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코드네임 베스티아-63화 (63/110)

63화<쭈니>

자인은 머쓱해서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어보려고 했다.

“여긴 왜….”

“억울해.”

하지만 토라는 말을 끊고 제 말을 했다.

“내가 평범하지 않을 건 또 뭐야?”

자인은 기가 찼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일단 지금만 해도 식당에 있는 손님이 전부 토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더 말할 것도 없이 눈에 띄는 외모에.

“이제 남 생각은 그만하려고.”

그러고는 토라는 의자에 놓여있는 자인의 핸드백과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봐요!”

에이든이 분연히 외쳤다. 그러자 토라는 붉은 눈으로 쳐다봤을 뿐이다.

요즘엔 패션으로 붉은 컬러렌즈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당연히 토라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실제로 오래 산 뱀파이어의 붉은 눈을 본 적이 없는 에이든도 그게 컬러렌즈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뱀…!”

에이든이 화들짝 놀라 물러서다가 의자를 쳐서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토라는 다시 자인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토…!”

자인은 외치려다가 아무래도 둘이 사라져주는 게 이 레스토랑의 평화를 위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서 에이든을 돌아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연락드릴게요.”

그런데 아무래도 자인이 반쯤 납치당하는 모양새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자인은 끌려나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변명했다.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는 뱀파이어예요. 괜찮아요. 아는 사이에요.”

마침내 둘은 밖으로 나왔다.

“토라!”

자인이 외쳤지만 여전히 토라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총 꺼내게 하지 말아요.”

토라는 갑자기 돌아보고 말했다.

“나 요리 잘해.”

“네? 갑자기 무슨….”

하지만 토라는 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직장 없고, 애 좋아해. 내가 키운 부족 애들이 몇 명인 줄 알아? 그리고 이게 궤변처럼 들릴진 모르겠지만 바람피운 적은 없어.”

자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맞아요. 궤변이에요. 그거야 당신이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가진 적 없이 몸만 탐했기 때문이죠.”

“니카가 그렇게 죽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어.”

토라는 생애 처음 하는 이야기를,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때 자인은 토라가 아직 자신의 백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는 이야기는 진지한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인은 토라를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살 수 있어요? 이 도시에서.”

토라는 MCTC와 계약을 맺고도 최대한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외적인 일을 하는 건 거의 라토의 몫이었다.

“살 수 있어.”

하지만 토라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섬에서 잘 나오지 않았던 건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야. 문명 세계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어. 오히려 재밌는 게 많다고 생각했지.”

사실 토라는 기계를 꽤 좋아했고 자신이 모르는 현상이나 개념에 관심을 보였다.

라토는 생존을 위해서 노력해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느낌이라면 토라는 오히려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자인은 고개를 저었다.

“난 금방 늙어버릴 거예요. 눈 깜짝할 사이에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모습이 아닐 거라고요.”

“놀랍네.”

“뭐가요?”

“자인도 여자라는 게. 겉모습 걱정부터 하는 거 보니까.”

자인은 울컥했다.

“난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모습이 좀 변한다고 마음도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니면 애초에 인간은 쳐다보지도 않았어.”

이 나이 먹고 깨달은 사실이지만, 토라 그는 여자의 아름답거나 귀엽거나 나긋나긋한 점에 끌리는 게 아니었다.

니카가 귀엽고 나긋나긋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착각했지만 어쨌든 처음 만났을 때 니카의 심지 굳고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끌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인은 니카처럼 귀엽고 나긋나긋한 스타일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빨리 깨닫지 못했다.

그때 토라 곁을 지나가는 한 여자가 그를 힐끔거렸다. 그에 자인은 지나가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토라를 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인은 자신을 다잡았다.

“불안해하고 싶지 않아요.”

“불안해하지 마.”

토라는 살짝 자인의 손끝을 잡았다. 허락을 구하듯.

“내가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쳐다봤던 건 하나만 쳐다볼 대상이 없어서 그랬던 거였어. 쳐다볼 대상이 있는데 뭐 하러 다른 데를 봐?”

그러면서 손에 꾹 힘을 쥐었다.

“하지만 어쨌든 예전에 그랬던 걸 후회하고 있어. 그렇게 살다가는, 진짜 쳐다봐야 할 대상이 나타났을 때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는 걸 몰랐어.”

하지만 자인은 시선을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토라가 본 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상대해야 할 적이 그였든 테러리스트였든. 그런 자인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손에 힘을 빼고 토라가 잡고 있는 대로 내버려두었던 자인이 토라의 손을 맞잡았다. 손에 말려드는 온기에 토라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다음 순간 자인이 백을 가져갔다.

“미안해요.”

