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쭈니>
자인은 고개를 젖혔다.
“내가 출근한 사이에 옆집 여자가 그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요.”
지나가기만 해도 여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드는, 섹시한 삼백 살짜리 뱀파이어는 정말 해당 사항이 없었다.
레기온 캠프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온 날 이후로, 무언가 변했다.
자인은 알았고, 토라도 그걸 안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둘 다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자인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소개팅 했어요.”
그래서 자인이 먼저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군인이셨대요. 예레반에 투입된 지상군으로 참전하셨다가 순직하셨죠. 그런 어머니가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꼭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왔대요.”
소개팅 상대는 어머니를 존경한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자인을 보는 눈이 거의 반짝거렸다. 그런 만큼 그녀의 일도 이해해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주선자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너무 꿈에 그린 듯한 조건이라 오히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함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정 같은 건 없었다. 소개팅 상태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가 바라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IT 회사에서 일해요. 재택근무도 할 수 있어서 스케줄이 자유로운 편이죠. 여행을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잘 됐네.”
토라는 평범한 투로 말했다. 약간은 제 이야기를 구구절절 떠드는 친구의 말을 듣다못해 좀 지겨워진 것 같은 투로.
자인은 피식 웃었다.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잘 지냈어요?”
토라는 고개를 돌려 자인을 보았다.
“아니.”
그는 웃지 않고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인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떼로 몰려오는 적들을 봐도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 따위 들지 않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자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가로 다가가 잠긴 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문이 고장 난 거 같습니다.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바로 문을 열 방법이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건 자인도 일부러 소개팅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거였다.
자인이 전화를 끊자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문이 열렸다.
작업자들은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가 왜 쇠사슬로 묶여있는 겁니까?”
“누가 착각했나 봐요.”
자인은 토라를 돌아보고 말했다.
“가볼게요.”
그러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토라도 이게 가말이 일부러 만들어준 자리라는 걸 알았다. 니카 때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내버려뒀던 게 잘못돼서 신경 쓰였는지.
그럼에도 자인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꿈을 알기에 토라는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그가 자인에게 뭘 줄 수 있단 말인가?
평범한 일상? 아이? 같이 늙어가는 즐거움?
일단 그도 꽃을 먹고 사니까 나이를 먹긴 하겠지만 아마 가말처럼 몇 천 년이 지나야 몇 살쯤 더 먹어 보이는 정도일 것이다.
토라는 처음으로 뱀파이어가 된 걸 후회했다. 뱀파이어가 되지 않았다면 자인을 만날 수 없었겠지만 인간으로 자인을 만났더라면. 니카도, 그 어떤 여자도 모르는 순진한 몸과 마음으로….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뱀파이어도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하지 못했고,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곱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
도영은 현관문 옆에 놓아둔 백을 메고 돌아보았다. 가말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몽사몽간에 서있었다.
도영은 말했다.
“더 자도 된다니까.”
“도영 일 가. 안녕해줘야 돼.”
“타운 반상회 반장인 클로에 씨가 오후에 데리러 올 거야. 모임에 나가봐.”
가말은 갑자기 잠이 깬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돼?”
“타운에 맥코이 하사를 포함해서 루아스 대원이 둘 더 있어. 둘 다 아내들 쪽은 인간이지만 루아스가 그리 낯설지 않으니까 괜찮아. 네 사정도 다 설명해뒀으니 배려해줄 거야.”
“응. 알았어.”
가말은 인간들이 많은 곳에 가자니 좀 긴장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은 가말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다녀올게.”
순간 가말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다녀온다는 말에 응당 해야 하는 말은 이것 같아 말했다.
“다녀와.”
정답이었는지 도영은 웃고는 가말에게 입 맞추었다. 가말은 마냥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 눈높이가 같아서 도영의 목에 있는 흉터를 보았다.
가말이 움찔하는 걸 느끼고 도영은 벽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군용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흉터가 그대로 보였다.
도영은 물었다.
“보기 싫어?”
가말은 과하다 싶을 만큼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그래도 틈이 날 때마다 가말은 흉터를 핥았다. 그런다고 낫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핥다보면 상처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게 더 그의 욕정에 불을 지핀다는 건 모르는 것 같았지만.
“다녀올게.”
일단 도영은 말했다.
“응.”
도영은 집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백미러로 자신을 보았다.
