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쭈니>
자인은 화장실을 들어가려다가 안에서 나오는 토라와 부딪쳤다.
“아, 미안해요.”
“아냐. 화장실 비었어.”
“네.”
서로 그렇게 말은 했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자인은 화제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별로 술을 안 마시던데요.”
토라는 뜻밖이라는 듯이 자인을 보았다.
“보고 있었어?”
“네? 그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정말 그렇게 들려서 자인은 저도 모르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자인은 말했다.
“이제 가보려고요.”
토라는 의아했다.
“벌써?”
“네. 내일 약… 일이 있어서.”
“아, 그래.”
또 침묵이 이어졌다.
토라는 평소처럼 능글거리면 될 텐데 여자 앞에만 서면 얼어버리는 이 모쏠 같은 반응은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럼… 가볼게.”
토라가 말하자 자인은 정신을 차린 듯이 화장실 안을 가리켰다.
“네. 저도 화장실….”
둘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가려다가 다시 같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해서 자꾸만 부딪쳤다. 토라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사과했다.
“미안.”
“아뇨.”
겨우 토라는 복도로 나오고 자인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토라는 애써 몇 걸음 걸어가다가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자인은 화장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숨을 길게 내쉬고 돌아서는데 그 모습을 복도 끝에 서있는 가말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토라는 괜히 뜨끔해서 물었다.
“아냐. 토라도 젤리 먹을래?”
그러면서 가말은 제 방에서 가지고 나온 젤리 봉지를 들어 보였다.
“마티, 그런 거 너무 좋아하면 이 썩어.”
“이렇게 단 거 없었어. 맛있어.”
하긴, 섬에서 제일 단 거라고 해봤자 사탕수수인데 늘 사탕수수만 씹다가 이런 화학의 맛을 봤으니 신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토라는 피식 웃었다.
“우리 마티 이제 보니 완전히 문명 세계 체질이네.”
***
반면 도영과 연하는 2층 베란다에 서있었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 도영은 물었다.
“히샤는 잘 커?”
히샤는 연하의 아들이었다.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즘엔 말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이반을 닮은 얼굴로 밥을 오물거리고 있는 거 보면 너무 귀여워서 정말 내가 낳았나 싶어.”
“국장을 닮은 귀여운 얼굴은 상상이 안 되네.”
도영은 여전히 이반을 옛 직함으로 불렀다.
“귀여워, 엄청.”
그러더니 연하는 미안해하는 얼굴을 했다.
“자주 못 보여줘서 미안해.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
뱀파이어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건 뱀파이어가 피를 마신다는 것만큼 확실한 명제고, 상식이었다.
하지만 간혹 인간일 때의 임신 능력을 잃지 않은 가임 혈통이 존재했는데, 이바노프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바노프 클랜에는 원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루아스들 가운데 태어난 두 아이가 존재했다.
이반의 아들과 렉스의 딸.
이 두 아이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크고 파급력이 클지 이반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극비리에 부쳤다.
심지어 도영마저 딱 한 번밖에 못 봤을 정도로.
“신경 쓰지 마. 히샤가 안전한 게 더 먼저니까.”
도영이 말하자 연하는 그를 잠깐 보다가 물었다.
“너 부모님께는?”
그에 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말 못 했어. 연락은 몇 번 해서 아직 이상한 점은 찾지 못하시는 거 같지만.”
엘리오와 사랑은 도영이 몇 주간 영상 통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들이 한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는 게 워낙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자만 몇 번 보냈는데, 뭔가 눈치챈 낌새는 없었다.
연하는 말했다.
“얼른 말씀드려. 하루라도 더 같이 있어야지.”
그랬다. 인간인 부모님은 언젠가 가고 도영은 계속 이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도영은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하네. 두 분이 나보다 먼저 가실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두 분이 가시고 나서도 난 계속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하지만 가말이 같이 있잖아.”
그러면서 연하는 파일을 내밀었다.
“이거.”
파일에는 ISLE의 로고가 찍혀있었다.
“가말을 검사한 결과야.”
도영은 파일을 받아들었다. 연하는 페이지를 넘기는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뒤에는 라토와 토라 대장님 결과지도 있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타디 혈통도 가임 혈통이야.”
도영은 놀라지 않았다.
“늪에 빠졌다가 감염됐다고 했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종종 늪에 빠졌다가 뱀파이어가 된 케이스가 보고되고는 해요. 그리고 이 케이스가 중요한 이유는….”
연구원, ISLE 산하의 제약회사 가넥시와 얼마 전 통합된 헥사 사이언스 바이오 연구소의 연구원은 말했다.
“이 뱀파이어들은 가임 능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정확하게는, 인간일 때 가지고 있던 가임 능력을 잃지 않았다고 해야겠죠.”
“왜 하필 늪입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늪의 화학 작용 때문이에요. 늪에서 미라가 만들어지는 이유죠. 비슷한 이유로 늪에 남아있는 X 바이러스는 변형을 거치지 않은 원형에 가까웠어요.”
연구원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즉, 원형 바이러스는 인간일 때 가임 능력을 죽이지 않는 존재였던 거죠.”
“둘은 아이를 가질 수 있어.”
연하는 말했다.
“당장은 아냐.”
도영은 결과지를 보면서 단언했다.
“그 녀석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야.”
한참 파일을 읽고는 닫았다.