그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토라는 다시 잡을 수가 없었다. 자인은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일과는 별개로 내가 원하는 인생은 하나였어요. 평범한 거. 평범한 남편과 아이가 있고, 평범한 일상과 휴일이 있는 거요.”

토라는 슬퍼졌다. 그는 절대 그런 걸 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당신과 있으면 그런 게 불가능해요.”

자인은 역시 그렇게 말했다.

“내 안에 이런 격렬한 감정이 있는지 몰랐어요. 여자들이 당신을 쳐다보면 다 죽여버리고 싶어요.”

토라는 조금 고개를 들었다. 뭔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자인은 거칠게 말했다.

“니카 씨가 라토 대장님을 봤던 감정이 이런 거겠죠.”

그러고는 토라가 뭐라고 하기 전에 손을 들면서 덧붙였다.

“미안해요. 상처인 일을 멋대로 언급해서. 다만 사실대로 말하는 거예요. 내 감정이 그 정도로 다르지 않다는….”

토라는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이거 고백이야?”

“아니에요.”

확실히 고백을 한다고는 볼 수 없는 사나운 어조로 자인은 단언했다.

“그날 감옥에서, 당신이 내 피를 빨 때. 이대로 당신한테 피를 빨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당신과 있으면 난 내가 아니게 되는 거 같아요.”

하지만 토라는 또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고백인데.”

자인은 그를 노려보았다.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아니, 이해하고 있어.”

그러고는 토라는 자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인이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거.”

자인의 눈 깊은 곳에 떨림이 일었다.

“미칠 거 같아. 기뻐서.”

자인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뻐할 게 아니에요.”

언젠가 자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지금 토라는 미칠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행동이라고는 안 해도 이 여자가 사랑스러워서.

이건 키스하지 말란 게 더 무리였다.

토라는 손을 잡아당기면서, 키스했다. 놀랍게도 자인은 거부하지 않았다. 밀려드는 그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둘이 맞닿은 부분에서 화학반응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단순한 몸의 화학반응이 아니라 영혼이 맞닿는 느낌에 가까웠다. 떨리는 눈썹과 숨결,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사랑스러운 느낌….

자인은 애써 정신을 차리듯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과 이러고 있으면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생각하지 마.”

토라는 다시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겹치며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그는 그녀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입안으로 말이 사라졌다.

토라는 벽을 짚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인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자인도 손으로 갈퀴를 긁듯이 양팔로 그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오, 열렬한데.”

행인 중 약간 불량한 친구들이 휘파람을 불며 지나갔다. 하지만 둘은 그 소리도 듣지 못했다.

자인은 놀라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토라는 강렬한 허기를 느꼈다. 감옥에서 피가 모자를 때처럼 폭력적인 갈증은 아니었지만 갈증의 강도와 크기는 오히려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인은 힘껏 그를 밀어냈다. ‘힘껏’이라고 해도 정말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힘에 비하면 살짝 미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애써 그를 밀어냈다.

“그거 알아요?”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래도 이성은 안 된다고 말하는 기분.”

“자인….”

자인은 그를 밀어낸 팔에 힘을 주었다. 더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듯.

정적이 감돌았다. 토라는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자인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밀어붙여봤자 더 반발하기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토라는 말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자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혼자 갈게요.”

돌아서서 가다가 돌아보았다.

조명이 빛나는 밤거리에 자인은 부드럽게 빛나는 것 같았다.

“토라, 당신도 잘 생각해봐요. 당신의 인생에서 난 그저 잠깐의 지나침일 뿐이에요.”

토라도 왜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미 삼백 년을 살았다. 그 삼백 년간, 지금으로서는 자랑삼아 말할 건 아니지만 수많은 여자를 만났다. 개중에 진짜로 사랑하게 된 건 자인뿐이었다.

여자 한 번 만나보지 못한 인간 시절 뭣 모르고 니카를 좋아했던 걸 빼면.

“하지만 백 년 동안은 누구보다 행복할 거야. 그리고 행복한 백 년의 기억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백 년은 너무 길지 않아요?”

지금부터 계산해도 정말 길어야 80년일 것이다. 그것도 인간 나이로 아흔이 넘어가면 몸의 많은 부분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누릴 수 있는 80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토라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과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잖아.”

그러고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유전자의 끝에 있는 텔로미어를 짧아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면 인간도 늙지 않을 수 있다고. 혹시 알아. 진짜 텔로미어가 돌파구가 돼줄지도. 인간인 상태로 영원히 사는 거지.”

자인은 웃었지만 슬픈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낙관적인 기대만으로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가볼게요.”

그리고 자인은 돌아서 걸어갔다.

하지만 토라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자인의 향기가 근처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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