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쭈니>
토라는 침대에 누워서 양손을 머리 뒤에 받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TV조차 틀지 않아 방은 조용했다.
그러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1층 거실로 가자 전면창 너머로 정원 테이블에 앉아있는 라토가 보였다.
라토는 드디어 감시 상태에서 벗어났다. 정확하게는 ‘강도 높은 감시 상태’에서는.
둘이 지낼 수 있도록 배정받은 관사에도 헌병 둘이 주둔하고 있었고, 어디를 갈 때는 그들을 데리고 다녀야 했지만 가택 연금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라토는 아무것도 가져다놓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그래서 토라는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물었다.
“뭐해?”
라토는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그냥, 생각.”
그러더니 나갈 차림을 할 토라를 보고 물었다.
“어디 가려고?”
“잠깐 밖에.”
“다녀와.”
“몸은 괜찮아?”
“괜찮아.”
토라는 라토에게 더 말을 붙여볼까 하다가 잠깐은 혼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몸을 돌려 나왔다. 그리고 타오 대위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대장님.”
타오 대위가 먼저 알은체했다. 토라는 물었다.
“이투하에 대한 제재는 언제 풀리는 겁니까?”
“안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거의 결론이 났다는 거 같으니까요.”
“뭘 더 이야기할 게 있어서?”
“프로세스죠, 뭐.”
토라는 눈을 굴렸다. 하여간 이놈의 프로세스, 프로세스. 실체가 있다면 걷어차서 부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자인이 보이지 않기에 물었다.
“서머 중위는 뭐합니까?”
타오 대위는 무심히 대답했다.
“오프요.”
“그래요?”
분명히 오늘 일이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둘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모르는 타오 대위는 속없이 떠들었다.
“소개팅 한다는 거 같더라고요.”
“네?”
토라는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타오 대위는 오히려 놀라서 물었다.
“네?”
“아,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둘이 막역했나 싶어서.”
타오 대위는 ‘설마요.’라는 글자가 쓰여있는 얼굴로 말했다.
“건너 들었죠.”
아니, 그러고 보니 어제 일이 있다고 하기 전에 ‘약…’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약속이 있다’는 말을 급히 ‘일이 있다’로 고쳤던 모양이다.
“서머 중위랑 소개팅이라니, 어느 간 큰 남자가….”
“가보겠습니다.”
타오 대위가 말하는 도중에 토라는 뒤돌아 나왔다. 걸어가는 내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아마 인간 남자를 만나겠지.
어디 쭉정이 같은 녀석을.
제아무리 잘생겨봐야 그보다 나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한 번 결혼했던 전적도 없을 거고 삼백 살이 넘은 뱀파이어도 아닐 거고 온갖 다른 여자들과 붙어먹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을 것이다.
토라는 거의 제 머리를 쥐어뜯듯이 흐트러뜨렸다.
‘에마와 그러는 모습만 안 보였어도.’
잠깐, 그 정보상 이름이 델마였나? 모르겠다.
아니, 진정하자. 그는 자인에게 좋은 친구로 남자고 결심했다. 자인이 소개팅을 하든 결혼식을 하든 웃으며 축하해줄 것이다. 웃으며….
망할. 자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차피 그 철옹성 같은 성격에 그 남자를 사랑스럽게 보거나 애정을 표현하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만약 그런다면?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을 그 남자에겐 당연한 듯이 보여준다면?
심장이 아프기 시작했다.
“저… 괜찮으세요?”
토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자 한 여자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를 대할 때 여자들이 항상 그러듯이 기대감, 설렘, 열기가 섞인 얼굴로.
정장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기지의 행정직인 모양인데 죄 없는 여자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여자를 보니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토라는 대답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
“소개팅은 어땠어?”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타오 대위가 물었다. 자인은 의아했다.
“대위님이 그건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 SAU 아냐?”
정보활동에 있어서는 전문가라는 의미였다.
자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한테 입조심 좀 하라고 해야겠네요.”
사라는 다른 SAU 대원이었다. 지금 이 기지에 있는 SAU 대원은 몇 없으니 타오 대위와의 친분을 생각해보면 범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타오는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나중에 평범한 군인이 아니라 SAU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받아들여줄 거 같은 사람이야?”
아무래도 SAU 대원들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인은 회의적으로 말했다.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이미 식장이라도 잡은 거 같네요.”
“안 그래도 이투하 대장님도 놀라더라.”
이 맥락에서 등장하는 이투하 대장이 거의 교류가 없었던 라토를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자인은 토라가 제 소개팅 소식을 들었다는 데 속으로 움찔했지만 무심한 투를 가장하고 물었다.
“제 소개팅이 뭐라고 토라 대장님한테까지 말을 하셨습니까?”
“같이 네 뒷담화나 해볼까 했지. 근데 생긴 거에 비해서 사람이 별로 그런 건 안 즐기더라고. 유쾌해서 같이 술자리에 가면 재밌을 타입 같았는데 그건 여자들한테만 한정된 이야기였나 봐.”
타오는 제 할 일을 하며 말했다.
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게 하는 게 타오 대위 특유의 화법이었다.
자인은 회의감에 차 말했다.
“내버려두세요, 좀.”
하지만 타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직업병이야, 남들 사정을 캐보지 않고 못 견디는 건.”
