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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네임 베스티아-64화 (64/110)

64화<쭈니>

자인은 말했다.

“저번 일은 죄송합니다.”

막 회사에서 나온 에이든은 자인을 보았다.

어쨌든 얼굴을 보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다.

에이든은 자인을 보다가 그 뒤, 도로 건너에 시선을 멈추었다.

“저 사람은….”

토라는 자인이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따라왔다.

보다시피 지금은 도로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고. 둘이서 뭐라도 하지 않을까 감시하는 남편인 양 눈을 부릅뜬 채.

“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 건가요?”

에이든은 물어보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아니면 제가 그런 건가요?”

자인은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양다리 같은 건 아니었다고 하려다가, 굳이 아니었을 건 뭔가 싶어서 변명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 억지로 만나려고 했던 거였으니.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쌌다. 그러나 에이든은 욕을 하기는커녕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서머 씨를 만나는 건 즐거웠으니까요.”

그러더니 토라를 보고는 난감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인연은 아니었던 거 같지만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꿈에 그린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에이든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잡고 싶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자인.”

그때 뒤에서 토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인은 무시하고 걸어갔다. 그러자 커다란 것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토킹 당해본 적 있냐면서요?”

결국 자인은 돌아보고 말했다.

“배고파.”

토라는 딴소리를 했다. 자인은 기가 찼다.

“대충 뭉개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친구잖아.”

친구는 무슨.

그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개소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괜히 빌미만 만들어준 것이다.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이네.”

토라는 눈치 빠르게 말했다.

“맞아요.”

그렇게 키스하는 친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토라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봤어. 자인 말도 맞는 거 같아. 그러니까 자인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뭔가를 강요할 수는 없는 거니까.”

토라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 일 자체가 너무 낯설어서 잊고 있었는데,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은 여자를 유혹하는 거였다.

물론 자인은 단순한 ‘여자’와는 성격도, 그에게 의미도 다르지만 좀 더 간단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자인이 밀어낸다면 유혹하면 될 것 아닌가? 특히 자인도 진심으로 밀어내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자인을 유혹해서 그에게 넘어오게만 만들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때 자인은 뭔가 느낀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갑자기 불안해지네요.”

토라는 싱긋 웃었다.

“기분 탓 아닐까?”

그러고는 심상하게 물었다.

“그래서 밥 먹으러 가?”

자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

햄버거 포장을 까는 토라를 보며 자인은 말했다.

“저번부터 느꼈는데 햄버거를 좋아하네요.”

“가장 문명 세계스러운 음식이라서. 그리고 칼로리가 높잖아.”

뱀파이어는 플로스 외에도 상당히 많은 칼로리를 섭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약간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할까.

피는 고양이의 타우린처럼 필수적으로 섭취해야하는 요소일 뿐,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생각보다 식비에 많은 돈을 써야했다.

토라는 물었다.

“다른 거 먹고 싶었어?”

“딱히요. 햄버거란 미국인의 소울 푸드죠.”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어서 토라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쪽이 동양계였어?”

“할머니가 대만 분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고.”

“그런 거치고 동양 핏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네.”

자인은 쿼터가 아니라 하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양계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런 편 같아요.”

토라는 좀 더 자인을 뜯어보았다.

오늘 자인은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원래 사회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스러운’ 차림은 하지 않았지만 유난히 더 시크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자인은 그녀만의 독특한 여성성을 내뿜었다. 어쩐지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강하고 단단해서 오히려 우아한 느낌이 있는 카리스마였다.

“키스하고 싶어.”

저도 모르게 툭 말이 나왔다.

자인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뭐….”

제 실수를 깨달은 토라는 손으로 제 정수리를 덮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진짜.”

유혹이란 모름지기 좀 더 은밀하고 은근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혹하면 된다니, 자인을 상대로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차라리 농담을 하거나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자인은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중위님?”

지나가던 여군들이 알은체했다.

“아.”

자인은 정신이 든 것처럼 그녀들을 보았다. 여군들은 토라를 힐끔거리면서 말했다.

“데이트 중이신가 보네요.”

“아니야. 지나가던 유기견한테 밥 주는 거야.”

토라는 황당했다.

“내가 개야?”

여군들이 전부 토라를 돌아보았다. 개라기엔….

“그럼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여군들이 반은 자인을 놀리고 싶어 하는, 반은 사심이 있는 얼굴로 물었다.

자인은 토라를 보았다. 역시 단둘이 있는 건 위험했다.

“그래.”

자인이 허락하자 여군들은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그리 넓지 않은 데다가 토라의 몸집 때문에 꽤 꽉 끼게 앉게 된 모양새였다.

“이투하 대장님이시죠?”

한 여군이 물었다.

이제 기지에서 토라와 라토는 제법 유명했다. 그 난리를 겪고 돌아왔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군들은 토라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 토라는 쓸데없이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러다가 한 여군이 말했다.

