영은 가말 옆으로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거의 죽었다가 일어나서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지만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동정심을 가져줄걸.”

가말이 시선을 피했다.

가말은 자꾸 물러섰다. 뭔가 그녀를 뒷걸음질 치게 하는 게 있을 것이다.

혹시 대공 녀석 때문에 그러는 건가 싶어서 도영은 화가 났다.

“도영 같지가 않아.”

그런데 가말이 말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도영의 벗은 몸을 보고는 보면 안 될 거라도 본 듯이 시선을 내리깔면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랑 이러는 거 같아서….”

“가말.”

불렀지만 가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날 봐.”

가말은 주저하다가 도영을 보았다. 도영은 가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누구야?”

가말은 천천히 눈을 움직여 앞에 있는 남자를 훑었다.

기본 바탕은 그대로지만 좀 더 ‘남자’가 된 느낌이었다. 인간이었을 때 그렇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더 그렇게 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가말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눈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말은 도영의 얼굴을 감싸 입 맞추었다.

“도영이야.”

***

블라인드 틈새로 스며든 햇빛이 어딘가에 비쳐 프리즘을 통과한 것처럼 무지개 색으로 가말 위에 쏟아졌다. 색의 강물에 잠겨 여체가 뜨거운 환락에 몸부림쳤다.

“가말.”

도영은 몸속에 넘실대는 불꽃을 터뜨리듯이 연인을 불렀다.

“도영.”

작열하는 하얀 불꽃같은 몸이 넘실거렸다.

“도영….”

귀가 멍해지는 가운데 가말은 교성을 내질렀다.

“뜨거워, 도영. 너무….”

가말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껏 숨을 쉬는 걸 잊고 있던 것 같았다. 가슴이 정신없이 들썩거렸다.

도영은 다른 세계에서 돌아온 것 같은 가말에게 물었다.

“괜찮아?”

가말은 한참 반응을 못하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파?”

가말은 고개를 저었다.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태까지 그들이 했던 일들과는.

도영은 무너지듯이 옆에 누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 누워 서로를 느꼈다. 몸에 배인 땀이 아교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온몸이 맞아떨어져서 빈틈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영이 가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말은 조용히 그 손길을 느끼는 동안 언젠가 자신이 외로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다가 흉터에 시선이 닿았다. 도영은 보지 못했지만 가말의 눈이 흔들렸다.

끔찍한 흉터였다. 도영이 사는 동안, 말 그대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말은 충동적으로 흉터를 핥았다. 도영은 움찔했다.

하지만 가말은 계속 흉터를 핥았다. 새끼의 상처를 보듬는 어미 새처럼 꼼꼼히. 이러면 흉터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처음에는 움찔했지만 그러는 동안 도영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너….”

목 깊은 곳에서 탁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내가 엄청 참았다고 하지 않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