“대공 녀석, 도와주는 곳이 있을 거야. 지금까지 했던 모든 일이 레기온의 힘만으로 했다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 옛날 같은 세력도 없을 텐데.”
게다가 3년이나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을 이렇게 지극정성을 다해 도와준다?
물론 대공, 즉 쿠니스가 그만한 대가를 제공했다면-혹은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3년 전 쿠니스가 붙잡혔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어 재산은 전부 압수했고, 쿠니스와 조금의 연결 고리라도 있다면 모두 몽둥이로 때려잡듯이 잡아넣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잡았던지 한동안 그쪽 바닥에는 대공과 어떤 관계도 부정해야 살 거라는 이야기가 자자했다.
그런데 지금 도와주고 있는 세력은 꼭 전성기 때 쿠니스가 운영하던 테러단체 SN 같았다.
하지만 SN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즉, 쿠니스와 어떤 모종의 이해관계로 얽힌 다른 세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도영은 말했다.
“확실한 자금과 무기를 갖추고 있는 단체야. 대공이 탈옥하는 걸 도운 무장세력들, 어지간한 정규군에 못지않았어. 중간중간 루아스들도 섞여있는 거 같았고.”
“최선을 다해 찾고 있어.”
“뭘?”
갑자기 가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찾아?”
테라스로 나온 가말은 두 사람이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었던 것처럼 추궁하는 투로 물었다.
도영은 파일을 닫아 자연스럽게 연하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일 이야기야.”
가말은 여봐란듯이 도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연하에게 물었다.
“이반은 뭐해?”
“마감 중. 요즘엔 나보다 더 바쁜 거 같아.”
“아내는 남편 옆에 있어줘야 해.”
가말이 말했지만 연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부부도 개인 시간이 필요해. 그게 영원을 함께할 수 있는 비결이거든.”
그러자 가말은 도영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난 아냐.”
도영은 가말의 뒷머리를 감싸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필요해.”
그러면서 도영은 가말을 떼어내고 문으로 갔다. 물론 가말은 당장 쫓아갔다.
“도영, 어디 가?”
“화장실.”
“나도 가.”
“네가 거길 왜 가?”
두 사람은 아옹다옹하면서 문 너머로 사라졌다. 여전한 모습에 연하는 피식 웃어버렸다.
***
쿠니스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도영 드페르가 살아났다고.”
목을 잘랐는데도.
루아스 바이러스 보균자라니, 상상도 못했다. 이바노프와 ISLE은 대체 얼마나 그를 엿 먹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녀석이 루아스가 되었다.’
오히려 자신 덕분에.
가말을 안을 것이다.
천장까지 솟은 긴 창 너머로 회색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절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져 바다로 돌아갔다.
쿠니스는 그 모습을 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혼자 있고 싶군.”
쿠니스 뒤에 서 있는 두 남자는 살짝 묵례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말없이 복도를 한참 걸어 내려갔다.
마침내 남자가 다른 사내를 보고 말했다.
“저는 추이를 좀 지켜봤으면 하는군요.”
사내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째서요?”
“드페르 소령은 이바노프 혈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이바노프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클랜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도영에게만 피를 기증했기 때문이다.
“지인으로서의 정도 있었겠고, 드페르 소령이 감염을 이긴다면 MCTC와 ISLE을 잇는 차세대 리더로 키울 셈이었겠죠.”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MCTC의 지도부는 거의 인간이니까요. ISLE과 계약을 맺었던 인간들은 은퇴하거나 사망하거나, 이미 물갈이가 일어나고 있죠. 초반에 ISLE과 맺었던 이해관계가 옅어지고 있습니다.”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간들은 루아스들을 군부의 지도자 자리에는 올리지 않을 겁니다. 안 그래도 개인적인 육체 능력이 강한 루아스들에게 제도적인 무력까지 쥐어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게 아직도 MCTC 내에서 루아스 장성이 거의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사내는 ‘흠’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인간으로서 장교가 되었고, 군 프로젝트에 참여해 루아스가 된 경우라면 인간들도 예외로 생각하겠죠. 그래서 드페르 소령을 이바노프로 만들었군요. 멀리 내다봤군요.”
“괜히 ISLE일까요. 어쨌든 중요한 건 드페르 소령이 이바노프 혈통이라는 점이고, 가말과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제야 사내도 깨달은 듯 얼굴에 탄성이 번졌다.
“루아스 배아(체세포 분열이 일어난 이후의 개체. 태아가 되기 전)*를 얻을 절호의 기회군요.”
루아스 배아는 무엇인가.
그건 살아있는 황금에 다름없었다.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생물학적 무기도, 옛날 연금술사들이 금을 꿈꿨듯 불사의 비밀을 품은 물질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내는 흘긋, 아까 그들이 나온 방 쪽을 보았다. 배아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오르가즘을 느낄 정도였지만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저 친구가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군요.”
도영 드페르와 가말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란다는 건 필연적으로 그들이 맺어지길 바랄 수밖에 없다는 건데….
쿠니스가 제 쌍둥이 가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들 사이에서도 비밀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 도움 없이는 운신할 수 없는 친구입니다. 몇 년 전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그 말에 사내는 생각에 빠진 듯싶더니 말했다.
“이바노프 클랜이 얽혀있습니다. 잘못 건들이면 동티가 날 겁니다.”
남자는 싱긋 웃었다.
“물론, 대비는 하고 있어야겠지요.”
붉은 눈이 즐거워하듯이 반짝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