자신이야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거울을 볼 때를 제외하면 목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지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존재감이 희미한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가말에게는. 볼 때마다 이게 왜 생겼는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잠입과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원으로서 이 정도로 눈에 띄는 특징이 있는 쪽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목에 큰 흉터가 있는 대원’이라고 하면 바로 그를 의미하는지 알 테니.
도영은 일단 출근하기 위해 차를 출발시켰다.
***
“저….”
한 중년 여자가 열려있는 문가에 나타났다.
“가말 씨?”
“응. 안녕.”
가말은 말했다.
당당한 반말에 여자는 순간 당황했다가 가말의 나이가 외모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클로에 마틴이라고 해요.”
“가말이야.”
“반가워요. 그런데 여기서 뭐하세요?”
가말은 현관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의 가장 아래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도영 기다려.”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다른 할 일도 없어.”
TV를 틀어봤지만 어떤 프로그램이든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었고, 책은 하도 읽다 보니 오히려 좀 쉬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도영이나 기다리자 하고 이 자리에 앉았다.
멍 때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보기보다 지겹거나 힘들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내내 문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를 보는 양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튼, 가실래요? 반상회가 있다고 소령님께 이야기는 들으셨죠?”
가말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그리고 같이 한 블록을 내려가는데, 클로에가 계속 그녀를 힐끔거렸다.
“왜?”
뭔가 이상하게 여기는 건가 싶어서 가말은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자 클로에는 정신을 차린 듯이 말했다.
“아, 미안해요. 너무 예뻐서.”
그런 거라면 상관없었다.
“마음껏 봐.”
클로에는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캐릭터가 확실하시네요.”
가말은 의아해졌다.
“캐릭터가 뭐야?”
“아… 음, 성격이 확실하다고 할까?”
“성격이 확실해? 어떻게?”
“개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개성은 뭐야?”
끊이지 않는 질문에 클로에는 당황했다. 이제 도영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다 대답해주는데 클로에는 막 그들이 도착한 집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들어갈까요?”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클로에, 어서 와요.”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백인 여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클로에 뒤를 따라 들어오는 가말을 보더니 탄성을 내었다.
“가말 씨? 진짜 엄청 미인이시네요.”
“응.”
가말이 당당하게 대답하자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막 차를 마시려던 참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있는 사람들이 소파를 중심으로 모여앉아있었다. 그리고 가말을 보고 하나둘 인사했다.
클로에가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무슨 차로 드릴까요? 요즘 플로스가 함유된 차가 나오던데 그걸로 드릴까요?”
가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누구나 그녀가 뱀파이어인 걸 알면서도 평범한 사람과 대화하듯이 아무렇지 않아하다니…. 그렇다고 부족에서처럼 신으로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젊은 흑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남편도 맛이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맥코이 하사의 아내인 모양이었다.
“여기요.”
클로에가 가말에게 찻잔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드페르 소령님이 큰일을 겪으셨어요. 임무 중에 루아스한테 물려서 감염됐다면서요?”
이들은 타실 프로젝트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기밀 프로젝트라고 했으니까.
다른 여자가 말했다.
“꽤 안 좋은 케이스였나봐요. 거의 죽었다 살아나셨다면서요. 루아스가 되면 상처는 다 치료가 된다고 하던데 목에 흉터가 남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가말은 순간 눈에 띌 만큼 침울해졌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여자들은 계속 웃으며 대화했다.
***
자인은 간만에 굉장히 즐거운 저녁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오늘로 두 번째 만나는 소개팅 상대 에이든은 오랫동안 주짓수를 해서 일반인치고 몸도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유머러스했다. 화제가 다양해서 이쪽이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들어도 지루해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에이든이 재밌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줄 때 자인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고, 간만에 어떤 걱정도 스트레스도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친구와 보내는 저녁 같다는 점이었다. 진짜 ‘친구’ 말이다.
자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런 남자를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 못하다니, 상식에서 벗어나는 존재와 오래 다닌 탓인지 자신의 상식도 어딘가 맛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정말 깊이 생각해봤는데.”
갑자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인은 흠칫해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 토라가 서있었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토라는 기가 질린다는 듯이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갑자기 나타났다고 나이프부터 집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제야 자인은 기척을 느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스테이크용 나이프를 움켜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거의 버릇이었다. 적이라면 바로 찔러버릴 수 있게.
그리고 자인이 그러는 줄도 몰랐던 에이든은 정말 그녀가 나이프를 쥐고 있는 걸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얼굴이었다.
자인은 머쓱해서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어보려고 했다.
“여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