“관음증을 잘도 포장하시네요.”
“관음증이야말로 SAU 대원의 올바른 재질이지.”
“그러니까 부대 마크를 양복점(알몸으로 행진하는 레이디 고다이버를 훔쳐본 유일한 사람 톰은 양복점 직원이었다.)으로 바꾸라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요.”
자인은 말하면서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걸음을 멈추었다.
왜 석연치 못한 걸까, 마음이. 자신이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안녕, 자인.”
그때 어딜 가는 길인지 가말이 지나가며 인사했다. 여담이지만 가말도 자인을 계급 따위로 부르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자인은 돌아보고 인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말이 멈칫하더니 돌아보고 대뜸 물었다.
“소개팅이 뭐야?”
“네?”
자인은 놀랐다.
“그런 걸 왜 갑자기….”
설마 가말까지 제 소개팅 이야기를 들은 건가 싶었다. SAU의 비밀 유지력이 이렇게까지 떨어진단 말인가?
“누가 소개팅을 한다는데 소개팅이 뭔지 모르겠어.”
가말은 천진한 태도로 말했다.
질문하는 타이밍이 공교롭긴 했지만 가말이 다 알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명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인은 최대한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음,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거예요. 근데 그런 이야기는 누가….”
묻고 있는데 갑자기 가말이 지나가는 한 남자 군인을 붙잡고 물었다.
“우리 소개팅하는 거야?”
“네?”
군인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가말은 서로를 번갈아 가리키고 말했다.
“우리 만났으니까.”
자인은 얼른 군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가말을 끌어당겼다.
“그런 식으로 만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떤 식으로 만나는 건데?”
“앞으로 계속 만나는 걸 전제하고…랄까요.”
“자인.”
그러더니 가말은 꼭 어린 조카에게 조언하는 숙모처럼 이랬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자연스러운 게.”
자인은 황당했다. 그러자 가말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거 받아.”
***
“대장님.”
부대 내 술집에 들어가자 모여 앉아있는 이투하 대원들이 토라를 반겼다.
“어때?”
라토가 감시 아래 있는 상황에서 이투하를 대하는 시선과 태도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이투하가 대답했다.
“편견 어린 시선들이 좀 있긴 하지만 괜찮아요.”
토라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겼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냐는 듯.
“이겼죠.”
토라는 잘했다는 듯 그와 주먹을 부딪쳤다. 그리고 간만에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느 순간 손목밴드가 울렸다.
<토라, D-3동 A-1호로 와줘.>
발신자는 가말이었다.
뭔가 부탁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티야. 좀 다녀올게.”
“다시 오십니까?”
“아마. 아직 할 일도 없잖아.”
토라는 가게를 나와 가말이 오라는 곳으로 갔다.
“마티?”
A-1호는 강의실 같은 곳이었다. 오늘은 쓰지 않는지 비어있었다.
부르며 들어서는데, 돌아본 사람은 가말이 아니었다.
“토라?”
자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토라는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 난 인기척에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쾅!
문이 닫혔다.
둘은 놀라서 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토라는 자인을 보고 물었다.
“혹시 여기 마티가 불러서 왔어?”
“네. 아까 쪽지를 주셔서….”
그러면서 자인은 메모를 보여주었다.
- D-3동 A-1호
딱 그것만 쓰여있었지만 가말이 준 거라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온 모양이었다.
토라는 문을 두드렸다.
“마티, 문 열어.”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티, 장난하지 말고. 자인은 지금 일하는 중이야.”
역시 조용했다.
토라는 한숨을 내쉬고 자인을 돌아보았다.
“부수면 나갈 수는 있겠지만 좀 소란스러워질 거 같은데.”
“괜찮아요. 설마 내일까지 여기 가둬두진 않으시겠죠.”
그러고는 자인은 문을 보고 말했다.
“드페르 소령님이 가말 씨를 보면서 가끔 ‘와, 저 또라이’라고 하던데 그 이유를 좀 알 거 같다고 하면 실례일지 모르겠네요.”
“우리 마티지만 부정할 수가 없네.”
그 말을 끝내고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토라는 한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좀 앉을까?”
“좋아요.”
둘은 나란히 앉았다.
토라는 소개팅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래도 친구 하기로 했으니까. 친구 사이에 어땠느냐고 지나가는 이야기로 물어볼 수는 있지 않은가?
“저희 아버지요.”
그런데 자인이 먼저 말했다. 토라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태연히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인은 큰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 같았어요.”
“나?”
“여자들이 아주 좋아했죠. 잠깐 스쳐간 여자들까지 합치면 자기를 엄마로 부르라고 하던 여자들이 몇 명이었는지 다 기억도 안 나요.”
아동학대범 주제에 또 얼굴은 그럴 듯했던 모양이다. 자인이 생긴 걸 보고 짐작은 했지만.
자인은 계속 말했다.
“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남편 될 사람은 요리를 잘했으면 좋겠어요. 딱히 일을 안 해도 상관없어요.”
자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자주 옮겨 다녀야 하니까 사실 고정된 직장이 없는 편이 좋죠. 아이를 좋아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여름에는 같이 수영장에 가고, 겨울에는 스키장에 가고,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자인이 항상 꿔왔던 꿈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자인은 고개를 젖혔다.
“내가 출근한 사이에 옆집 여자가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