“저 이투하 부대의 사니 씨하고 알아요.”

“아, 사니. 1분대 소속이야.”

토라는 대답했다.

“처음에는 한마디도 안 하셔서 무서웠는데 엄청 잘 챙겨주시더라고요.”

“사니가 그렇지.”

이제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 않는다며?

사실 토라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눈, 오히려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데에 가까운 눈이었지만 어쨌든 시선의 방향으로만 봤을 때는 분명히 다른 여자를 보고 있었다.

자인은 정말 기가 막혔다. 그조차도 싫어지는 자신한테.

지금도 이런데 토라와 사귀기라도 한다면…. 제 직업이 총기 소지가 가능하다는 게 더 위험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여군이 토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연락처 물어봐도 될까요?”

토라는 싱긋 웃었다. 자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 여자를 유혹하는 웃음이….

“안 돼. 난 서머를 좋아하니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다들 깜짝 놀라 자인을 보았다. 자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토라!”

자인의 어조가 날카로워서 토라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왜? 사실대로 말한 건데.”

토라는 굽히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오늘 내로 전 기지에 소문이 날 것이다. 이투하의 대장이 SAU 대원을 좋아한다고 했다고.

“어머….”

여군들은 자인처럼 통상적인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소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개중 한 여군이 감탄하며 말했다.

“중위님 성을 부르는 건데 꼭 애칭 같네요.”

어조가 하도 달콤해서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토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서머는 성도 예쁘니까.”

여군들은 또 소녀처럼 반응했다. 자인은 진짜 이를 깍 깨물고 ‘흐즈 므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위 성공했네.”

갑자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나가다가 말한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은 동기였다.

“중위, 이투하에 꽂혀서 공부 엄청 열심히 했잖아. 그래서 이투하 같은 사람들이 취향인 줄 알았지.”

그녀는 토라에게 들으란 듯이 빈정거렸다. 자인은 이런 오해가 낯설지 않았다.

“그럼 이투하면 다 괜찮았던 건가.”

토라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여군들은 흘긋 자인의 눈치를 보았다. 자인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좋을 대로 생각하게 두는 편이 낫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토라가 양팔을 탁자에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정말 궁금한 걸 묻듯이 물었다.

“근데 내가 이투하를 만든 사람인데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자인은 지그시 미간을 짚었다. 머리가… 아팠다.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에 자인은 쌍꺼풀 선이 진해지도록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여군들에게 말했다.

“나 좀 먼저 일어나도 될까.”

“아, 네.”

자인은 일어나 나왔다. 토라는 당연하게 따라왔다.

“왜 따라와요?”

“그럼?”

너무 당연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일 없어요?”

“이투하는 아직 행동 금지 상태야.”

하느님, 맙소사.

***

자인은 피곤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야생 상태의 토라를 데리고 단둘이 바깥을 헤매고 다닐 때보다.

요 며칠 토라는 그녀를 쫓아다녔다. 졸졸졸. 이제는 소문이 나다 못해 다들 이 모습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자인은 오늘도 자신을 쫓아다니는 토라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행동 금지 상태여도 부대는 좀 들여다봐야 하지 않아요?”

“이투하는 원래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됐어. 행동대장도 다 별도로 있고. 딱히 대장이 필요하지 않은 녀석들이야.”

그게 토라가 섬에 있을 때도 이투하가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이었지만 지금 자인에게는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토라는 말했다.

“이를 테면 난 그런 거지. 얼굴 마담.”

“바지 사장이란 말도 있잖아요?”

“얼굴 마담 어감이 더 예쁘지 않아?”

하여간 능글거리는데 실소가 났다. 누가 이 남자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 있을까?

“웃었네.”

토라는 미스터리한 일이라도 본 것처럼 말하더니 뒷말을 하려고 했다.

“예ㅃ….”

“말하지 마요.”

자인은 당장 그 말을 막았다. 토라는 기막혀했다.

“말하는 건 내 자유 아냐?”

“듣지 않을 자유도 있잖아요.”

“그렇지.”

토라는 의외로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입 모양으로만 이러는 것이다.

‘예뻐.’

“토라.”

자인은 토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토라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 아무 말 안 했는데.”

자인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귀가, 타오를 것 같았다.

그때였다.

“라토.”

갑자기 토라가 자인의 뒤를 보고 말했다. 자인이 돌아보니 라토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헌병 둘이 따르고 있었다.

“뭐해?”

라토가 물었다.

토라와 톤은 같은데 한 귀에도 차이점이 느껴질 만큼 느낌이 다른 목소리였다. 이렇게 비슷한 목소리로 이 정도로 다른 느낌을 주는 게 신기했다.

“이쪽 기억하지?”

토라가 자인을 말하자 라토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자인 서머 중위였죠.”

“네, 기억하시는군요.”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저희를 구해주신 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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